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大韓國民會庚戌國恥反對運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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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미국 캘리포니아주 하와이주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10년 6월~1910년 7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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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7월 전후 북미 서부지역에서 전개된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한 재미 한인의 한일 병탄 반대 운동.
대한국민회 경술국치반대운동은 1910년 6월부터 7월까지 북미 지역에서 진행된 한일 병탄 반대 운동이다. 당시 하와이, 북미, 극동, 멕시코 등 세계 전역의 재외 한인 단체들이 단합하여 항일 운동을 펼쳤다.
1910년 8월 29일 이완용과 일본 통감 데라우치 마사요시[寺內正毅]가 8개조의 한일 합방 조약문을 발표하였다. 이미 같은 해 2월부터 한일 합병 계획에 관한 소식이 각 신문사를 통해 전해지면서 재미 한인들은 곧바로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1909년 2월 1일 북미 한인공립협회총회와 하와이 한인합성협회가 통합하여 ‘국민회’가 설립되었다. 1910년 5월에는 대동보국회가 공식적으로 국민회에 참여함으로써 대한인국민회가 미주 한인 사회의 대표 기관으로 발족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한일 병탄에 대한 문제는 조국의 운명이 걸린 문제였기에 당시 하와이와 북미, 극동, 멕시코 등 모든 재외 한인 단체들이 대단합을 위해 대한인국민회 조직에 동참하였다.
1910년 6월 25일 국민회는 일반 재외 한인들을 대상으로 근고문(謹告文)을 돌림으로써 미주와 하와이에 산재한 정치, 종교, 실업, 사교 각계의 대소 단체를 통합하고자 하였다. 이에 1910년 7월 3일에 대한인국민회 북미 지방총회가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에서 공동 대회를 열었다. 공동 대회에서 항일 운동 방침을 정하고 애국동맹단을 조직하였으며, 9개조의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이틀 후인 7월 5일에는 하와이주 각 지방 대표자들이 호놀룰루에서 회합을 갖고서 한일 병탄에 반대하는 결의를 하고 대동공진단을 조직하였다. 7월 6일에 국민회는 고종 황제와 일본의 외무성을 통해 일본의 황제에게 보내는 전보문을 각각 발송하였는데, 고종 황제에게는 끝까지 한일 합방을 거절할 것을, 일본 측에는 한일 합방 정책을 변경하여 한일 친선을 실천하도록 촉구하였다. 7월 9일에 애국동맹단은 통고문(通告文)을 결의하였다. 통고문에서는 조국이 처한 상황을 호소하는 외교 선전의 필요성과 국토 회복을 위한 군인 양성의 필요성을 피력하고 있다. 9월 11일에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는 공동 대회를 열고 한일 병탄에 대한 거부와 결의문을 연합통신을 통해서 세계에 발표하였다.
대한국민회 경술국치반대운동은 북미 지역에서 애국동맹단과 대동공진단의 결성으로 이어졌고, 나아가 1910년 7월에 군인 양성소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재미 한인의 군인 양성 운동은 경술국치를 겪으면서 생겨난 애국심과 반일 감정에서 나온 활동이었으며, 그 목적은 사관 인재를 양성하여 독립군 편성에 도움이 되려는 것이었다. 1910년 10월 3일부터 캘리포니아주 클레어몬트(Claremont)에서는 훈련반이 조직되어 매달 3일 저녁에 병식 훈련이 진행되었다. 11월 10일에는 캔자스시에 소년병 학원이 조직되었다. 특히 11월에는 국민회 내부에 연무부가 설립되면서 재미 한인들이 많이 거류하는 지역마다 병식 교련을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대한국민회 경술국치반대운동은 대한인국민회가 미주 한인 사회의 대표 기관으로 자리 잡게 되는 사건이자, 뒷날 해외 항일 운동에서 여러 단체의 결성과 군인 양성 운동 등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된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