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Sino-Korean Peoples' Leagu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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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中韓民衆同盟團 |
영문 | Sino-Korean Peoples' League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설립 시기/일시 | 1935년 2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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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항목명 | Sino-Korean Peoples' League |
성격 | 사회단체 |
설립자 | 차신호|최선주|최창덕|서재근|민찬호|권도인|정봉관|이태성|김백수|김경준|오창익|조경천 등 |
1935년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에서 한중 간 우호 증진 및 항일 투쟁 협력을 위해 조직된 구국 운동 단체.
중한민중동맹단은 1935년 2월 15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민간 구국 단체로 조직되었다. 발기인은 차신호·최선주·최창덕·서재근·민찬호·권도인·정봉관·이태성·김백수·김경준·오창익·조경천 등이었고, 단장은 차신호, 정두옥을 거쳐 뒤에는 한길수가 맡았다. 단원은 적을 때는 40여 명 선이었으나, 많을 때는 200여 명까지 가담하였다. 중한민중동맹이란 이름을 내걸었지만 중국인 회원은 없었다. 초기에는 활동이 미미하였으나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뒤에 대한인국민회로부터 미주 대표로 파견된 선전부 외교원 한길수의 독립을 위한 외교 활동과 순회강연 후원에 주력하였다.
설립 시기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도 있는데, 예를 들어 『재미 한인 50년사』에서 김원용은 1938년 12월 2일에 설립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중 두 민족의 우의 및 항일 투쟁 협력을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1935년에 설립된 중한민중동맹단은 1937년 11월경 현지 언론에 기사[『국민보(國民報)』 1937년 11월 10일자 「한길수 씨 대 일포시사」]로 등장하기 시작하고, 1939년경부터 「중한민중동맹단 선전문」을 발행하는 등 활동을 본격화하였다. 중한민중동맹단은 1941년 4월에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참가하였으나 내분 조장의 이유로 1942년 2월 면직 탈퇴 조치된 이후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하였고, 임시 정부로부터 정식 기관으로 인준을 받기 위한 노력도 성사되지 않게 되면서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와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 등 단체들과 연계하여 임시 정부 반대 입장에 섰다.
중한민중동맹단은 국권 회복을 지향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외국인등록법 시행 시에는 일본인과 구별된 ‘한국인’으로의 등록 운동을 벌였다. 일본의 대미 침략설을 미국에 알렸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원조, 군수품의 대일 수출 반대 등 강연을 통한 외교 선전 활동을 전개하였다.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에는 재미 일본인들의 반미 활동 가능성을 선전하는 등 미국 내 반일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하와이를 거점으로 한 강연과 선전 활동을 통해 우리의 국권이 일본에 의해 침탈되었음을 알리는 외교 선전 활동체로서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