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하와이 한글학교

원어 항목명 The Korean Schools at the initial stage of Hawaii's Korean settlers
영문 The Korean Schools at the initial stage of Hawaii's Korean settlers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미국 하와이주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원어 항목명 The Korean Schools at the initial stage of Hawaii's Korean settlers
정의

개항기 및 일제 강점기 초기 미국 하와이 이민 한인 사회가 하와이 지역에 설립한 한글 학교.

개설

이덕희의 연구에 따르면, 1907년부터 1929년까지 초기 하와이 이민 한인 사회는 25개의 한글 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고, 지역별로는 오아후섬에 12개, 하와이섬에 7개, 카우아이섬에 5개, 마우이섬에 1개가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 중 절반 이상이 기독교의 여러 종파들이 세운 한글 학교이며, 종파별로는 감리교가 11개교, 구세군이 1개교, 성공회가 1개교, 기독교회가 1개교를 각각 설립한 것으로 되어 있다.

설립 목적

초기 하와이 한인 이주자들의 주된 이민 이유 가운데 하나는 좋은 교육 여건이었고, 그만큼 교육은 한인 이주자들의 높은 관심사였다. 또한 초기 하와이 한인 이주자들은 모국어를 익히고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절박감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런 절박감을 해소하고자 초기 하와이 이민 사회가 20여 개가 넘는 한글 학교를 건립하게 되었다.

설립 시기

오성삼·여효자의 연구에 따르면, 하와이 이민 초기 주요 한국어 학교의 설립 연월일은 다음과 같다. 한인소학교 1907년 4월 5일, 동명학교 1907년 5월 10일, 동신학교 1907년 8월 25일, 육영학교 1907년 11월 4일, 에와한인소학교 1908년 10월 8일, 신한의숙 1908년 11월 5일, 배영의숙 1909년 11월 15일, 신흥학교 1911년 3월 8일, 신민학교 1911년 4월 7일, 코나한인소학교 1911년 6월 6일, 한응학교 1913년 12월 3일, 한인기독청년학교 1914년 2월 7일, 근명학교 1914년 2월 7일, 성령학교 1914년 4월 1일, 삼일(三·一) 학교 1921년 6월 15일, 신흥국어학교 1923년 7월 1일, 우성학교 1927년 4월 2일, 보영학교 1929년 3월 5일 등이다. 오성삼·여효자의 논의에서는 언급이 되지 않았지만, 하와이 최초의 한인 학교는 한인중앙학원이며, 1906년 한인감리교인들과 감회사 워드만이 주축이 되어 설립되었고, 한인중앙학원은 1918년 8월까지 지속되었다.

주요 사업과 결과

하와이 이민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기독교적 믿음과 더불어 교육 기회의 보장을 중요한 이민 계기로 삼았다. 이는 한글 학교의 설립에 있어서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미국인 선교사의 주도하에 한인 이민자들은 적극적으로 한글 학교 건립에 나섰다. 하와이 최초의 한인 학교인 한인중앙학원 경우, 초대 교장은 워드만 부인이 2대 교장에는 이승만(李承晩)이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한인중앙학원에서 가르치는 교육은 크게 언어 교육과 무예 연습으로 나누어졌는데, 언어는 영어 교육[생존과 자신의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위해]과 국어 교육[모국어에 대한 사랑과 한국인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이 주를 이루었다.

무예 연습은 1910년 일본이 조선을 강제 병합한다는 소식을 접한 이후 구체화되었다. 일제의 조선에 대한 강제 병합은 미주에서 애국동맹단(愛國同盟團)[1910년 7월 3일 설립]과 하와이에서의 대동공진단(大同共進團)[1910년 7월 5일]의 설립에 주된 원인이 되었고, 이러한 무장·외교 노력의 일환으로 하와이에 있었던 한인 학교에서는 무예 연습이 실시되었다. 그 결과 키우아이 골로아 지방에서는 서창순이 군사 교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카우아이 막가윌리 지역에서는 이정근·임경춘이 중심이 되어 무예 연습을 진행시켰다. 와이파후 지역에서는 김택구과 서병용이 중심이 되어 학생들에게 군사 훈련을 가르쳤다. 한인중앙학원의 경우, 최초 졸업자는 1909년에 배출되었고, 졸업한 학생들 중 상당수가 흥사단(興士團),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동지회(同志會) 등에 참여하였으며 초기 미주 이민 사회를 이끌어갔다.

의의와 평가

이주 초기부터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향학열, 2세들에 대한 교육열, 그리고 한국인이라는 정체성 확립과 독립에 대한 간절한 염원은 하와이 지역 한글 학교의 건립과 발전으로 꽃을 피었으며, 이는 후에 미주 한인 독립운동과 미주 한인들의 고학력의 토대가 되었다.

참고문헌
  • 이덕희, 『하와이 이민 100년: 그들은 어떻게 살았나?』(중앙M&B, 2003)
  • 오성삼·여효자, 「미주 한인학교의 운영 실태와 한국 정부의 해외 동포 교유 지원 사업의 발전 방향」(『교육논집』18, 건국대학교 교육연구소, 1994)
  • 윤종문, 「하와이 한인중앙학원의 설립과 운영」(『사학연구』88, 한국사학회, 2007)
  • 「[하와이 이민 다큐멘터리-15] 초기 이민자 자녀 교육」(『미주 중앙일보』, 2011.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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