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한족연합위원회

한자 在美韓族聯合委員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미국 하와이주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최초 설립지 미국 하와이주
성격 독립운동단체
정의

1941년 4월 미국 하와이주에서 열린 해외한족대회의 결과로 설립된 미주 한인들의 독립운동 연합 단체.

개설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1941년 4월 20일부터 27일까지 8일 동안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해외한족대회의 결과 성립된 재미 한인 사회의 독립운동 연합 단체이다. 북미 대한인국민회, 동지회,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중한민중동맹단, 대조선독립단, 한국독립당 하와이지부, 의용대 미주 후원회[민족혁명당 미주지부로 바뀜], 대한부인구제회, 대한여자애국단 등 9개 단체의 연합체로 출법하였고, 이후 북미유학생총회 등이 추가 합류하였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본부 조직은 크게 의사부와 집행부로 구분되며, 의사부는 호놀룰루에, 집행부는 로스앤젤레스에 두었다. 초기 의사부 위원은 이원순·안원규·김현구·도진호·김원용·조병요·손승운·전경무·차신호·강상호·임성우·민함나·심영신·유진석·최두욱·정두옥이었고, 집행부 위원은 김호·한시대·김병연·송철·송종익·이경선·송헌주·박경신·김용중·김성낙·유일한·김용성·신두식·김혜란·임병직이었다. 의사부는 이원순·안원규·김원용이 위원장을 역임하였고, 집행부는 김호·한시대가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이 외에 이승만을 외교위원부 책임자로, 한길수를 국방 공작 봉사원으로 임명하여 외교 활동을 맡게 했다.

설립 목적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각급 재미 한인 단체들의 통합을 통해 재미 한인 사회의 역량을 하나로 모으고 민족의 항일 독립운동 지원을 효율적으로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변천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외교위원부 개조를 둘러싼 이승만과의 갈등과 이승만·한길수 간의 분쟁으로 인한 내부 분열로 중한민중동맹단동지회가 탈퇴하면서 통합 정신이 흔들리게 되었고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이후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별도로 워싱턴 외교사무소를 설치한 데 반발하여 민족혁명당 미주지부가 탈퇴하였고 뒤에 합류했던 북미 유학생총회도 탈퇴하면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취지와 역량이 크게 위축되었다. 특히 주미외교위원부 개조와 관련하여 중경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이승만을 지지하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그동안의 임시 정부 지지로부터 반임시 정부 자세로 돌아서기까지 하였다.

해방 이후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단장 한시대, 부단장 김원용, 서기 도진호, 김병연, 재무 송종익·최두욱을 비롯해 김호·전경무·조제언·박금우·안정송·김성낙·안창호·정두옥 등 14명으로 구성된 대표단을 국내로 파견하여 약 8개월간 체류하면서 국가 재건 사업을 전개하였다. 이들 중 김호김원용은 미군정의 입법 의원으로도 활동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재정은 모금을 통해 조달하였으며, 모금된 재정의 2/3는 중경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보내고, 나머지 1/3로 미주에서의 외교 활동을 후원하였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태평양 전쟁 개시 이후 재미 한인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를 위해 한인 신분증 발급을 시작하였다. 1942년 4월 26일 이후 한인국방경위대[일명 맹호군]을 로스앤젤레스에서 조직하여 미주 지역 한인들의 대일 항전 의지를 구체적으로 보여 주었다. 1942년 8월 29일 국치일에는 로스앤젤레스 시청에서 태극기 게양식을 거행하여 한국의 독립 의지를 대외적으로 널리 알렸다.

의의와 평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대표단은 미주 지역 좌우익 한인 사회 전체를 대통합한 의의가 크다. 그러나 이후 내부 갈등 요소를 극복하지 못하여 더 큰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참고문헌
  • 김원용, 『재미 한인 50년사』(혜안, 2004)
  • 고정휴, 「제2차 세계 대전기 재미 한인 사회의 동향과 주미외교위원부의 활동」(『국사관논총』49, 국사편찬위원회, 1993)
  • 김지원, 「캘리포니아 한인 사회의 변화와 특성 연구(1903~1945)」(명지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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