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 | 역사/근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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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미국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미국 하와이로 이주한 초기 한인 노동자들이 노동 계약 기간 만료 후 미국 본토로 이주한 현상.
20세기 들어서 본격적으로 진행된 미국 서부 지역의 산업화와 그에 따른 인구 증가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였다. 금광 개발과 대륙 횡단 철도 건설에는 많은 육체노동자가 필요했고, 증가한 도시 거주자들을 위한 각종 서비스업 부문의 노동력 수요도 자연스럽게 늘어났다. 한인들의 미국 본토 이주는 대부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들이 재이주한 것이었다. 재이주의 주요인은 미국 본토가 하와이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 수준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로서 1905년 하와이에서 미국 본토의 대북철도회사[The Great Northern]나 북태평양철도회사[Northern Pacific] 등에 일할 노동자를 모집한 경우를 들 수 있다. 당시 하와이 지역의 기존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 일당 70센트보다 훨씬 높은 1.1~1.5달러의 일당이 제시되었다.
1905년~1916년에 하와이에서 미국 본토로 재이주한 한인의 수는 1,059명이었고, 대부분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캘리포니아 각 지역에 정착하였다. 미국 서부로의 한인 재이주는 1907년 하와이 거주 일본인과 한국인의 미국 본토 이주를 금지하는 미국 테오도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의 행정 명령[Executive Order] 589의 발표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후로 노동 이민은 끊어졌지만 한인 2세들의 출생, 친지나 사진신부 초청 등으로 미주 지역 한인 사회의 인구수는 꾸준히 늘어났다. 특히 고국을 떠나 중국이나 유럽을 경유하여 여권 없이 미국으로 들어온 한인들도 많았다. 한국에서는 ‘신도학생(新渡學生)’, 미국에서는 ‘피난학생’이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국권 상실 후인 1910년대에만 해도 이런 망명자들이 1,000여 명이나 되었고, 이와 함께 미주 서부 지역 한인 공동체가 독립운동의 새로운 기반으로서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안창호(安昌鎬)를 회장으로 해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창립되었으며, 1913년에는 로스앤젤레스를 거점으로 청년 단체 흥사단(興士團)이 조직되었다. 1914년에는 대한인국민회가 캘리포니아주 정부로부터 사단 법인 인가를 받았고, 1919년 3·1 운동 후 안창호는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대리직을 맡았고 『독립신문』을 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