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Korean language school in Hawa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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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 Korean language school in Hawaii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학교 |
지역 | 미국 하와이주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원어 항목명 | Korean language school in Hawa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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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학교 |
일제 강점기 미국 하와이주에서 초기 하와이 이민 중간 세대인 한인 1.5세대들에게 한국어 및 조선의 역사·풍속·윤리 등을 가르치기 위해 세워진 학교.
초기 하와이 한인 이주민들은 조선어학당을 세워 한글뿐만 아니라 조선의 역사·풍속·윤리 등을 가르쳤다. 어린 나이에 조선을 떠나 하와이에 정착한 한인 1.5세나 이민 초기 하와이에서 태어난 2세들이 그 대상이었다. 1903~1905년 사이에 하와이로 이주한 이민 1세대들이 데려온 1.5세 자녀나 하와이에 정착 후 낳은 자녀들이 공립이나 사립학교에 들어가는 나이를 추정해 볼 때, 1910~1920년 사이에 많은 한인 1.5세 및 2세들이 조선어학당에서 공부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웨인 패터슨[2000]의 주장에 따르면 1921년 8개의 조선어학당과 337명의 학생들이 있었고[같은 해 중국어 학교는 14곳, 일본어 학교는 175곳], 1925년에는 조선어학당이 1개 늘어나 9개였다[같은 해 중국어 학교는 12곳, 일본어 학교는 142곳]. 미국 내무부에서 1920년 펴낸 『A survey of education in Hawaii』에서는 ‘조선어학당 수는 10개, 선생 수 12명, 대략적인 등록 학생 수는 800여 명’으로 나타난다.
조선어학당의 주요 교육 사업은 모국어인 한국어를 배우는 데 목적이 있었다. 『A survey of education in Hawaii』에 의하면, “빠르게 퍼져 나가는 한국의 민족주의 정신에 따라 10개 학교에 800여 명의 학생들이 등록하였고, 이들 학교에서는 한국어를 가르쳤다.”라고 할만큼 1.5세들의 한국어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조선어학당은 늦은 오후나 밤에 수업이 열렸는데, 한국어뿐만 아니라 한국사·풍속·윤리 등을 배울 수 있었다. 조선어학당이 가진 주요 기능으로는 부모 세대들이 배우고 익힌 한국어를 자녀들이 배울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고 학교 수업을 통해 바람직한 사회 행동에 대한 기준을 제공하였으며, 한인들 간의 민족적 유대성을 강화하였다는 것이다. 또 이중 언어를 구사하여 취업에 유리하도록 하였으며, 2세들이 하와이 지역을 떠날 경우 조선어학당에서 배운 한국어 실력으로 서신을 교환할 수 있었다[Patterson, 2000]. 여러 순기능이 있었음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조선어학당 수와 등록 학생 수는 정체되거나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초기 하와이 이주민들이 하와이에서 다른 미주 지역으로 옮겨간 것, 한글 교재 제작이 어려웠다는 것, 1930년 이후 대공항으로 조선어학당이 금전적 보조를 받기 힘들었다는 것, 또 (특히 일본이나 일본어 학교와 비교할 때) 하와이 한인들의 독특하고도 독립적인 부분은 하와이 내 일본과의 교역이 상당했다는 점에 비추어 한국어를 배우는 것이 큰 이점으로 다가오지 않았다는 것 등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Patterson, 2000]. 그리고 1921년 7월 하와이 정부가 각종 언어 학교에 면허를 취득하도록 법령화하고 교사들에게 자격 시험을 보도록 한 것도 조선어학당 감소의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어학당 설립 이후 부침을 거듭하였지만 재미 한인 1.5세들에게 한국어 교육을 제공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재미 한인 1.5세들이 모국어 및 한국의 전통문화를 익힘으로써 한국인의 정체성이 유지·보전될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그들이 이민 1세대 부모들 및 2~3세대 한인들과의 중요한 연결 고리 역할을 담당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