분야 | 역사/근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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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05년 5월 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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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시기/일시 | 1906년 10월 15일 |
발생|시작 장소 |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시 |
관련 인물/단체 | 샌프란시스코 교육위원회 |
1905년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샌프란시스코 교육위원회가 백인과 재미 한인, 일본인, 중국인, 아메리카 인디언 학생을 분리 교육하려 시도했던 사건.
1905년 5월 6일 샌프란시스코 교육위원회는 일본 학생들을 백인 학생들과 분리 교육한다는 결의문을 통과시켰다. 일본인 학생들과의 공동 생활에서 백인 학생들이 악영향을 받게 될 것이라고 여겨서였다. 이에 더하여 샌프란시스코 교육위원회는 아메리칸 인디언과 몽골리안, 중국 학생들도 백인 학생들과 분리 교육한다고 규정함으로써 재미 한인 학생들도 공립 학교에서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였다. 인종적 차이를 불평등 교육의 기준으로 삼아 재미 일본인과 재미 한인 학생들이 공립 학교에서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 것이다. 1906년 10월 15일 샌프란시스코 교육위원회가 분리 교육 결정을 실행에 옮기자 일본이 강하게 반발하였다. 일본 정부의 항의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의회에 교서를 보내 샌프란시스코 교육위원회의 부당한 결정을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샌프란시스코 교육위원회의 분리 교육 결정은 샌프란시스코 공립 학교에 재학하는 백인 학생들이 일본인 학생들과의 공동 생활 과정에서 동양적 사고에 물드는 것을 경계할 목적이었다. 또한 백인 여학생들에 대한 나이 많은 일본 남학생들의 부적절한 행위 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캘리포니아 지역 주민들의 반일 운동이 심화되자 루스벨트 대통령은 급히 샌프란시스코 교육위원회 위원들을 워싱턴으로 초청하여 분리 교육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을 찾으려 시도하였다. 그 결과, 캘리포니아에서는 비슷한 연령과 능력을 갖춘 학생은 인종에 상관없이 정규 공립 학교를 계속 다니도록 허락한다는 최종 타협안을 도출하였다.
인종에 상관없이 공립 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최종 타협안이 도출되자 샌프란시스코 교육위원회는 분리 교육 결정을 철회하였다. 그러나 재미 중국인과 재미 한인 학생들은 동양인 학교로 배치되고, 일본인 학생들은 백인 학생들이 다니는 공립 학교로 복귀시킨다는 최종 결정이 내려졌다. 최종 결정으로 인해 재미 한인 학생들은 공립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였다.
재미 한인 학생들은 재미 일본인 학생들과 달리 샌프란시스코 교육위원회의 차별로 인해 공립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