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인동지회 북미총회

원어 항목명 North America General Meeting of Dongji-Hoi
한자 大韓人同志會北美總會
영문 North America General Meeting of Dongji-Hoi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미국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42년 6월
개칭 시기/일시 1943년 7월~1943년 8월
원어 항목명 North America General Meeting of Dongji-Hoi
성격 독립운동 단체
정의

1942년 6월 하와이 한인들이 미국 본토에서의 대외 활동을 모색하며 설립된 동지회의 통합 단체.

개설

대한인동지회 북미총회(大韓人同志會北美總會)는 1921년에 설립된 하와이 동지회에서 비롯된 단체이다. 하와이 동지회를 비롯해 시카고, 뉴욕, 몬태나, 디트로이트 등지에서 각각 동지회가 조직되었으나, 동지회 간의 서로 조직적인 연락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회원 수도 적게는 20명에서 많게는 50명까지 다양한 상태에서 각 동지회가 독자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다. 1929년 10월에는 이승만이 미주 지역에서 동지들을 결속하여 로스앤젤레스 동지회를 조직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동지회 조직들이 1940년대까지 활동이 미비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하와이 동지회가 활동에 제한을 받게 되면서 미국 본토의 동지회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와이 한인 단체는 미국 본토에서 대외 활동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1942년 6월 시카고에서 개최된 북미동지대표회를 통해서 ‘북미 동지회 총지부’를 설립하기로 하였다. 1945년 하와이 동지회와 함께 대한민주당으로 조직 변경을 시도하기도 했다.

설립 목적

대한인동지회 북미총회는 미주 내 각 지방회 간의 긴밀한 역락망의 필요성과 중요 문제에 대한 신속하고 능률적인 처리, 지리적으로 원거리에 있는 본토와 하와이 간의 소통 문제, 동지회의 발전, 재미한족연합회에 대한 책임을 강화하여 광복 사업에 일조하기 위해서 설립되었다.

변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하와이 동지회가 전시 계엄령에 묶여 대외 활동이 어렵게 되자 그동안 재미한족연합회 집행부 내 국민회와 함께 중심 세력으로 활동하던 동지회는 자체 조직을 강화하게 되었다. 각 지부로 분산되어 효율적인 대외 활동을 할 수 없었던 미국 본토의 동지회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1942년 6월 18~20일까지 시카고에서 뉴욕, 몬태나, 나성, 시카고 등 4개 지역 동지회 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북미동지대표회를 개최했다. 4차에 걸친 회의에서 대표들은 10개항의 의제를 중심으로 토의를 진행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북미 동지회 총지부’라는 통합적인 조직체를 설립한 것이다. 동지회 기관지의 발간도 계획해, 『북미월보』라는 이름으로 처음에는 추진하다가 1942년 9월 15일부터 『북미시보』라는 이름으로 개칭하여 발행되었다.

민중 대회 이후 동지회 내부를 비롯해 북미 지역 한인 사회에 재미한족연합회에 대한 반집행부와 반국민적 정서가 확대되자 동지회의 입지는 오히려 강화되었다. 북미의 동지회는 기존 북미 동지회 총지부를 대한인동지회 북미총회로 개명하고 「대한인동지회 북미총회 장정」을 만드는 등 조직을 확충했다. 정확한 시기는 자료 부족으로 명확하지 않으나 1943년 7~8월경으로 추측된다. 1943년 4월 11일에는 나성지방회가 있는 로스앤젤레스동지회 회관을 매입하여 협회의 활동을 더욱 확장했다.

이렇게 강화된 동지회 북미총회는 1943년 12월 중앙부가 재미한족연합회의 탈퇴를 선언하기 전까지는 연합회의 집행부 소속으로 활동했으나, 이후는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1945년 제1회 동지미포대표회를 개최하여 북미 동지회는 하와이 동지회와 함께 통합하여 대한민주당으로 조직명을 변경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그러나 하와이 동지회 중앙부와 동지회 회원들의 동의를 얻지 못한 데다가, 해방 후 이승만이 정파를 초월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구성하는 바람에 구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동지회 북미총회는 1945년에 남가주지방회·뉴욕지방회·몬태나지방회·북가주지방회·시카고지방회·오레곤지방회·중가주지방회 등 7개 지방회로 확대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942년 9월 15일부터 회보인 『북미시보』를 방행하여 한인 사회의 독립운동에 대한 재정적 지원과 참여를 촉구했다. 1943년 9월에는 『북미시보』의 발행을 뉴욕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이전하고 새로운 주필에 이범녕을 임명했다. 1943년 즈음에는 로스앤젤레스 ‘민중대회’를 개최하여 6개조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내용은 ① 우리 민중은 현 외교위원장인 이승만을 신임하며 절대 옹호함, ② 불법 행동을 감행하는 연합회 집행부를 불신임하므로 그 문제가 해결되는 동안 독립금을 임시 정부와 주미외교부에 직접 상납하기로 함, ③ 주미외교부 책임자를 ‘위협 공박한’ 김호전경무를 성토하며 그들의 중국행을 반대함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대회 개회사가 마친 후 참석자들은 즉석에서 3,000달러를 거두어 의연금으로써 중경 임시 정부와 주미외교위원부에 보내기로 했다.

의의와 평가

대한인동지회 북미총회동지회의 설립에서부터 보여 준 친이승만적 집단의 성격을 그대로 담은 단체였다. 따라서 이승만의 외교적인 활동에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하와이지부가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되었고, 이로써 결성된 대한인동지회 북미총회는 때로는 국민회와 마찰을 일으키기도 하면서 계속해서 이승만의 향후 정치 활동을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행보를 계속했다. 1945년에 열린 제1회 미포대회와 미포대회를 통해서 시도했던 대한민주당으로의 조직 변화 시도 역시 이와 같은 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참고문헌
  • 김원용, 『재미 한인 50년사』(혜안, 2004)
  • 이덕희, 『한인기독교회·한인기독학원·대한인동지회』(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8)
  • 홍선표, 「해방 이전 대한인동지회의 조직과 활동」(『한국독립운동사연구』33,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홍선표, 『자주 독립과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재미 한인의 꿈과 도전』(연세대학교 출판부, 2011)
  • 「북미동지대표회록」(『국민보-태평양 주보』, 1943.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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