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회 북미 지방총회

한자 國民會北美地方總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시  
시대 근대/개항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09년 2월 1일
개칭 시기/일시 1910년 5월 10일
최초 설립지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시
성격 독립운동 단체
설립자 초대 총회장 정재관|부회장 최정익
정의

1909년 2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시에서 설립한 독립운동 단체인 국민회의 미국 지역 총회.

개설

국민회 북미 지방총회는 1909년 2월 1일 미주 한인공립협회와 하와이 한인합성협회의 통합으로 국민회가 출범되면서 설립되었다.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시에 근거지를 두었다.

설립 목적

국민회는 미주 한인 단체의 통합과 전세계의 한인을 통합하려는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국민회의 조직은 전 지역의 국민회를 총괄할 기구인 중앙총회와 각 지역의 조직을 관할할 지방총회로 구성되었다. 따 라서 국민회 북미 지방총회는 국민회 출범의 주축이 된 두 단체 가운데 미주 한인공립협회의 주요 활동 지역을 관할할 목적으로 설립된 것이다.

변천

국민회 북미 지방총회는 1909년 2월 1일 하와이 한인합성협회와 미주 한인공립협회의 통합으로 국민회가 출범하면서 하와이 지방총회와 함께 설립되었다. 국민회 북미 지방총회는 주로 한인공립협회의 회원과 활동 지역을 계승하였다. 이후 국민회가 1910년 5월 10일에 대동보국회와 통합되면서 대한인국민회라는 명칭으로 바뀌었고, 북미 지방총회는 대한인국민회 북미 지방총회로 활동을 지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이를 후원하는 과정에서 상해 임시 정부와 한성 정부의 관계 속에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1920년 7월에 행정 업무를 중단하게 되고, 1921년 3월에 하와이 지방총회가 이탈하여 교민단으로 독립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대한인국민회 북미 지방총회는 1922년 12월 말에 제14차 대의원회를 통해 대한인국민회 헌장을 개정하는 한편, 중앙총회에 관한 제반 규정을 삭제하고 해산하여 대한인국민회 총회로 재정립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국민회 북미 지방총회는 국민회 출범 당시에 중앙총회가 별도로 설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임시로 중앙 업무를 담당하였다. 1909년 2월 10일에 『신한민보』를 발행하였다. 『신한민보』는 한인공립협회에서 발행했던 『공립신보(共立新報)』를 계승한 것이다. 1909년 3월 24일에는 국민회 규칙을 만들어 미주, 하와이, 원동 각 지방회에 배포하여 사용하도록 하였다. 1913년 6월 30일에는 미주 한인의 국제적인 문제에 대하여 일본 영사가 개입하려 하자, 당시 대한인국민회 북미 지방총회의 총회장인 이대위가 미 국무성에 한국인과 일본인을 구분해 줄 것을 공식적으로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 당시 미국 국무장관 브라이언은 1913년 7월 2일 국민회를 한인 기관으로 공식 발표하였다. 이 일은 미국 정부로 하여금 한국인과 일본인을 구분하도록 만들었으며, 대한인국민회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현황

국민회 북미 지방총회는 1911년 샌프란시스코에 중앙총회가 설치되기 전까지 임시로 중앙 행정 업무를 담당하였고, 국민회의 규칙을 만들어 배포하는 것을 통해 중앙총회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북미 지방총회의 초대 총회장은 정재관, 초대 부회장은 최정익이 맡았다. 국민회 북미 지방총회대한인국민회 총회로 재수립되기 전까지 총회장과 부회장을 임명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의의와 평가

국민회 북미 지방총회[대한인국민회 북미 지방총회]는 미국 정부로 하여금 대한인국민회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도록 만들었으며, 이 일을 계기로 미국 내 한인 사이에서 대한인국민회의 위상을 높이는 역할을 하였다.

참고문헌
  • 김원용, 『재미 한인 50년사』(혜안, 2004)
  • 김창범, 『미주 한인 이민 100년사』(코람데오, 2004)
  • 『북미주 한인의 역사』(국사편찬위원회, 2007)
  • 이현주, 「도산과 초기 미주 한인 단체」(『한국독립운동사연구』31,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 장규식, 「1900~1920년대 북미 한인 유학생 사회와 도산 안창호」(『한국근현대사연구』46, 한국근현대사학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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