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Picture brid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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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寫眞新婦 |
영문 | Picture bride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미국 하와이주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원어 항목명 | Picture brid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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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지역 초기 한인 이민 노동자들은 부인과 자녀를 동반한 경우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따라서 미국 하와이 한인 사회는 초기에 남성이 여성보다 절대적으로 많았다. 1910년을 예로 들면 남성은 3,931명, 여성은 602명이었다. 당시 하와이 현지의 많은 남성 이민 노동자들은 신부를 구하기가 어려운 현실이었다. 이에 하와이 정부는 「사진결혼법」을 제정하여 결혼을 위해 입국하는 여성들의 이민을 허용하였다. 이후로 사진 교환에 의한 선을 통해 배우자를 정하고 이민한 젊은 여성들을 ‘사진신부[picture bride]’라고 불렀다.
사진신부의 이민은 대략 1910년부터 시작되어 1911년경부터 본격화하였고, 1924년 미국의회가 「동양인배척법(Oriental Exclusion Act)」을 통과시키면서 공식적으로는 중단되었다. 하와이의 첫 번째 사진신부는 가구공 이내수와 약혼한 최사라로 알려져 있는데, 1910년 12월 6일자 『국민보』에는 민찬호 목사가 이민국으로 가서 이내수의 혼례식을 집례 하였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1924년까지 하와이로 이주한 사진신부 규모가 적게는 600여 명, 많게는 약 1,000명 정도로 추산된다.
사진신부는 부산항에서 가까운 경상도 출신들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대부분 17세~24세의 여성들이었으나 간혹 40세 또는 15세의 특별히 나이가 많거나 적은 여성도 있었다. 사진신부를 신청한 배경에는 주로 빈궁한 현실이나 유교적 속박으로부터 탈피하여 상대적으로 여유 있고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하와이라는 미국 땅에 대한 동경, 그리고 기독교회 선교사를 통한 권유 등이 있었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몰래 신청하는 경우도 있었고, 사진신부들을 알선하는 중매쟁이들의 활동도 왕성하였다.
사진으로만 보는 선이라서 신랑 후보들은 젊고 부유한 인상을 주기 위해 양복을 빌려 입고 얼굴에 분을 바르고 자동차 앞에서 사진을 찍어 보내거나 오래전에 찍은 사진을 보내기도 하였다. 신부 후보들도 중매쟁이의 알선을 받아 예쁜 한복을 차려 입고 일본인 사진사의 도움을 받아 찍은 사진과 함께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양쪽 당사자들이 결혼에 합의하게 되면 호적 등본의 교환과 함께 신랑감은 신부의 여비 약 70달러, 중매쟁이 소개비 약 30달러, 사진값 약 20달러를 포함해 최소한 100달러 이상의 결혼 준비금을 부담하였다. 신랑의 경제 여건이 좋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실제 경비가 400달러를 초과하는 경우도 많았다. 당시에는 큰돈이었으므로 신랑감들이 계를 들어 돈을 모으는 경우가 많았다. 호적 등본이 제출되면 신부는 신랑의 호적에 혼인 신고 되고, 일본 여권을 발급받아 출국 준비를 하였다. 서울에서 비자 신청을 하고 미국 영사관에서 신체검사를 받았으며, 형편에 따라 영어 공부를 한 다음 배를 타고 일본을 경유하여 하와이로 가게 되었다.
나이, 직업, 성격 등 결혼에 필요한 기본 정보가 부족한 상태에서 결정한 배우자를 하와이에 도착해 직접 만나게 되면서 슬픔에 빠지는 신부들도 다수 있었다. 만나기 전에 기대했던 것과 많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던 이주 여성들의 애환을 담은 전언들도 다수 남아 있다. 사진신부를 주인공으로 한 문학 작품들도 나왔는데, 앨런 브렌너트의 『사진신부 진이』가 그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사진신부 제도는 단신으로 하와이로 이주한 한인 남성 이민 노동자들이 본국 여인과 가정을 이룰 수 있게 하여, 한인 단체, 한인 교회, 한인 학교 등을 포함하는 미주 지역 한인 사회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사진신부 제도로부터 만들어지게 된 영남부인회와 같은 사진신부 조직은 각종 모임을 개최하면서 민족 운동을 전개하는 등 한국의 독립운동에도 일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