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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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캐나다 |
시대 | 현대/현대 |
재캐나다 한인의 정치 활동과 정치 단체 개관.
한인 사회가 확대되면서 1980년대 후반부터 캐나다 정치계 진출에 관심이 고조되었다. 이에 1986년 한인 이민사상 최초로 한인자유당연합회[초대 회장 김병권]가 창설되었다. ‘캐나다 한인자유당연합회’는 조용구 북부 토론토 한인번영회장을 비롯하여 조성용, 정재열, 정기철 등을 창립 준비 위원으로 하여 창설되었다. 이민 반세기를 맞은 캐나다 한인 사회에서도 이제 연방 및 주 정치인이 배출될 때가 되었기에 한인들의 의사를 주류 정계에 전달하는 한편 1.5~2세 한인 정치인을 배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캐나다 한인자유당연합회는 온타리오주의 자유당 소속 한국인 지부로서 캐나다 정치사상 소수 민족으로서는 최초로 창설된 정치 기구였다. 캐나다 한인자유당연합회를 모델로 중국, 흑인, 남아시아, 인도, 필리핀 등의 소수 민족도 유사한 단체를 만들었다. 한국인을 포함한 위의 소수 민족들은 일명 온타리오 소수민족자유당총연맹[Federation of Ontario Liberal Satelite][회장 김병권]을 창설하여 소수 민족의 정치 참여를 꾀하였다. 하지만 한동안 활동이 시들해지자 2008년 3월 재창립하여 전열을 가다듬으면서 토론토 시 의원 후보로 나섰던 조성용이 회장을 맡고 정재열 등이 참여하고 있다.
캐나다 한인자유당연합회는 2세들의 정치 참여의 문을 열어 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헌장상 운영 위원회의 구성은 적어도 1.5세나 2세가 절반이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회장이 1세 출신일 경우 부회장은 2세이어야 하며 반대로 2세가 회장이면 부회장은 1세이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현재 약 350 여 명의 회원 가운데 70%는 1.5세 내지 2세로 구성되어 있다.
1986년 7월에는 캐나다 제3 당인 신민당 한인자문위원회[초대 회장 이경복]가 창설되어 소수 민족들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제도적 기구가 탄생되었다. 이어 한인보수당 후원회도 결성되어 캐나다 주요 정당들의 후원 기구들이 모두 발족되었으며 2세들이 정계에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했다. 이에 신민당 공천을 받아 조성준이 1991년 토론토 시 의원에 당선됨으로써 유일하게 캐나다 정계에 진출했고 2000년 중반 이후 홍건식 회장 등을 주축으로 비교적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런 노력의 결실로 토론토 교육청에서 공직 생활을 하고 있던 조성준이 연방 신민당으로부터 스카보로-루즈리버 선거구의 후보로 공천을 받아 1988년 11월에 치러지는 연방 총선에 출마하면서 정계의 문을 두드렸다. 조성준의 당선을 위해 온타리오주의 신민당한인자문위원회 등이 중심이 되어서 모금 운동을 전개했지만 낙선되었다. 이후 1991년 11월 토론토 시 의원에 당선되어 한인 사회 최초의 시 의원이 되었다. 조성준은 1994년 재선, 1997년 3선에 당선되면서 1997년 4월 자유당 후보로 공천을 받아 연방 총선에 도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조성준은 2014년 10월 토론토시 선거에서 스카보로-루즈리버 지역구에서 당선되어 8선의 위업을 달성했다. 조성준 시 의원은 글로벌 유스리더스(Global Youth Leaders)를 창립하여 한인 2세들을 차세대 글로벌리더로 육성하는 사업을 추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 정계 진출을 꿈꾸는 한인에게 훌륭한 모델이 되고 있다.
브램튼과 오크빌에 거주한 이영칠 또한 1991년 11월 시 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진출하고 1994년 재선에 성공한 뒤 그림스비(Grimsby) 시장에 도전했지만 낙선한 후 정계를 은퇴하였다. 이후 2010년 10월에 치러진 온타리오 주 지자체 선거에는 캐나다 한인 사회 역사상 처음으로 4명이나 시 의원 후보로 출마하였다. 조성준 의원, 조성용[토론토], 강철중[나이아가라], 김후정[해밀턴] 가운데 조성준 의원을 제외하고 모두 낙선하였다. 하지만 한인들의 활발한 정치 활동은 주류 정치계 인사들과 두터운 인맥을 쌓아 한인 사회의 목소리를 높이고 또 다른 한인들의 정치 참여에 활력을 넣는 계기가 되었다.
한인 최초로 주의원에 도전한 인물은 고상언[데이비드]였다. 고상언은 자동차 보험료 인하, 환경 보호, 진정한 남녀 평등, 노인 복지 향상과 복합 문화 향상 등을 내걸고 온타리오 주의원 후보에 출마했지만 비효율적인 인력 활용과 선거 자금의 부족 등으로 결국 낙선하였다.
한편 행정 분야에서는 홍일현[폴]은 존 베어드 연방 외무 장관의 정책 보좌관으로 활동하며 오타와에서 발행되는 주간지 『엠버시(Embassy)』가 2012년 3월 28일자 특집으로 소개한 ‘캐나다 외교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80인’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베어드 외무를 보좌하며 아시아 지역을 상대로 한 정책을 전담하고 있으며, 한인 사회와 연방 정부를 연결하는 교두보의 역할을 하고 있고 북한 인권 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1999년 2월 인구 18,000명의 소도시이며 다이아몬드광 개발과 오로라 관광으로 유명한 노스웨스트준주[Northwest Territories]에서 샌디 리[이승신]가 전체 투표자의 47%의 지지를 얻어 주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옐로우 나이프 지역에서 20년 만에 처음으로 의회에 진출한 여성 후보이기도 했던 샌디 리는 4년 뒤 실시된 2003년 선거에서는 투표권자의 82% 득표라는 압도적 지지로 재선에 성공했다. 샌디 리 의원은 정계에 진출하기까지 변호사로서 캐나다 맹인회, 노스웨스트준주 장애인보호위원회 등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소수 민족의 역량을 키웠으며 더불어 사는 복합 문화의 활성화를 위해 노스웨스트준주 복합문화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2009년에는 캐나다 연방 정부 사상 최초로 한국계 상원 의원도 탄생되었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BC]주 출신의 연아 마틴 의원[캐나다 보수당 소속]은 평범한 교사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상원 의원이 된 지 5년 만인 2013년 원내 수속 부대표 자리에 올라 또 한번 정계를 놀라게 했다. 한국계를 넘어 동양인이 집권당의 수석 부대표가 된 것은 캐나다 의회 역사상 처음이었다. 캐나다 상원 의원은 지명직으로 사회에 기여한 저명 인사를 총리가 추천하고 총독이 재가하는 형식으로 뽑으며 정년은 75세까지 보장된다. 연아 마틴 상원 의원은 한국전 참전 용사의 날 지정과 한-캐 FTA 체결에 힘을 보탠 것이 가장 큰 성과였다고 강조하였다.
2013년에는 캐나다 서부 지역 한인 사회에서 사상 처음으로 남녀 주의원 2명이 동시에 탄생하기도 했다. 5월 14일 치러진 브리티시컬럼비아주 총선에서 스티브 김[김형동] 브리티시컬럼비아 자유당 후보와 제인 신[신재경] 신민주당[NDP] 후보가 각각 코퀴틀람-메이라드빌, 버너비-로히드 선거구에서 당선되었다.
캐나다의 한인 이민은 양국이 공식 수교한 1963년 이후 꾸준히 증가하여 2015년 현재 224,054명에 이르고 있다. 한인 사회의 규모가 확대되면서 1980년대 후반부터 캐나다 정치계 진출에 관심이 고조되었다. 이는 한인 사회의 규모 확장으로 위상이 높아지긴 했지만 정계에 진출한 한인들이 없다 보니 다른 소수 민족보다 한인의 목소리를 높일 수 없는 한계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이런 정치적 요구에 맞추어 한인자유당연합회, 신민당자문위원회 및 보수당후원회가 설립되고 시 의원, 주 의원 및 연방 의원이 배출되어 한인 사회 목소리를 높이는 계기를 마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