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同志美布代表會 |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행사/행사 |
지역 |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30년 7월 15일~1930년 7월 21일 |
---|
19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에서 면직된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1921년 민찬호 등과 함께 자신이 창립하였던 동지회를 중심으로 재미 한인 사회를 규합하여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만들려고 하였다. 그러나 구미위원부 역시 1925년 임시 정부로부터 폐지 명령을 받아서 그 산하에서 활동하던 동지회를 계속 유지할 명분이 없는 가운데 재정 압박으로 자체 유지도 힘들 정도였다. 이에 동지식산회사를 설립하여 재정적 기반을 안정화하려 하였으나 1929년부터 회사 경영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이러한 현안 타개를 위해 1929년 9월부터 1930년 1월 8일까지 재미 한인 사회를 순방하면서 각지 한인들로부터 재정 지원 확보를 도모하였으나 1929년 10월 경제 대공황의 여파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와이로 복귀한 이승만은 1930년 3월부터 김현구를 비롯한 하와이 교민단의 핵심 인물들과 더불어 한인협회와 대조선독립단의 인물들과 접촉하면서 각급 단체 간 합동을 추진하였다. 1930년 4월 3일 동지회, 독립단, 한인협회의 세 단체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승만은 하와이 한인 사회가 민족 운동을 위해 민중대회를 소집하자는 제안을 하였고, 이에 대해 한인협회는 박상하·김진호, 독립단은 이상호·김윤배, 동지회는 이종관·정인수를 교섭 위원으로 선임하였다.
1930년 6월 8일 한인기독학원에서 개최한 동지회간친회(同志會懇親會)에는 교민단과 독립단 및 중립측 사람들도 포함한 남녀 200여 명이 참석하면서 동지회 중심의 통합 운동이 힘을 받게 되었다. 여기서 이승만은 100만 동지 회원을 확보하기 위한 동지회의 주요 사업의 방향을 제안하였다. 첫째, 『태평양잡지』 확장 및 영문란 개설, 둘째, 원동에 선전부 개설, 셋째, 청년부 별도 설치 및 청년들의 민족성 계발, 넷째, 각 단체와의 합동 추진 및 인물과 민심의 동지회로의 집중 등을 제안하였는데 이 사항들은 동지미포대표회 때 그대로 반영되었다.
동지미포대표회는 1930년 7월 15일부터 21일까지 7일간 호놀룰루에 있는 하와이 교민단총회관과 신흥국어학교에서 연 8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성대히 개최되었다. 하와이 대표 외에 북미 시카고 대표 김원용과 나성 대표 최영기가 참석했다. 동지미포대표회에서는 동지회 헌장을 통과시키고, 위원부와 임시정부 법통관계에 대한 선언문을 발표하였으며, 조직 체계 확정, 3·1절 기념금, 특별 유지금, 연례금 등 재정 규정을 확정, 회기·회표·회가 제정의 중앙부에 위임, 동지회 명부록 제작 배포 등을 결의하였다. 이 대회에서 동지회를 독립운동의 유일한 정치 단체로 선언한 것과, 구미위원부와 임시 정부 사이의 법통 관계를 정리한 것 등은 중요한 성과로 평가된다.
동지회의 조직은 총재 이승만을 중심으로 중앙이사부와 대표로 나누었다. 중앙이사부는 이사장을 포함한 9인과 행정 집행을 위한 5부로 구성했다. 특히 총재의 절대 권한을 강화해 이승만 중심의 동지회가 되도록 만들었다. 새로 조직한 중앙이사부는 이사장으로 하와이 동지회의 이용직, 재무 겸 상무원으로 미주 동지회 대표 김원용을 선임했으며 이사원으로 하와이 동지회 대표 이용직, 교민단 대표 김경준·손덕인·차신호·김광재, 대조선독립단 대표 김윤배, 중립자측 대표 박상하로 선임함으로써 동지회 중앙이사부가 전 미주 한인 사회를 포괄하여 대표하는 최고의 독립운동 기관임을 보여 주었다. 따라서 동지미포대표회는 외형적으로 볼 때 재미 한인들의 많은 관심 속에서 동지회의 대내외 위상을 다진 성공한 대회였다.
동지회는 새로 개정된 헌장에 따라 설립 목적을 조국 광복에 두었고 3·1정신에 근거한 비폭력적 대업 성취, 단체의 지휘에 복종, 경제적 자치 자급 도모 등 3대 정강을 실천 방침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