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혁명

한자 文化大革命
중문 文化大革命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현대/현대
정의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연변조선족자치주를 포함하여 중국 전역에서 전개된 변혁 과정.

개설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은 1966년 5월부터 1976년 12월까지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벌어졌던 사회적·문화적·정치적 격동으로, 공식 명칭은 ‘무산 계급 문화 대혁명’이며, ‘문혁’이라고도 한다.

문화대혁명은 중국 전역을 혁명의 기운으로 덮어 혼돈 및 경제적 침체를 가져왔고, 기존 유교적 질서의 붕괴를 일으켰다. 이 운동은 1966년 5월 16일 중국 공산당의 중앙 위원회 주석이었던 모택동(毛澤東)의 제창으로 시작되었는데, 그는 중국 공산주의 내부의 부르주아 계급의 자본주의와 봉건주의, 관료주의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투철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이를 분쇄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중국 전역에서 벌어진 홍위병(紅衛兵)의 움직임으로 구체화 되었다.

연변 문화대혁명의 효시-연변대학 대자보

문화대혁명의 불꽃이 북경 대학(北京大学)·남경 대학(南京大学)에서 일어났듯이 연변대학(延邊大学)과 연변 농학원 일부 학생들은 집회를 열어 북경 대학과 남경 대학의 혁명적 교직원과 학생들을 지지하고, 혁명적 군중을 저지한 연변대학 당위원회 선전 부장 김지운을 해임하라는 대자보를 붙였다.

그 뒤 1966년 6월 20일, 중국 공산당 연변조선족자치주 위원회 문화대혁명 영도소조가 결설되었고, 7월 12일에는 자치주 부주장 조용호가 인솔한 문화대혁명 공작대가 처음으로 연변대학에 파견되었다. 이후 8월 초부터 비판 투쟁에 들어갔으나 얼마뒤 공작대가 갑자기 해체되면서 ‘반동적인’ 비판 투쟁은 잠시 중단되었다.

이후 연변에서 문화대혁명의 기세는 날로 타올랐다. 이를 적극 지지하는 층은 청년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문화대혁명에 앞장서면서 모택동과 그의 사상을 보위하기 위한 홍위병을 조직하였다. 홍위병에 가입한 청년 학생은 출신 성분이 좋았다. 그들은 '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풍속, 낡은 습관' 등의 타파 활동을 벌여 명승고적과 문물을 수없이 파괴하였다.

반란단 조직과 활동

연변의 문화대혁명은 반란단이 조직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1966년 8월 하순 북경·대련(大連)· 하얼빈(哈爾濱) 등지에서 공부하던 조선족 대학생들이 ‘혁명적 연계’를 맺기 위해 연변에 들어왔다. 그들은 연변대학·연변 의학원·연변 농학원 등의 대학생들에게 반란단을 조직하여 자체적으로 혁명할 것을 선동하였다. 이에 많은 연변대의 학생들이 동조하였다.

이들의 주도로 1966년 8월 27일 연변대학 여학생 기숙사 앞마당에서 ‘8·27 혁명 반란단’이 조직되었다. 연변대학의 학생들 외에 일부 교수도 가담하였다. 그런데 이와 별도로 외지에서 온 학생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학생·교직원들이 같은날 ‘혁명 반란단’을 결성하였다. ‘혁명 반란단’은 그 뒤 ‘홍기 전투 연군’이라는 이름으로 고치고 일명 ‘홍련’이라 불렀다. 결국 연변에는 문화대혁명을 주도한다고 자임하는 조직이 두 개나 탄생하였다.

두 조직은 문화대혁명 주도권을 두고 격렬히 대립하였다. 특히 1967년에 들어와서는 연변일보사를 둘러싼 쟁탈전이 벌어졌다. 1967년 1월 4일 상해(上海)의 ‘반란자’들이 모든 권력을 탈취했다는 소식을 접한 ‘8·27 혁명 반란단’ 측은 선전 기구를 먼저 탈취해야 한다며 연변일보사에 쳐들어 가서 이를 접수하였다.

소식을 들은 홍련 측 군중 수천 명은 이를 반대하는 집회를 개최하고 연변일보사로 가서 신문사를 포위하였다. 8·27혁명 반란단 측도 연변일보사로 모여들었다. 두 반란단의 충돌은 피했으나, 이후 8·27혁명 반란단 측이 홍련에 가담했던 군중 100여 명을 연변대학에 잡아다 가두고 심문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 뒤 연변에서는 보다 과격한 반란단이 조직되었다. 모택동의 조카인 모원신(毛遠新)이 1967년 1월 25일 연길에 왔는데, 그는 본래 하얼빈 군사 공정 학원의 1964년도 졸업생이었다. 그는 모택동의 조카라는 ‘밑천’을 가지고 문화대혁명이라는 정치무대에 등장하여 동북에서 ‘태상황’ 노릇을 하던 사람이었다.

모원신은 문화대혁명을 선동하는 7편의 문장을 발표하였다. 주된 내용은 진정한 반란파를 식별하는 표준은 주덕해(朱德海)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달렸다고 하면서 주덕해를 타도할 것과 연변에서 진정한 반란파를 새로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모원신과 연변 군사 관제 위원회의 지지 하에 연길시와 각 현에서는 각 계통의 ‘홍색 반란자 혁명 위원회’이라는 새로운 반란 조직이 만들어졌다. 홍색 반란자 혁명 위원회는 주덕해를 타도하는 일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한편 홍색 반란자 혁명 위원회에 반발하는 새로운 단체가 또 생겨났다. 즉 주덕해를 보호하려는 여러 군중 조직들이 연합하여 ‘노동자 혁명 위원회’·‘농민 혁명 위원회’·‘상업 계통 혁명 위원회’ 등을 결성한 것이다. 연변 의학원의 ‘베쑨 공사’, 연길시 2중의 ‘항대(抗大)’ 등의 학생 조직이 여기에 가담하였다. 이들은 ‘주덕해는 좋은 간부’라면서 연변자치주의 또 다른 핵심 간부인 김명한·남명학의 타도를 외쳤다. 그 결과 연변에서는 8·27혁명 반란단, 홍련, 홍색 반란자 혁명 위원회, 노동자 혁명 위원회 등 4개의 파벌이 상호 대립하였다.

홍색 반란자 혁명 위원회는 주덕해의 ‘죄상’을 집요하게 추궁하였다. 1967년 4월 초, 주 당위, 주 인민 위원회, 시 당위, 시 인민 위원회, 주공안처, 시 공안처 등 기관의 홍색 반란자 혁명 위원회 조직들은 연합하여 ‘기관 홍혁회’를 결성하였다.

기관 홍혁회는 1967년 5월 초부터 주덕해의 지도하에 오랫동안 일해 온 주 당위, 주 인민 위원회 등 단위의 주요 간부 100여 명을 모아놓고 주덕해의 ‘죄상’을 적발하게 했다. 이는 집요하게 전개되었다. 1967년 5월 30일 홍색 반란자 혁명 위원회와 대립하였던 노동자 혁명 위원회 측이 주 당위원회 청사를 쳐들어 가서 자치주 핵심 간부 전인영(田仁永)[한족] 등을 빼앗아 간 사건이 발발하자 기관 홍혁회에서는 주덕해 ‘죄상’을 캐기 위해 강제 수용하고 있던 간부들을 주 인민 위원회 청사로 옮기고 ‘죄상’ 밝히기 작업을 계속 진행하였다.

1967년 6월 중순에 연길 시내에서 반란단 간의 상호 무장 대립이 심해지자 홍색 반란자 혁명 위원회 측에서는 간부 40여 명을 돈화현(敦化縣)의 추리구 임장으로 몰래 빼돌려 거기서 기존의 작업을 계속하도록 했다. 이때 홍색 반란자 혁명 위원회 측에서는 간부들을 구타하는 등 강압적인 방법을 동원하였다.

여기서 주덕해 ‘죄상’을 담은 자료를 만들었다. 이 자료에는 주덕해에게 ‘연변에서 으뜸가는 자본주의 길로 나아가는 집권파’이자, ‘외국과 내통한 매국 역적’이라는 죄명을 씌웠다. ‘죄상’ 밝히기 작업은 1967년 말에야 끝이 났다. 주덕해의 ‘죄상’은 대자보나 팜플렛을 통해서 또는 군중을 대상으로 한 연설에서 대중들에게 선전되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팜플렛을 작성한 연변 농학원 동방홍공사는 홍색 계열이었다. 역시 앞서 언급한대로 홍색은 연변 군사 관제 위원회[주임 고봉]의 지지를 받았다. 홍색은 이와 같은 군대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여 우세한 무장력을 동원하여 1967년 8월에는 노동자 혁명 위원회 측을 제압하였고 이듬해 봄에는 8·27 혁명 반란단 측을 제압하여 연변의 최강자가 되었다. 홍색과 보조를 맞추었던 연변 군사 관제 위원회 주임 고봉은 이후 연변에서 문혁기간 최고위직을 차지하였다. 그에 따라 문혁 기간 거의 내내 주덕해의 죄상을 추적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문화대혁명에 희생된 조선족들과 문화 유산

문화대혁명 시기 연변 지역과 같이 산재 지구의 조선족 가운데서도 특무, 반역자, 민족주의 분자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박해를 받았다. 특히 당시 항미 원조 시기 조선에 갔거나 북한에 친척이 있는 사람, 북한과 통신 연락이 있거나, 북한에 대해 좋은 말을 했던 사람, 심지어 북한 대표단의 통역을 선 사람마저 조선 수중주의 특무로 비판을 받고 투옥 당하기도 했다. 당시 흑룡강성하얼빈시의 조선족 간부 32명이 조선 수중저의 특무로 심사를 받았고, 하얼빈시 공안국의 23명 조선족 간부 가운데 18명이 조선 수정주의 특무와 반역자라는 죄명으로 심사를 받았다.

1968년 4월 처음으로 연변자치주공안국, 자치주 검찰원, 자치주 법원에 계급대오 정리 학습반이 개설되었다. 이 학습반에서 다시 한번 피비린내 나는 숙청이 시작되었다. 이 학습반에서는 소위 외국 간첩이라는 이름으로 51명이 계급의 적으로 적발되어 각종 형벌을 받았다. 그 중 3명은 형벌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으며, 10여 명은 불구가 되었다. 조선족 정법(政法) 계통의 간부와 경찰 175명이 외국 간첩으로 지목되어 그 중에서 12명이 학습반 기간에 맞아죽었으며 82명이 불구가 되었다.

수많은 조선족 간부와 지식인 그리고 일반인까지도 변절자, 특무[간첩], 반혁명 분자, 불순분자로 지목받아 비판을 당하고 혹자는 감옥에 갇히고, 혹자는 반란파가 임시 설치한 이른바 ‘소 우리’에 갇혀 인신의 자유를 잃은 죄인이 되었다. 불법으로 고문실을 차려놓고 수 십 가지 형구로 형벌을 가하여 ‘지하 국민당 파내기’ 운동을 전 자치주로 확산 국민당 지하 당원을 1,453명을 색출했다. 그 가운데 148명이 심사 과정에서 맞아 죽거나 자결했다. 1930년대 초부터 혁명에 참가하였고 연변대학 창설 준비 위원회 때부터 줄곧 대학을 운영해 온 임민호 총장도 이때 제자들에게 맞아 끝내 사망했다.

1982년 한 보고에 의하면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연변에서 발생한 희생자 수는 놀랄만한 규모이다. 4천여 명이 처형 되었고, 5천여 명이 부상 당했으며, 수만 명이 투옥, 격리 되었거나 심문을 받았다. 계급 투쟁이 진행되던 이 시기는 현대인으로서는 이성과 지성이 상실된 시기였다. 그러기에 적지않은 이들이 비인간적인 박해를 받다가 울분을 이기지 못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어떤 이는 시달림 끝에 원한을 가슴에 안은 채 세상을 떠났다. 수많은 간부와 지식인이 모택동 주석의 이른바 1966년 5.7 지시에 의하여 농민으로부터 재교육을 받는다는 명분으로 농촌으로 쫓겨 갔다. 간부와 지식인에 대한 노동 개조였다.

문화대혁명으로 말미암아 조선어 책, 신문, 잡지, 참고 자료 문헌 등은 소각 되었거나 압수 당했고 출판이 중지되기도 했다. 도서관의 조선어 책은 폐기 되거나 열람 할 수 없게 되었다.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신문·잡지 등은 대부분 정간되었으며 조선어 방송은 폐지됐다. 민족주의를 배척한 문화대혁명 지도부는 조선족 언론인들을 대거 투옥 시키거나 숙청했다. 조선어를 존중하는 행위를 수정주의 또는 투항주의라 비판, 조선어 무용론을 내세웠다. 이로 인해 연변조선족자치주 공문서에서 한글이 사라지고 학교의 조선어문 교육도 폐지됐다.

1967년 중국군이 문화대혁명에 참여하면서 연변일보사에도 1개 중대 병력이 진주, 군사 관제가 실시됐다. 2월 25일 결국 연변 일보는 폐간됐다. 조선족은 문화대혁명을 통해 인명과 재산상의 피해만 받은 것이 아니라 족보가 불태워지는 등 조선족의 민족 전통과 문화의 계승, 발전이 중단되었다. 이후 조선족 사회는 모택동에 대한 개인 우상 교육이 실시되었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특히 문화대혁명의 피해를 많이 본 ‘재해 지구’로 분류되었다. 당시 연변주에서 ‘억울한 사건’에 연루되어 2,653명이 사망하였다. 그 자리에서 맞아 죽은 사람이 433명이나 되었고 구타 후 사망한 인원도 737명이나 되었다. 핍박에 자살한 사람이 1,483명에 달했다. 연변은 중국의 그 어느 지역보다 문화대혁명이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에 그만큼 피해가 컸던 것이다.

참고문헌
  • 최순호, 『조선족 이야기』(민음사, 2004)
  • 국사 편찬 위원회, 『중국 한인의 역사』상)(국사 편찬 위원회, 2011
  • 염인호, 「중국 연변 문화대혁명과 주덕해의 실각」(『한국 독립운동사 연구』 25, 독립 기념관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소, 2005)
  • 성근제, 「문화대혁명과 연변(延邊)」(『중국 현대 문학』43 , 한국 중국 현대 문학 학회, 2007)
  • 차희정, 「문화대혁명의 발생과 중국 조선족의 대응」(『한국 문학 논총』60, 한국 문학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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