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大韓民族統一促兌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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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미국 하와이주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설립 시기/일시 | 1928년 5월 2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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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독립운동 단체 |
1928년 미국 하와이주에서 재미 한인 사회의 통합과 민족 독립을 위해 결성된 단체.
1920년 후반 만주에서 민족유일당운동이 전개되고, 국내에서도 신간회가 결성되는 등 독립운동 전반에 걸쳐 민족통일전선이 형성되고 있었다. 하와이에서 독립운동 진영의 합동을 위한 모임은 1928년 2월 26일 호놀룰루의 한 식당에서 열렸다. 조용하의 초청 형식으로 열린 모임에서 교민단 측 인사들과 독립단 측 인사 등 29명이 참석하였다. 김영기, 김윤배, 김유실, 김유택, 이상호, 이복기, 이원준, 이태성, 이성신, 오계상, 문또라, 민찬호, 박상하, 박인양, 신국겸, 손덕인, 안현경, 안원규, 양유찬, 정인수, 정운서, 조광원, 조병요, 황혜수, 홍한식, 김경준, 정원명 등 하와이 한인 사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참석자로 망라되었다. 이때 모인 각파 인사들이 대한민족통일촉성회를 조직하기로 의결하였다.
대한민족통일촉성회의 설립 목적은 “대한 민족의 통일을 촉성하여 독립운동의 단일 기관을 창설함에 재함”이라고 하여, 최종 목표는 독립운동의 단일 기관을 만드는 데에 있었다. 대한민족통일촉성회를 조직하기 위해 준비회를 만들어 회장에는 조용하, 서기에는 최창덕, 취지서 제정 위원에는 박상하·안현경·이상호 3명을 정하였다. 3월 18일 대한민족통일촉성회 준비회 제2차 회의가 누아누우청년회관에서 개최되었다. 정식으로 준비회가 꾸려지면서 회장에 조용하, 서기에 최창덕, 집행 위원에 김영기·김윤배·김유실·김수택·이상호·이복기·이원순·이태성 등 27명이 선출되었다. 대한민족통일촉성회 준비회에는 하와이 교민단과 대조선독립단의 주요 인사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어 명실공히 통일적 기관이라고 할 수 있었다. 특히 하와이 교민단이나 대조선독립단에 속하지 않은 조용하, 이태성, 오운, 안창호, 문또라, 황혜수, 박상하, 홍한식, 정운서 등 중립적 인사들이 많이 참석하였다. 대한민족통일촉성회 준비회 조직은 서무부, 선전부, 의사부로 구성되었는데, 서무부에는 교민단장 최창덕, 독립단장 이복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선전부에는 전 교민단장 김영기와 전 독립단장 김윤배가 있었으며, 의사부에는 독립단 총무 이상호와 전국민회장 안현경이 있었다. 「한국민족통일촉성선언서」를 대내외에 발표하고 3대 강령을 제정하였다.
하와이 한인 사회에서 통일적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던 중인 1928년 10월 16일 대조선독립단의 영수 박용만이 피살을 당하였다. 박용만 피살 사건은 지금까지 하와이 교민단과 대조선독립단으로 힘의 균형을 이루었던 한인 사회를 한쪽으로 기울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오랫동안 양립해 오던 두 단체의 힘의 균형이 붕괴되면서 오랜만에 마련된 통일적 기관인 대한민족통일촉성회의 활동도 위축되었다. 동지회 쪽으로 무게가 실리면서 대한민족통일촉성회의 활동도 현격하게 기울어졌다. 대한민족통일촉성회는 1928년 5월 21일 개최한 제1차 대회 개최 이후 별다른 활동을 전개하지 못하였다. 1929년 11월 국내에서 광주 학생 운동 소식이 전해졌고, 한인 사회단체 사이에 통일을 이루려는 움직임이 나타나면서 1930년 1월 13일 한인협회(韓人協會)가 조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