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移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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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 | 移住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개념용어 | 한인들의 만주 이주와 정착 과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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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의 만주 이주와 정착 과정.
19세기 중엽, 한인들의 만주 이주는 배고픔을 덜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서북 지역을 휩쓴 기사년(1869) 대흉년은 이주 현상을 심화시켰다. 당시 함경도와 평안도 지역의 한인들은 유례없는 흉년에 정부로부터 어떠한 구휼도 받지 못했고, 결국 두만강(豆滿江)을 건너 이주를 택했다. 이주 초기 함경북도 무산(茂山)·종성(鍾城)·회령(會寧) 등지의 한인들은 두만강을 건너 봉금 지역인 해란강(海蘭江) 이남의 분지와 산기슭에 모여 살면서 마을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 뒤 1910년 전후 북간도 지역의 한인 이주가 급증하였다. 이곳은 200여 년 동안 청 정부에 의해 봉금 지대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땅이 기름지고 값쌌으며 함경도보다 농경에 유리하였기 때문이다. 1910년 가을부터 1911년 4월까지 7~8개월 동안에 1만 5천여 명의 한인들이 만주로 이주할 정도였다. 대부분 곡물가의 폭등으로 생활이 곤란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던 한인들이었다.
이외에도 1909년 9월 청나라와 일본 간에 체결된 ‘간도 협약’으로 인해 한인들의 이주는 더욱 활발하게 이뤄졌다. 잡거 구역 내에 거주하는 한인들에게 거주권과 토지 및 가옥의 소유권은 물론 자유로운 왕래가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청 정부는 한인들의 귀화를 전제로 토지 소유권을 인정하고자 했다. 이에 이주 한인들은 이미 귀화한 한인들의 명의를 빌려 토지를 구입하는 ‘전지 제도(典地制度)’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이주 한인들은 두만강변에 설치된 도선장(나루터)을 이용하여 도강하곤 했다. 1914년 당시 두만강변에는 104개의 도선장이 있었다. 물론 겨울철에는 결빙된 강을 걸어서 북간도로 들어갔다. 그 결과 북간도의 한인 인구는 연 평균 2만 9,000여 명씩 늘어났다.
한인들이 남만주로 대규모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북간도와 마찬가지로 19세기 중엽부터였다. 1845년 이후 봉금령이 약화되자 평안도 변경에 사는 한인들이 압록강 대안의 임강(臨江) 일대의 황무지를 개간하였으며, 1852년 함경도 단천 주민 10여 명이 노령하(老嶺下)로 이주하는 등 많은 한인들의 이주가 있었다. 1869년 기사년 대재해는 남만주로의 한인 이주를 증가시켰다. 이후 3년 동안 평안도 출신의 한인 이주민이 6만 명이나 되었다.
1875년 청나라의 봉천성 봉금령 폐지에 따라 한인 이주가 본격화 되었다. 하지만 남만으로의 한인 이주는 1905년 이후에 급증하였고 이때 독립운동가들의 이주도 증가했다. 남만주로의 이주는 압록강 하류에서 시작되어 안동(安東)에서 육로로 관전(寬甸)·환인(桓仁)·유하(柳河)를 거쳐 계속해서 길림(吉林) 또는 장춘(長春)까지 내륙으로 들어갔다.
1911년에 압록강 철교가 가설되어 안봉선(安奉線)과 경의선(京義線) 철도가 연결되자, 압록강 상류의 장백(長白)·임강·집안(集安) 등으로 이주하는 한인들의 수가 상대적으로 감소하는 한편, 기차를 이용하여 본계(本溪)·무순(撫順)과 심양(瀋陽)에 이르러 남만 각지로 이주하는 한인들이 늘어났다. 1916년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남만 각지에 거주했던 한인들의 수는 집안 22,533명, 환인 13,480명, 임강 10,679명, 통화 10,275명, 관전 9838명, 장백 9770명, 유하 5,356명, 안동 4,801명, 해룡 1507명, 흥경 1,500명, 봉성 580명, 본계 118명 등의 순이었다.
남만으로의 한인 이주가 늘어가자 일제는 각 지역에 영사관이나 경찰 관서 및 조선인 거류민회(朝鮮人居留民會) 등을 설치하여 한인들의 통제를 강화해 나갔다.
북만 지역으로의 이주는 다른 지역에 비해 늦게 이뤄졌다. 한반도 남부 지방에서 뒤늦게 이주해온 한인들은 함경도·평안도 출신의 한인들이 북간도에 이미 정착해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북만으로 올라가야만 했다.
북만으로의 이주는 세 갈래의 길이 있었다. 하나는 길림성을 지나 흑룡강성(黑龍江省)의 남부 지방을 흐르는 목단강(牡丹江) 유역으로 이주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흑룡강성의 중부 지방을 흐르는 송화강(松花江) 유역으로 이주한 경우이다.
세 번째는 두만강을 건너 극동 러시아의 연해주(沿海州)에서 벼농사를 짓다가 우수리강(烏蘇里江)을 건너 흑룡강성의 동부 지역으로 이주해 온 경우이다. 이는 1898년부터 동청 철도(東淸鐵道) 공사가 시작되면서 연해주에 거주하던 한인들이 노동자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이주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북만 지역의 한인 사회는 여러 곳에 흩어져 형성되었다. 요하(饒河)·밀산(密山)·호림(虎林)·의란(依蘭)·방정(方正) 등지는 한인들이 개척하기 전에는 거주민이 적었고 주로 수렵 생활을 하던 곳이었다.
이외에도 남만이나 동만 지역에서 각종 재해 또한 생활 터전을 마련하지 못한 가난한 농민들이 요하 및 목단강과 그 지류를 거슬러 수전 경작지를 찾아 이주해 오기도 했다.
1910년 전후로 북만으로 이주한 한인의 상황을 살펴보면 1909년 동녕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2,000명 정도였다. 이밖에 요하·호림·보청(寶淸)·아성(阿城)·밀산 등지에는 러시아와 동만 및 남만 등지에서 이주해온 한인들이 다수 거주하였다.
하얼빈(哈爾濱)에는 1900년 초부터 한인들이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시기에 하얼빈 근처의 아성·빈현(賓縣) 등지에서 한인들이 농사를 지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빈현[현 연수현(延壽縣)]의 경우에는 1903년 김고려 한세대가 거주하였으며, 1912년에 이르면 18세대 53명의 한인이 동류수하와 흥륭진(興隆鎭) 등지에 살았다. 이들은 주로 강줄기를 따라 작은 마을을 형성하고 벼농사에 종사하였다.
밀산의 경우는 1908년 밀산부가 설립된 후 요령(遼寧)의 요양(遼陽)과 봉황성(鳳凰城)으로부터 이주 정책을 실시하여 많은 한인들이 이주해 왔으며 한인들은 당벽진(當壁鎭)을 중심으로 거주하며 벼농사를 지었다. 밀산은 1909년부터 이승희(李承熙)·김성무(金成武)·김명성·김학만(金學萬)·홍범도(洪範圖)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주해 오면서 새로운 독립운동 기지로 발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