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羅城 韓人共同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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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설립 시기/일시 | 1930년 3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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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시기/일시 | 1932년 |
최초 설립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시 |
성격 | 항일 운동 지원 단체 |
1930년 3월 국내 항일 독립운동 후원 및 미국 로스앤젤레스 한인 사회의 상호 부조를 위해 조직한 단체.
나성 한인공동회는 국내 학생들의 항일 운동을 후원하고 선전하는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서 설립되었다.
1929년 11월 발생한 광주 학생 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미주 한인들은 국내 학생들의 항일 운동을 후원할 목적으로 1930년 초부터 뉴욕, 시카고, 디트로이트, 중부 캘리포니아 등 각지에서 한인공동회를 조직하였다. 로스앤젤레스 한인들도 항일 학생 운동 후원에 뜻을 모으고 김종림·송헌주 등 그 구체적 추진을 담당할 위원 7명을 선임하였다. 이들 7명이 중심이 되어 1930년 3월 1일 3·1절 기념행사를 끝낸 뒤 나성 한인공동회를 출범시켰다. 이에 위원장에 김종림, 서기에 곽림대, 재무에 박재형 등을 추대했다. 동시에 “한국 독립운동에 협조하며 나성 한인 사회의 행복을 증진하기로 목적하고 이에 관한 모든 일을 경영하며 실시한다.”라는 내용의 한인공동회 규칙을 제정하였다.
미주 각지의 한인공동회는 항일 운동 후원 및 선전 활동 등 각종 사업에서 공동 보조를 취할 것을 요구했던 뉴욕 한인공동회의 제의에 따라 연합 활동을 모색하였다. 나성 한인공동회도 이에 찬동하였고, 한인공동회는 뉴욕에 중앙 위원회라는 연합 본부 조직을 만들고 허정을 임시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한인공동회는 미주 각 지역 한인들의 독자적, 자발적 연합에 기초한다는 태생적 한계로 인한 내부 갈등 및 재정 문제 등으로 1932년 해체되고 말았다.
광주 학생 운동을 계기로 미주 각 지역 동포들이 국내 학생들의 항일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화되었다는 점, 그리고 한인유학생총회의 영문 잡지 발간을 지원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