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 | 역사/근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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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미국 하와이주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미국 하와이 초기 한인 이민 집단의 주요 특징.
초기 하와이 한인 이민 집단의 전반적인 특징들은 대략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초기 하와이 한인 이민 집단은 전통과 민족의식을 강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대다수 초기 하와이 한인 이민자들이 미국 하와이 지역에서 일하게 되면 가난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이주했고, 어느 정도의 목표를 이루면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의지가 강했기 때문이었다. 1903년~1905년 기간의 초기 한인 이민자 7,000여 명 중 약 1,000명만 부인들과 그 자녀들이었을 정도로, 가족들을 고향에 두고 단신으로 이주한 남성 노동자들이 주를 이루었다. 따라서 현지에서도 전통과 민족의식을 강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지에서의 빠른 적응과 도시 이주, 일제의 강탈에 의한 예기치 않은 국권 상실, 사진신부와의 결혼 및 하와이 정착 기반 마련 등으로 영구 이주 비율이 급증하게 되었다. 중국, 일본의 경우와는 대비되는 특징이었다.
둘째, 초기 하와이 한인 이민 집단은 전반적으로 지리적, 사회적 배경이 다양하였다. 초기 하와이 한인 이민자들이 여러 도시 지역의 다양한 직업 종사자들로부터 모집된 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특정 지역의 농부들을 대상으로 집중 모집된 자들이 이주한 일본이나 중국 이민 집단과는 다른 점이었다. 초기 하와이 한인 이민자들은 한국에서 농업에 종사했던 자들이 전체의 1/7에 불과했을 정도로 도시 거주자들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또한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자들이 전체의 2/3정도로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항구 도시 인근에서 이민한 자들이 많아서 전반적으로 이미 서구 문화에 상당히 익숙한 편이었다. 초기 하와이 한인 이주 노동자들의 급속한 도시 이주와 미국 사회에서의 빠른 적응 및 다양한 활동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셋째, 초기 하와이 한인 이민 집단은 개신교회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초기 하와이 한인 이민자들 중 다수가 개신교회의 교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주요 배경은 다음과 같다. 한국에서 활동하던 개신교회 서양인 선교사들이 주로 개항장과 대도시를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하와이 이민 모집이 공식화되면서 미국인 선교사나 개신교회 지도자들이 하와이를 이민을 통해 경제적 안정을 얻을 수 있는 기회의 땅이라고 대상자들을 적극적으로 설득하였다. 당시 인천 용동교회[현 내리감리교회]의 담임 목사인 선교사 조지 허버 존스가 그 대표적 예이다. 그 영향으로 초기 하와이 이민자들 속에 상당수의 개신교회 교인들이 포함되었다. 일부 개신교 목회자들은 하와이 현장으로 동행하여 정착 과정을 돕기도 하였다. 하와이 2차 이민단 통역관으로서 카후쿠(Kahuku) 농장까지 동행하여 현지 교회를 이끌었던 현순(玄栒) 목사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런 배경들을 통해서 초기 하와이 한인 이민 집단은 현지에서도 초기부터 기독교회를 세웠다. 신앙생활을 통해 이국 생활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교민 사회 차원의 친교와 교제의 장소로서 기독교회가 중요한 기반을 이루게 된 것이었다.
넷째, 초기 하와이 한인 이민 집단은 독립심과 애국심이 강하였다. 초기 하와이 한인 이민자들은 무더운 날씨 속에 사탕수수 농장 노동을 하면서도 자치적인 동회를 조직하여 현지의 어려움과 암울한 현실 극복에 힘을 모았다. 일제에 뺏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학교를 세워 자식들을 가르치고, 독립 기금 모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03년 8월 7일 호놀룰루에서 신민회가 조직되어 이주민들을 위한 의식 개발, 지식 전달, 자녀 교육, 공동 이익 증진 등에 앞장섰다. 3·1 운동이 일어난 해인 1919년의 10월에는 피땀 흘려 모은 돈 3만 4034달러 5센트를 모금하여 만주 독립군에게 보냈다. 이후 하와이 국민회는 300만 달러가 넘는 독립운동 자금을 거두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초기 하와이 한인 이민 집단의 이런 전반적인 특징들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나갔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