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 | 역사/근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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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미국 하와이주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개항기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미국 하와이로 이민한 한인 이민자들의 시기별 특징.
개항기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이어졌던 한인들의 미국 하와이 이민은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1903년 이전 시기이다. 이 시기 한인 이민은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졌고, 이민자 수도 적었다. 19세기 말~1902년의 미국 이민국 자료에 의하면 당시 미국에 들어온 한인 수는 총 168명인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민자들은 주로 유학생, 서재필(徐載弼)·안창호(安昌鎬)와 같은 정치 망명가, 그리고 인삼 장수와 같은 기타 이민자 등으로 구성되었다. 유학생 이민은 1940년까지 총 891명으로 집계되고 있는데, 당시의 유학생들은 시대적인 분위기에 의해서 학업과 항일 운동을 병행하는 과정에서 유학을 하게 된 경우도 많았다.
두 번째 시기는 1903년~1905년 시기이다. 이 시기는 한인 동포들의 공식적인 첫 이민이 시작된 시기였고, 대부분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로 이민하게 된 자들이었다. 1902년 12월에 인천 제물포항에서 출발한 120명의 사탕수수 노동 한인 이민자들은 12월 24일 일본의 나가사키항에 도착해서 신체검사를 받았다. 이 가운데 10여 명이 안구 질환 등 여러 결격 사유로 탈락하고 최종적으로 102명이 최종 목적지인 미국 하와이를 향해 출발하였다. 첫 번째 공식 한인 이민자들인 102명을 태운 이민선은 갤릭호[RMS Gaelic]였고, 1903년 1월 13일에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이후로 1905년 8월 8일의 몽골리아호까지 11개 선박이 56회를 오가며 총 7,291명의 한국인 이민자를 호놀룰루항으로 실어 날랐다. 당시 미국 이민국에서 정리한 한인 이민 동포 승객 명단에서는 6,739명이 확인이 되고, 영어로 이름, 성별, 나이, 결혼 여부, 직업, 문맹 정도 등이 정리되어 있다.
한인 이민 동포 승객 명단은 6,739명 중 세대주 및 부인, 자녀들과 같이 건너 온 가족 787명, 결혼 경험이 있었던 홀아비 1,554명, 결혼했지만 혼자 건너온 자 2,214명 등이 포함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 당시 미국 하와이 이민자들 ‘대부분이 젊은 총각’이었다는 기존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준다. 즉 이민자들 중 젊은 총각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의 32%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사실은, 적어도 당시 대다수 이민자들이 혈혈단신으로 낯선 땅 하와이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한인 이민 노동자들은 큰돈을 벌어서 조국으로 돌아갈 꿈을 가지고 주로 농장주와 3년 계약을 맺었고, 일요일을 제외하고 하루에 10시간씩 매월 26일간을 일하였다. 그러나 1905년에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면서 이역만리에서 꿈이 좌절되어 힘든 노동과 함께 술과 노름에 빠져 방탕한 삶을 살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대한제국 정부도 일제가 한인의 미주 이민을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집단 이민을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세 번째 시기는 1903년~1924년 시기로 소위 ‘사진신부’들이 대거 이민한 시기였다. 특히 1921년~1925년에는 약 800명의 한인 사진신부가 미국 하와이로 이민하였다. 사진신부들은 앞서 도착한 사탕수수 농장 노동 이민자들 중 절대 다수를 차지했던 미혼 남성들과 직접 만나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저 사진 한 장만 보고 결혼 결심을 하여 태평양을 건너온 여성들이었다. 대부분 한일병합 이후의 이민자들로서 하와이 호놀룰루의 일본 영사관에서 일본 여권을 발급받아 이민하였다. 당시 일제는 해외 한인 이민자들의 항일 운동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방법의 하나로 하와이 한인 노동자들이 결혼을 통해 가정을 가지도록 유도하려는 의도를 가졌고, 이와 함께 일제가 한인의 하와이 이민을 일시 재개한 것이었다. 하와이 호놀룰루 일본 영사관에서 여권을 발급받았던 이민자 명단은 일본 도쿄 외무성 외교사료관에 보관되어 있다.
명단에 기록된 이민자들은 초기 이민자들과는 달리 이름 및 기타 관련 자료들이 모두 한자로 정리되어 있어 정확한 출신 내력을 알 수 있다. 명단은 여권 신청자의 이름과 도(道) 단위로 기록된 본적지, 초청인의 이름, 초청인과 피초청인의 관계, 여권 발급일, 비고란 등으로 정리되어 있다. 또한 이 명단을 통해 1910년~1924년 시기에는 새 신부들만이 아니라 먼저 건너 온 남편들의 한국에 남겨진 부인과 자녀, 부모들도 하와이로 오게 된 사실도 알 수 있다.
웨인 패터슨은 초기 한인 이민자들이 다른 아시아계 이민자들과 비교해 몇 가지 점에서 다른 인구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 첫째는 소수였기 때문에 미국 사회에서 고립된 사회 단위를 형성하기 전에 빠르게 미국 사회에 적응해 나갔다는 것이다. 둘째는 대다수의 한인들이 도시 경험을 해본 사람들이었다는 것이고, 셋째는 대부분 비농업 분야의 직업에 종사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사회적 계급 성분이 다양했고, 기독교와 강한 유대 관계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특성들은 하와이의 한인 이민자들이 타 이민자들보다 미국 사회에 더 빠르게 적응하는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이 웨인 패터슨의 견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