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安壽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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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 | 安寿吉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성격 | 소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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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 男 |
출생 시기/일시 | 1911년 11월 3일 |
몰년 시기/일시 | 1977년 4월 18일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36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35년-1945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45년 6월 |
거주|이주지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
일제 강점기 만주에서 활동한 조선인 소설가.
안수길은 1924년 14세에 간도 용정의 부모님 곁으로 이주하지만, 1934년까지 함흥, 간도, 서울, 일본 등지에서 중등 교육 과정을 거치면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간도에 있는 광명 고등 여학교의 교사로 재직 중이었다.
안수길은 1935년 김현숙과 결혼한 이후 만주에 정착하여 안정된 생활을 시작했다. 1935년에 처녀작 「적십자 병원장」과 「붉은 목도리」가 『조선 문단』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6년부터는 만주국의 홍보처 한글 신문인 『만선 일보』의 기자를 역임했다. 『만선 일보』는 만주국 정부의 기관지이자 만주국의 ‘민족 협화’ 정신을 구현하고자 만들어진 기관이었다.
안수길은 1935년부터 1945년까지 직접적으로 ‘만주’를 체험함으로써 특색있는 작품을 창작할 수 있었다. 그는 만주국조선계 작가로서 만주에 ‘제2의 고향’을 건설하자는 ‘북향’ 정신을 작품의 주된 주제로 삼았다. 35세인 1945년 6월에는 건강 악화로 재직하던 『만선 일보』를 그만두고 고향인 함흥으로 돌아갔다. 해방 후와 한국 전쟁 전후로 작품 활동을 계속하다가 1977년 4월 18일에 생을 마감했다.
경기도남양주시마석 모란 공원에 부인과 합장한 묘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