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

한자 李陸史
중문 李陆史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이자 저항 시인
성별
본관 예안
대표관직|경력 조선 일보 기자
출생 시기/일시 1904년 4월 4일(음)
활동 시기/일시 1925년
활동 시기/일시 1927년 10월 18일
활동 시기/일시 1929년 11월 3일
활동 시기/일시 1932년 10월 22일
활동 시기/일시 1934년 5월 22일
활동 시기/일시 1943년 7월
몰년 시기/일시 1944년 1월 16일
출생지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원촌리 881번지
수학|강학지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수학|강학지 교남학교[신학문], 영천백학서원[구학문] 수학
수학|강학지 1년간 유학
묘소|단소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원촌리
정의

일제 강점기 의열단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시인.

가계

1904년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촌리 881번지에서 이황(李滉)의 13대 손인 부친 이가호(李家鎬)와 모친 허길(許吉) 사이에서 5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성(眞城)이며, 본명은 원록(源祿)이나 후에 원삼(源三) 또는 활(活)이라 하였다. 자(字)는 태경(台卿), 호는 육사(陸史)이다.

활동 사항

1925년 형 이원기(李源琪), 아우 이원유(李源裕)와 함께 대구에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는데, 당시 중국에서 국내로 들어와 일제 주요 기관 파괴 등의 활동을 하다가 붙잡혀 대구 형무소(大邱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르던 유세주(尹世胄)의 의열 투쟁에 큰 감화를 받았다고 한다.

1927년 10월 18일 장진홍(張鎭弘)의 조선 은행 대구 지점 폭파 사건으로 인해 형제들과 함께 체포되어 대구 지방 법원(大邱地方法院)으로 송치되었는데, 이때 미결수(未決囚) 번호가 64번이었기 때문에 이 수감 번호를 따서 호를 ‘육사(陸史)’라 하였다.

이후장진홍 의사가 일본오사카[大板]에서 붙잡혔고, 이육사는 2년 4개월여 간의 옥고를 끝으로 석방되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 학생 운동(光州學生運動)이 일어나자 다시 검거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이후 북경으로 가던 중, 만주 사변(滿洲事變)이 일어나자 심양(瀋陽)에서 김두봉을 만나 독립운동 방안을 논의하고 다시 귀국하였다.

1932년 10월 22일 본격적인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고 중국 국민 정부 군사 위원회에서 운영하는 간부 훈련반인 조선 군관 학교[교장 김원봉, 남경 소재]에 입교하였다.

이 학교 제1기생 정치조에 소속되어 6개월 동안 비밀 통신, 선전 방법, 폭동 공작, 폭파 방법 등의 특수 훈련을 받고 1933년 4월 23일 수료한 후 상해(上海), 안동(安東), 신의주(新義州)를 거쳐 귀국하였다.

차기 교육 대상자 모집, 국내 민족 의식 환기, 국내 정세 조사 등의 비밀 임무를 띠고 활동 중 1934년 5월 22일 서울에서 일본 경찰에게 붙잡혔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이후 다시 북경으로 갔다가 모친과 백형의 소상으로 1943년 5월에 귀국하였다. 이해 7월 서울동대문 경찰서에 체포되어 북경으로 이송되었다. 1944년 1월 16일 새벽 5시에 북경 감옥에서 별세하였다.

학문과 저술

1916년 12살이 되던 해에 예안 보문 의숙(禮安普文義塾)에서 한학(漢學)을 배웠으며, 1920년 17세가 되자 대구로 이사하여 시내에 있는 교남학교(嶠南學校)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영천(永川)에 있는 백학서원(白鶴書院)에서 수학하기도 했다. 1921년에는 영천 오동(梧洞)안용락(安庸洛)의 딸 안일양(安一陽)과 결혼하였다. 1923년에 일본에 건너가 1년여 간 동경에 있는 대학을 다니다가 이후 1925년에 귀국하였다.

정치, 사회 분야에 걸쳐 폭넓은 작품 생활을 전개하였는데 1932년 6월 초에는 중국북경으로 가서 노신(魯迅)을 만나 동양의 정세를 논하였다. 후일 그가 사망하자 『조선 일보』에 추도문을 게재하고 그의 작품 『고향』을 번역하여 국내에 소개하였다.

1935년 『개벽(開闢)』에 「위기에 임한 중국 정국의 전망」, 「중국 청방 비사(中國靑幇秘史)」 등을 발표하였다. 1936년 처음으로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라는 시를 발표하면서 시인으로서 등단하였다. 1938년에는 「강 건너 간 노래」, 「소공원」 등의 시 작품과 「조선 문화는 세계 문화의 일륜(一輪)」, 「계절의 5월」, 「초상화」 등 평론과 수필을 발표하였다.

1939년에는 「절정」, 「남한 산성」, 「청포도」 등의 시와 「영화에 대한 문화적 촉망」, 「시나리오 문학의 특징」과 같은 영화 예술 부문의 평론을 발표하였다. 1940년에는 「일식」, 「청난몽」 등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1941년에 들어서 일제의 조선어 말살 정책으로 민족혼을 억압하는 상황 하에서도 작품 활동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파초」, 「독백」 등의 시를 발표하였다.

한편 호적(胡適)이 쓴 『중국 문학의 50년사』를 초역하기도 하였으나, 글을 발표하던 『문장』과 『인문 평론』 등이 일제에 의해 폐간되고 말았다. 1942년에는 사실상의 유고(遺稿)인 「광야」를 발표하는 등 시를 비롯하여 수필, 평론, 번역 등 매우 광범위한 문필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육사는 무려 17회에 걸쳐 옥살이를 하면서도 오로지 독립을 위해 의열 투쟁의 대열에 앞장섰다. 건강이 악화되자 민족 시인으로서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등 암흑기에 주옥같은 많은 작품을 남겼다.

묘소

유해는 미아리 공동 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60년 봄 고향인 원촌으로 이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 김희곤, 『새로 쓰는 이육사 평전』(지영사, 2000)
  • 김병호, 「한국 근대시 연구: 주제의식을 중심으로」(중앙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1)
  • 강창민, 『이육사 시의 연구』(국학자료원, 2002)
  • 오세영·최승호 , 『한국 현대 시인론』 1(새미, 2003)
  • 김용직·손병희 편저, 『李陸史 全集』(깊은 샘, 2004)
  • 조창환, 「이육사 시의 미적 구조와 정신적 지향」(『문예운동』 10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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