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적십자사 점거와 헌혈 압박 사건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시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4년 5월 24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4년 5월 26일
정의

1980년 5월 24일부터 5월 26일까지 벌어졌던 재미 한인의 미국 적십자사 로스앤젤레스지부 점거 활동과 헌혈 압박 사건.

개설

헌혈 압박[blood push] 사건이란 1980년 5월 대한민국 광주에서 시민들이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을 때,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200여 명의 교민들이 미국 적십자사 로스앤젤레스지부 건물을 점거하고 5월 24일부터 26일까지 만 72시간 동안 ‘헌혈된 피를 광주로 보낼 것’을 요구하면서 벌인 사건이다. 교민들은 국제적십자사를 통해 헌혈된 피를 한국 정부가 접수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전두환 계엄군에게 유혈 사태를 인정하게 만들고 이와 동시에 미국 정부에게 유혈 진압을 막도록 촉구하는 청원 캠페인을 전개하여 미국 정부의 개입을 이끌어 내고자 하였다. 이 글은 헌혈 압박 사건의 주요 참여자 중 한 사람인 양필승의 논문에 토대를 두고 작성되었다.

1980년 5월 대한민국 ‘나성구’와 재미 한인 사회

1980년대에 올림픽가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에서는 ‘대한민국 나성구(羅城區)’[나성(羅城)로스앤젤레스를 한자 발음으로 음차하여 표기한 별칭]라는 별칭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매우 한국적인 분위기가 지배하였다. 당시 로스앤젤레스 한인 사회는 본국의 총영사관에 완전히 통제당하고 있는 상태에 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 한인 이민의 역사가 1970년대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진행되었고 한인 사회가 당시 한창 번창하고 있던 한국 기업과 연관된 경제 활동에 종사하는 교포 기업가가 주축을 이루고 있었던 것에서 기인한다. 자연히 한국 정부를 대표하는 총영사관이 교민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었다.

본국의 정부도 최대의 재미 한인 밀접 지역인 로스앤젤레스에 커다란 관심을 갖고 영사관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무엇보다 유신 통치 후반부에 해외 반정부 활동이 활발해지자, 한국 정부는 그러한 분위기가 미국 동부에서 서부까지 확대되는 것을 방지하는 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리하여 영사관의 통제 활동은 매우 적극적이었고 영사관의 대교민 활동은 중앙정보부와 연관 속에서 이루어졌다. 영사관의 통제를 받는 한인 사회는 그다지 결속력이 좋지 못하였다. 자치 기구인 한인회는 교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끌어내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하였다. 한인회 회장의 선출에 교민들의 참여는 미미했고 몇몇 명망가나 사업가에 의해 독점되었다. 이러한 한인회는 친정부적 성격을 띠었고, 그것은 1980년 5·18 항쟁이 일어났을 때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1980년 5월 23일 소집된 미주 한인회 총연합회의 긴급이사회가 발표한 다음과 같은 성명은 한인회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격동하는 현 한국의 사태를 주시하면서, 정치인, 군인, 학생, 일반 시민들은 각자의 본분을 명심, 본연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 현 한국의 국민들과 위정자들은 혼란으로 야기될 수 있는 공산 세력의 침투를 경계하고 외부의 세력들은 현 사태를 왜곡하지 말 것을 촉구한다.”[『중앙일보』, 미주판, 1980. 5. 28]

그러나 1970년대를 거치면서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반독재 운동이 열기를 더해 가고 있었다. 로스앤젤레스 한인 사회에서도 반정부 활동의 싹이 뿌려지고 있었다. 이북 출신의 목사들을 중심으로 통일 문제에 관심을 가진 집단이 생겨났다. 다른 한쪽은 북한 정권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면서 주 투쟁 대상을 박정희 정권에 맞춘 집단이 존재하였다. 그 다음으로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던 청년 학생들을 조직화한 미주 한국민주학생총연합회[Korean Student Association for Democracy, KSAD]가 형성되었다. 이들 집단은 서로 간의 결속력이 미약하였으나, 1980년 미국 적십자사 로스앤젤레스지부 점거 사건을 계기로 더욱 강한 결속력을 보이게 되었다. 이를 통해 영사관과 중앙정보부의 통제로부터 한결 자유로운 위치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스톱 킬링(Stop Killing)”을 위한 사전 준비

1979년 말 부마 항쟁과 곧 이은 박정희의 죽음 그리고 1980년 서울의 봄을 목격한 로스앤젤레스 지역 대학생들은 기존의 반정부 인사들과 연대하여 집단행동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교회에서 집회가 열리고, 교수들과 지식인들이 탄원서에 서명을 하여 미 의회와 백악관에 탄원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한인 타운 거리에서는 시위가 빈번히 일어났다. 그러던 중 광주에서 시민들의 항쟁이 시작되자 로스앤젤레스 한인 사회는 크게 술렁거리기 시작하였다. 몇 차례 시위가 더 이어졌다. 이때 기존의 시위와 성명으로 그치는 운동 방식에 한계를 느끼는 몇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더욱 충격적이고 강력한 방법을 모색해 “광주 사람들을 사지에서 구하자.”라는 생각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생각이 구체화된 것은 KSAD 중심의 대학생들이 『신한민보』 사무실에 모여 24일 아드모어 공원에서 범시민궐기대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준비 활동에 들어갔을 때였다. 미국 여론에 부담을 줄 수 있는 과격한 행동을 피하면서 미국적인 방식을 모색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이때 적십자사 혈액원에서 자원 봉사를 한 경험이 있던 양현승이 헌혈을 이용한 이른바 ‘헌혈 압박’을 제안하였다. ‘헌혈 압박’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피를 광주로 보내겠다는 요구를 제기함으로써, 첫째, 광주에서의 집단 학살이 사실임을 한국 정부가 인정하게 만들고, 둘째, 헌혈된 피를 한국에 공수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미국 적십자와 미국 정부의 개입을 이끌며, 마지막으로, 미국 시민의 권리인 청원권을 통해,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만들어 종국에는 죽음으로부터 광주 시민을 구하자는 생각이었다. 헌혈 압박은 단순히 광주 사람의 입장을 대변하거나 고통을 분담하는 차원이 아닌, 그야말로 실제적인 “스톱 킬링(Stop Killing)”의 방법으로 모색되었다.

곧이어 이러한 헌혈 압박 전술은 미국 적십자사 로스앤젤레스지부의 점거 및 농성에 대한 사고로 발전되었다. 단순히 헌혈만 해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힘들고, 점거와 농성을 통해 헌혈된 피를 광주에 보내 달라고 강력히 요구하는 것이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위 방법을 성공적으로 실행하기 위해서는 미리 점거 대상인 미국 적십자사 로스앤젤레스지부와 사전 조율을 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신한민보』 사무실에 차려진 궐기대회준비위원회는 양현승에게 사전 조율을 요청하였다. 양현승은 자신과 친분이 있던 로스앤젤레스 혈액원 대표인 노먼 키어와 접촉하여 도움을 약속받았다. 그러자 궐기대회준비위원회는 곧바로 광주에 헌혈한 피를 보내고자 결의하였고 전단지를 만들어 로스앤젤레스 인근에 뿌렸다. 궐기대회준비위원회는 아드모어 공원에서 시민궐기대회를 마친 후 곧바로 시위대가 혈액원이 입주해 있는 미국 적십자사 로스앤젤레스지부 쪽으로 행진하는 시위 코스를 결정하였다. 마침 아드모어 공원에서 미국 적십자사 로스앤젤레스지부로 이르는 거리는 한인 타운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시위의 효과를 극대화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1980년 5월 24일 아드모어공원궐기대회

약 300여 명의 교민들이 올림픽가의 아드모어 공원에 모여 광주 시민과의 연대를 과시하였다. 이들은 “현재 조국이 처한 비상시국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며 “조국 사회의 조속한 민주 정부 수립을 촉구하며 조국의 모든 민주화 운동을 전폭 지지하고 전 교포의 궐기를 호소한다.”라는 결의문을 낭독하였다. 남부 캘리포니아 총대학생회가 주최하고 KSAD가 후원하는 형태로 진행된 궐기대회에서는 비상계엄을 즉시 해제할 것, 군은 본연의 자세로 돌아갈 것 그리고 민주정부를 조속히 수립하여 언론과 학원의 자유를 보장하고 유신 잔재를 청산할 것을 요구하였다. 시위대는 이러한 요구 사항을 담은 결의문을 총영사관에 전달하였다. 시위의 규모가 종전보다 커졌지만 총영사관과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적극적으로 시위에 개입해 들어오지 않았는데, 그것은 시위가 미칠 파장이 재미 한인 사회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정치적 과도기라는 상황적 특수성으로 인해 영사관과 중앙정보부 요원들 사이에서도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1980년 5월 24일 헌혈 압박과 미국 적십자사 로스앤젤레스지부 점거 및 농성

궐기대회를 마친 200여 명의 시위대는 미국 적십자사 로스앤젤레스지부 안에 있는 혈액원으로 향하였다. 구호를 외치며 적십자사 건물로 들어선 시위대는 헌혈을 위한 신청서 작성과 수속을 질서정연하게 진행하였다. 전단지 형태로 배포된 ‘헌혈 호소문’에 지시된 대로 헌혈 대상자 항목 중 ‘환자’ 명에는 ‘한국인’, ‘병원과 위치’에는 ‘한국, 광주’를 각각 기입하였다. 그리고 소속 단체명에는 ‘한인 사회[Korean Community]’라고 적어 넣었다.

헌혈이 한창 진행 중일 때 대학생이었던 양필승[양현승의 동생]이 단식을 선언하였다. 양필승은 “우리의 피가 광주에 전달되기 전까지 여기를 떠날 수 없다.”라고 소리치면서 농성을 시작하였다. 이에 일제히 교민들이 환호와 박수로 호응하였다. 적십자사 측에서 즉각 경찰에 개입을 요청하였다. 이후 경찰, 적십자사 그리고 한인들 사이에 숨 가쁜 대화가 오고갔다. 미국 적십자사 로스앤젤레스지부 측은 워싱턴의 미국 적십자사 본부를 통해 제네바의 국제적십자사와 접촉하여 한국적십자사가 헌혈된 피를 접수할 것인지 여부를 타진하기로 결정하는 한편, 그동안 한인의 농성에 적극 협조하기로 결정하였다. 워싱턴에 있는 미국 적십자사 본사는 로스앤젤레스지사의 연락을 받고 제네바의 국제적십자사 위원회를 통해 한국 적십자에게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냈다.

“긴급 사태. 미국 적십자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지부는 현재 KSAD 소속 100여 명의 학생들에 의해 점거 중이며, 그들은 한국 적십자사를 통해 광주의 희생자들에게 그들의 헌혈을 보내줄 것을 미국 적십자사에게 요구하며 농성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적십자사는 미국 적십자사에게 아직까지 피 또는 혈액 제품에 대한 요청이 없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밝혔습니다. 따라서 한국 적십자사는 관련 문서가 필요한지 여부 또는 한국에서의 혈액 공급이 현재의 상황으로 볼 때, 충분한지 여부 등을 가장 신속하게 알려 주길 바랍니다. 그 같은 점이 분명해질 때까지 한국 학생들은 농성을 계속한다고 주장하니, 가능한 빨리 응답을 주길 요청하는 바입니다. 미국 적십자사는 100명 분 또는 그 이상의 혈액을 필요하다면 제공할 수 있습니다. 귀 측의 입장을 이해하지만 가능한 빨리 답신을 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애당초 민주대행진을 주도하였던 대학생들은 점거까지 막연하나마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방안을 갖고 있지 않았다. 특히 미국 적십자사와 어떻게 원만하게 관계를 이끌어나갈 것인가, 어떠한 전략으로 미국 언론을 끌어들일 것인가 나아가 재미 한인 사회와는 어떠한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학생들 수준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적십자사라는 미국 기관의 점거에 성공함으로써 학생들과 재야 인사들 사이에는 나름 강한 결속력이 형성되었다. “아마도 지금 현재 지구상 어느 곳에서도 광주의 시민과 함께 고통을 나누며, 그들의 운명을 보호해 줄 한국인은 자신들밖에 없다.”라는 의식이 농성장의 분위기를 이끌었다.

첫날 오후 4시까지 98명의 한인이 헌혈을 마쳤다. 많은 교민들, 특히 체중이 모자란 많은 한인 여학생들은 건강상의 문제로 헌혈을 하지 못하였다. 이날 저녁부터 교민 라디오 방송인 라디오 코리아를 통해 적십자사 점거 소식을 들은 많은 교민들이 헌혈을 위해 적십자사를 방문하였다. 점거 농성이 벌어진 첫날 24시간 뉴스만 방송하는 라디오 방송국이 영어권 방송으로는 처음으로 한인들의 ‘헌혈 압박’과 미국 적십자사 로스앤젤레스지부 혈액원 점거 사실을 보도하였다. 곧 이어 미국 3대 텔레비전 방송사인 CBS, NBC, ABC 등 주요 방송의 기자와 카메라맨들이 달려왔다. 이와 같이 미국 언론에서 상세히 보도하였지만 한국에서는 완전히 차단되어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미주 한인 언론들은 점거 농성 현장을 취재하였지만 보도를 하지 않았다. 취재하고도 외신을 인용해서 단신으로 취급하였고 『미주 동아일보』만 유일하게 이 내용을 상세히 보도하였다.

미국의 주요 언론들이 보도를 내보내기 시작하자 교민들의 적십자사 내방이 끊이지 않고 지속되었다. 그들은 식료품과 음료수는 물론 현금도 내놓았다. 적십자사가 제공한 침구로 50여 명의 대학생과 교민들이 농성 첫날밤을 보냈다. 농성장의 밤은 깊어갔다. “우리야말로 광주의 동포를 살릴 수 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사람들이다!” 매일 텔레비전에서만 보아오던 언론사들이 자신들의 눈앞에서 자신들의 농성 모습을 담아 가는 모습을 보면서 농성 참가자들은 앞으로의 행동에 대한 큰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전체 3일간의 농성 기간 중 농성장에 상주한 사람은 적게는 50여 명에서 많게는 70여 명이었지만, 농성에 참여한 총인원은 400명에 이르렀다.

1980년 5월 25일 농성 둘째 날-농성의 조직화와 청원 운동

다음날 농성자들은 미국 적십자사와 국제적십자사를 중간에 두고 헌혈된 피의 접수 여부를 이슈로 한국 정부와 대한 적십자사를 압박하였다. 그러자 미국 적십자사 로스앤젤레스지부는 대변인 랄프 라이트를 통해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언론에 배포하였다.

“1980년 5월 24일 토요일, LA 한국계 미국인으로 구성된 150여명의 데모대가 적십자사 지역 헌혈센터에 왔다. 이 중 45명가량이 대한민국에서 현재 진행 중인 시민 항쟁의 희생자들에 대한 연대와 동정의 표현으로 헌혈했다. (……) 미국 적십자사 로스앤젤레스지사는 우리와 이웃한 한인 사회의 시위대가 보여준 순수성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 시위대의 요청에 응하기 위해, 미국 적십자사 본부를 통해 요청 전문이 스위스 제네바의 국제적십자사 위원회와 적십자연맹에 보내졌으며, 남한 당국과 접촉하여 현재 피가 필요한지 여부를 확인하고자 시도했다. 또한 미국 적십자사 총재 조지 엘시의 긴급요청을 친서의 형태로 대한적십자사 이호 총재에게 보냈다. 현재로서는 그러한 전문들이 한국 측에 의해 접수됐는지 여부를 알 수 없다.”

이날 미국의 다른 시민 단체들도 호응하여 직접 농성장을 방문하고 격려하였다. 이들 미국인들은 성명서를 발표하거나 연대 투쟁을 위한 구체적 방안을 한인 농성자들과 함께 모색하였다. 농성은 한층 조직화되었다. 학생 조직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광주시민학생구출위원회’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외부에서 선전 활동을 벌이기 위해 한국인들이 자주 찾는 식품점 등에 농성대원들을 파견하였다. 농성장에서는 「우리 승리하리라」라는 노래가 울려 퍼졌고, 적십자사 건물 앞에서는 피켓을 든 시위대가 구호를 외쳤다. 집단 청원이라는 새로운 투쟁 방법이 등장하였다. 집단 청원은 대단히 미국적인 방법이면서, 한국 군부의 정치적 운명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나아가 미국 정부에 대해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실질적 수단이라고 농성 지휘부는 판단하였다.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 부국무 및 지역 상원 의원과 하원 의원에게 직접 전화를 하거나 전보를 보내거나 아니면 다른 미국인들에게 백악관이나 부국무으로 전화나 전보를 보내도록 당부하는 청원 운동을 펼쳤다. 농성장에서는 적십자사의 허락 하에 적십자사의 전화로 전화 걸기와 전보 보내기가 시작되었다. 이와 동시에 백악관과 부국무의 전화번호 및 주소가 기재된 유인물을 농성장 방문객과 한인 타운에 배포하였다. 청원서 작성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제시되었다. “광주 학살, 인도주의의 이름 아래 한국의 학생들은 긴급한 도움이 필요하다!” “대통령께, 당신의 영향력을 행사하여 한국군이 광주의 죄 없는 사람들을 학살하는 것을 중단시켜 주십시오!” 동시에 당시 지미 카터 대통령에게 농성자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전문이 보내졌다.

“우리는 양식 있는 한국계 미국 시민으로서 전두환 중장이 이끄는 한국 정부가 저지르는 군부의 만행에 대해 항의하는 바입니다. (……) 대통령 각하! 우리는 당신이 인권[HUMAN RIGHT]을 가장 앞장서 주장해 온 인물로 믿기 때문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사람들로서 우리는 당신이 한국에 민주적인 정부를 수립하여 한국인의 인권이 보장되도록 노력해 줄 것을 호소합니다. (……) 불행히도 한미연합사령부가 또 다른 독재 정권을 모색하는 한국의 계엄 당국에게 부분적인 통제권을 이양시키는 것을 미국 정부가 동의하였다는 나쁜 소식을 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한 진실을 매우 간절히 알고 싶습니다. 또한 한국인의 인권과 생명을 대통령께서 적극적으로 보호해 주시길 우리는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최악의 사태에 처한 한국에 대해 적절한 대응과 도움을 주도록 대통령의 선처를 바랍니다.” 훗날 쟁점화된 5·18 사태에 대한 미국의 개입과 그 책임에 대해 로스앤젤레스 한인들은 이미 당시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후에는 “우리의 피를 한국의 광주로 보내주십시오!”라는 영문 구호와 “광주 시민에게 헌혈을!”이란 한국어 구호를 배경으로 대규모 기자회견이 열렸다. 전날보다 훨씬 더 활발한 취재 경쟁이 벌어졌다. 미국의 3대 텔레비전 방송은 물론 뉴욕타임즈나 엘에이 타임즈 등 주요 신문 기자들이 거의 빠짐없이 참석하였다. 농성자들을 대표하여 김상일, 국영길, 노길남, 장태한[Edward Chang] 등이 미국의 인권 단체 대표들과 함께 적십자사 농성장에서 미국 언론 기관을 상대로 질의문답을 진행하였다. 미국 언론이 한인의 헌혈 압박과 농성을 바라보는 시각은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실제로 미국 적십자사 로스앤젤레스지부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는 한국계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피가 광주로 전달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지만, 피를 나눈다는 인도주의적 명분을 내세워 한국의 군사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인간의 피는 단지 35일밖에 보관할 수 없고 피의 수송은 특별한 준비 과정과 냉동을 통해 24시간 내에 완료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헌혈과 수혈은 시간을 다투는 문제이다. 그리하여 헌혈 압박은 명분상으로나 현실적으로도 아주 효과적인 전술로서 한국 정부와 신경전을 벌이는 고도의 정치적 전략이다.

밤이 되자 새로운 전략이 기획되었다. 한국에 전화를 걸어 광주의 진상과 함께 로스앤젤레스에서의 점거 상황을 알리는 선전 활동이 바로 그것이다. 적십자사의 양해를 통해 서울과 광주의 재야 인사들에게 통화를 시도하였다. 광주는 이미 22일부터 외부와의 전화 통화가 단절되었기 때문에, 광주와의 통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울 지역은 가능했는데, 동교동의 김대중 자택에서는 이희호가 전화를 받았으나, 한 마디 답변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통화가 성사된 한 원로 인권 목사는 통화 중 계속 울먹이며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며 태평양 건너의 투쟁에 대해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일부 농성자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참석하였기 때문에, 아이들의 칭얼거리는 소리도 간혹 들렸다. 5월 25일 농성 둘째 날의 밤도 이렇게 깊어 갔다.

1980년 5월 26일 농성 셋째 날-계엄군의 광주 진입 소식과 농성의 해산

농성 셋째 날인 1980년 5월 26일 오전 5시경 대한 적십자사 총재로부터 미국 적십자사 총재 앞으로 회신 전문이 도착하였다. 이를 로스앤젤레스지부 대표인 키어가 농성 대표에게 전달하였다. “현재의 상황에서 피 공급은 광주 지역의 수요량에 비해 적절합니다. 저는 한국 적십자사가 광주의 모든 혈액 소요량을 공급할 수 있음을 확실히 밝혀 드립니다. 귀하의 관심에 감사를 표합니다. 이호.” 그러나 이호 총재의 전문은 광주 지역에 피와 음식이 부족하다고 보도한 UPI와 AP통신의 기사 내용과는 배치되는 내용이었다.

날이 밝자 농성장의 분위기는 급속히 냉각되었다. 미 언론을 통해 광주의 전라남도 도청이 군부에 함락됐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한국에서는 언론 통제 때문에 일반인들은 광주의 상황을 제대로 알 수 없었지만, 실시간으로 광주 소식을 전달해 주는 미국 언론 덕분에 재미 한인들은 한국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이후 오후부터 저녁까지 농성 대열 내부에서는 향후 진로문제를 둘러싼 격론이 벌어졌다. 여러 갈래의 입장이 개진되었다. 이미 광주가 진압되었으므로 애당초 목표인 계엄군의 진입 방지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 따라서 원래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마당에 더 이상 농성을 지속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 광주의 항쟁이 비극적으로 끝났기 때문에, 오히려 이제부터 항쟁 정신을 계승하여 농성을 강화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라는 강경한 입장도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강경한 명분론은 이미 농성장의 동력이 약화되었고 적십자사의 태도 변화도 감지되는 만큼 교민들의 결속력을 그대로 유지시키는 것이 가능하겠느냐는 현실적인 우려에 직면하였다.

실제로 미국 적십자사 로스앤젤레스지부는 한국의 적십자사가 공식적으로 헌혈된 피를 거부하는 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는 만큼 점거 농성을 더 이상 허용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의사를 밝혀 왔다. 또한 26일로 연휴가 끝나면서 학생들 사이에서는 학업 걱정이 커지고 있었다. 이때가 바로 기말 고사가 시작되는 시기였으며, 상당수의 학생은 자신의 생활비와 학비를 직접 벌어야 하는 처지에 있었다. 일반 교민 역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양현승은 혼자서 단식을 지속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하였지만 현실적으로 이를 조직적으로 뒷받침할 역량이 전혀 없었다. 실제로 한인들은 집은 물론 직장이나 학교마저도 분산되어 있었고 한인 타운이라는 것은 주말에나 구심점 역할을 수행하는 현실에서 한인들이 집단행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저녁부터 분위기는 완전히 해산 쪽으로 기울었다. 약 50명이 안 되는 사람들이 그날 밤 농성장을 지켰다. 그리고 마침내 27일 아침이 밝아오자 농성자들은 해산하였다.

헌혈 압박과 미국 적십자사 로스앤젤레스지부 점거 농성 사건에 대한 평가

직접 점거 및 농성의 대상이 되었던 미국 적십자사 로스앤젤레스지부 측은 재미 한인의 점거 농성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학생들의 농성으로 직원들의 귀중한 연휴를 빼앗겼지만 그들이 자발적으로 헌혈 운동을 전개한 점에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바로 이 같은 운동은 적십자사의 목적인 숭고한 인류애의 발로”라고 격찬하며, “학생들이 농성을 벌이면서 자발적으로 주변 지역을 청소하였으며 아무런 피해도 없었다.”라고 밝혔다. 그리고 150여 명분의 피를 한국의 요청이 있다면 선박 편으로 반드시 보낼 것을 약속하였다.

헌혈 압박 운동의 초기 단계는 대학생들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곧바로 다양한 계층의 교민들이 참여하여 매우 조직적인 형태로 움직였다. 당시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던 반정부 인사들로부터 시작하여 출신 지역을 초월해 경상도, 전라도, 이북 사람 할 것 없이 참여한 로스앤젤레스 최대의 한인 연대투쟁이었다. 헌혈 압박 사건의 주요 참가자이기도 한 장태한은 이 헌혈 압박 및 미국 적십자사 로스앤젤레스지부 농성 사건을 “일제 강점기 이후 처음으로 미주 한인들이 모국의 정치 상황에 침묵을 깨고 거리에 나선 사건”이라는 평가를 제시하였다. 농성의 주요 참가자 중 한 명인 양필승은 1980년 5월 24일부터 27일까지 이어진 ‘헌혈 압박’ 및 미국 적십자사 로스앤젤레스지부 혈액원 점거 농성 사건의 의의를 “헌혈 압박이라는 훌륭한 전술 전략으로, 미국 언론을 상대로 민족의 연대감과 아울러 정치적 역량을 과시하였으며, 미국 정부와 한국의 신군부를 대상으로 한 정치적 투쟁에 있어서 소수의 인력으로도 나름대로의 현실적 성과를 거두었던” 사건으로 평가하였다.

참고문헌
  • 양필승, 「5·18 LA 적십자사 점거와 헌혈 압박」(전남대학교 세계한상문화연구단 국내학술회의, 2005)
  • Edward Chang, 「Korean Community Politics in Los Angeles: The Impact of the Kwangju Uprising」(『Amerasia Journal』 Vol. 14, No. 1, UCLA Asian American Studies Center, 1988)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