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

한자 體育
중문 体育
분야 문화·교육/체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녕성  
시대 현대/현대
정의

중국 동북 3성에 거주하는 조선족들이 심신을 단련하고 여가 및 운동 능력을 기르는 제반 신체 활동.

학교 체육

연변조선족자치주를 포함한 중국 체육 교육 과정은 다섯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개조기’는 1956년 1차 체육 교육 과정이 중국에서 처음 반포된 시기로 당시 중국 사회주의 건설을 목적으로 소련의 체육 교육 과정을 모델로 삼아 체육 수업을 진행하였다.

이로부터 수년간의 개편을 거쳐 1961년 제2차 체육 교육 과정이 반포되었다. 체육 수업에서는 ‘체질 증강’을 중심으로 하는 체육 교육 과정의 체계가 수립되었으나 체육과 노동의 개념에 대한 구분이 없었다. 당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체육 교육 과정은 무술 부분만을 삭제하고 국가에서 제시한 교육 과정을 따랐다.

‘정체기’는 ‘문화대혁명’ 시기에 해당하는데 체육 교육 과정이 정치적 도구로 성격이 변질된 때이다. 당시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체육 교육 과정도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부활기’는 1978년 제3차 체육 교육 과정의 반포가 이루어진 시기로써 체육 교육의 재도약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체육 교육 과정에서는 ‘학생 체질 증강’을 특별히 강조하였고 체육 수업을 ‘국가 체육 단련 표준’과 연관시킨 것이 특징이다. 이 시기에는 특히 교재 개혁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는 민족 특색에 알맞도록 체육 교육 과정을 개편하여 체육 수업을 진행하였다.

‘개혁기’에는 1987년 제4차, 1988년 제5차, 1992년 제6차 의무 교육 보급 단계 체육 교육 과정이 반포되었다. 체육 교육 과정에서는 학생의 흥미 양성, 개성 발달 및 보건 교육이 도입되어 학생에 대한 평생 체육의 기초를 다졌다.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는 1987년 8월에 처음으로 조선족 체육 교육 과정을 고시하였고, 과학적으로 조선족 특징을 고려하였으며 체육 교재의 편찬도 시도하였다.

‘발전기’에는 2000년 제7차, 2001년 제8차 체육 교육 과정이 반포되었다. 학습의 폭이 넓어졌고 외국과의 교류가 활발하게 시도되고 있다. 학교 교육에서는 ‘건강 제일’의 지도 방침을 수립하고 소질 교육을 실시하고자 하며, 학생의 신체, 심리, 사회 적응면 등에서 전체 건강을 추구한다는 특징이 있다. 이 시기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체육 교육 과정의 특징은 국가 체육 교육 과정에 없는 교수 내용을 참고로 정하였다는 점이다.

생활 체육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도시민 가운데 대다수 사람들은 여가 체육 소비 활동에 참가하고 있으며, 평균 원화 100원 아래의 여가 체육 소비 지출 가운데 남녀 소비 비율이 거의 동일한 것으로 나타났다.

100원과 300원 사이의 여가 체육 소비 지출은 남성이 여성보다 높으며, 16세~30세와 31세~40세 사이의 여가 체육 소비는 조선족이 기타 민족보다 높으며, 학력이 높을수록 소비가 높은 추세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가 체육의 가장 큰 목적은 신체 단련이 55.8%, 여가 오락이 46.89%, 신미 추구가 38.58%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995년 6월 중국 정부는 국민들의 여가 스포츠의 활성화를 위한 「전민 건강 계획 강요(全民健康計劃綱要)」를 반포하였다. 이는 중국 스포츠 발전사에서의 큰 이정표가 되었을 뿐 만 아니라 중국에서 최초로 법률상 여가 스포츠와 국민의 건강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담론할 수 있게 되었다.

「전민 건강 계획 강요」는 2개의 큰 공정으로 나뉘는데, 제1기 공정은 1995~2000년[홍보와 개혁 병행, 국민들의 건강 의식 관념 수립], 제2기 공정은 2001~2010년[전면적인 국민 건강 사업 추진]이다.

2004년 통계 조사에 따르면, 중국 체육 총국에서는 여가 스포츠의 활성화를 위하여 5,627개 도시와 농촌 국민 건강 공정을 설립했고 생활 체육 지도자 육성 구역을 20여 만 개로 지정, 150여 개의 종합 체육관 설립, 3만개 이상의 여가 스포츠 활동 시설을 마련, 43만 명의 생활 체육 지도자를 육성함으로써 매년 여가 스포츠 참가자는 약 3억 인에 달했고, 정기적인 여가 스포츠 참가 인구는 33.93%에 달했다.

이러한 「전민 건강 계획 강요」를 배경으로 중국 조선족들이 집결해 살고 있는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는 150여 개의 생활 체육 협회를 설립, 약 연간 200만 위안의 돈을 투자하여 구기 종목·테니스·마라톤·스키·골프 등 다양한 여가 스포츠 종목을 중심으로 중국 조선족들의 여가 스포츠 활성화를 촉진시키고 있다

2001~2006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 통계에 따르면, 중국 정부로부터 388개의 투자 종목과 48개 핵심 건설을 위한 총 200억 위안에 달하는 경제적 지원을 받았는데, 그 중 연변 정부에서는 국민들의 스포츠에 관한 의식과 여가 스포츠의 활성화를 위하여 약 800여 만 위안을 투자하여 800여 개의 여가 스포츠 장소 확충과 생활 체육 지도자를 육성함으로써 여가 스포츠 참가자는 전체 인구의 약 34%에 달했으며, 2005년에는 국가 체육 총국으로부터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전국 여가 스포츠 활성화 선진 단위'로 선정되었다.

또한 「2010~2015 연변 조선족 정부 5개년 계획」에 따라, 2010년까지 경상적으로 스포츠 운동에 참가하는 비율을 총 인구의 36%로, 2015년까지는 약 50% 이상으로 끌어올려 중국 국민들의 여가 스포츠 활성화와 여가 문화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특히 여가 문화의 한 형태로 즐길 수 있는 중국 조선족 전통 체육의 그네·널뛰기·씨름 등은 민족 전통 체육의 발굴과 보존에 있어서도 의미가 있다. 스포츠 문화적 관점과 민속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는 사회 전반에서 민속 운동이 대중화로 발전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해 줄 뿐 만 아니라, 조선족이 즐길 수 있는 전통 체육이 다방면으로 발전할 수 있는 여가 문화를 마련하여 주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이다.

조선족 체육인의 생애

중국 조선족 체육인들은 자기 생애의 과정에서 사회 구조와 상호 작용으로 삶의 과정에서 신분 전환과 생애의 전환을 거듭 하였음을 확인 하였다. 최근식은 마라톤 선수에서 생활 체육 개척자로, 윤학주는 체조 선수에서 한국·중국 체육 스포츠 학술 교류 선구자로, 윤재오는 체육 교수로, 박만복은 헝가리 축구 유학생을 거쳐 한민족의 동질성을 찾고 만남의 장을 이루는 친목회 회장으로, 왕동림은 운동 선수들을 키우는 코치의 아버지로, 강성남은 아마추어 야구 선수에서 남·북·중국의 3국의 체육, 스포츠 문화 교류의 네트워크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체육인으로 성장 하면서 각 시대별로 특징적인 변화의 순간을 맞이하였다. 20세기 초 조선족 이주 1세대들은 청나라의 지주·관료·토비·일제 등의 착취를 받으면서 조선족 마을 마다 학교를 세우고 학생들에게 민족 교육과 반일 구국 사상을 전파하였다. 또한 단오·추석 등 명절이나 농한기에 씨름·그네 널뛰기 등 민족 체육 활동은 물론 축구·육상·야구 등 근대 체육도 전개하였다. 이처럼 조선족 체육인들은 체육을 통한 행위로 일제의 노예화 교육에 대항하였다.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후 재만 한인들은 중국 공산당의 민족 정책으로 중국 국적과 한반도 국적을 모두 가지게 되었고, 지주와 토비들의 약탈에서 구해준 중국 공산당을 신임하였고, 항일 운동·국공 내전·토비 숙청에 적극 참여하여 중국 공산당의 건국을 돕기도 하였다.

또한 중국 공산당이 중국을 건국한 이후 재만 한인들은 중국의 소수 민족으로 자리 잡았다. 1952년 연변조선족자치주와 조선족 자치현을 설립하여 조선족 자체로 자기 민족을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학교 교육과 일상 행정 사무에서 민족 언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조선족이 한반도의 문화를 계승하고 보존하는데 제도적인 기반이 되었다.

이 시기에 윤학주·윤재오·박만복은 고향을 떠나 본격적인 체육인의 삶을 개척 하였다. 그들은 각자 피나는 노력 끝에 소수자로써 주변부에 머무르는데 그치지 않고 주류 사회로 진출하였다.

그 와중에 그들은 주류 문화와 모체 문화의 융합으로 새로운 독특한 스포츠 문화를 창출하였다. 1958년 대약진 시기 체육 영역에서 '위성'을 올린다는 슬로건을 갖고 코치·감독·선수로서 괄목할 만한 성적을 거뒀다. 그러나 1960년대 문화대혁명 시기에 조선족 체육은 마비되었고 팀이 해체되어 코치와 감독이 농촌에서 강제 노동을 해야만 했다. 1970년대 초부터 체육 영역은 차츰 생기를 되찾기 시작 하였고, 문화대혁명 후기부터 1980년대 개혁개방 초기에 조선족의 체육은 전국의 상위권을 차지하였다.

1992년 한·중 수교 전까지 조선족은 북한을 ‘모국’으로 생각하면서 민족 정체성과 국민 정체성 사이에 혼란스러워했다. 한·중 수교 이후, 북한보다 한국과 교류가 빈번해졌지만 한국으로부터 타자화 되면서 중국의 조선족이라는 민족 정체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한편 문화·교육·경제 등 면에서 한국의 도움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특히 체육·스포츠는 한국의 경제적·문화적 도움을 받아 중국 체육계에서 그 명성을 떨쳤다.

이들은 타향에서 자신들의 꿈을 키우면서 독특한 체육·스포츠 문화를 형성하였고 고향에 돌아와 지역 체육·스포츠의 저변 확대를 위하여 기여하였다. 그들은 대약진, 문화대혁명, 개혁개방 등 중국의 사회 격변기에 높은 열정과 민족 의식으로 운동 선수 육성, 체육·스포츠의 보급에 전념하여 조선족 체육의 전성기를 맞이하게끔 하였다.

또한 중국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아 국가 대표팀 코치·감독으로 발탁되면서 민족과 나라의 체육·스포츠 발전에 기여하였다. 조선족 체육인들은 ‘문화 전환’ 기능과 ‘변연 문화’의 역할을 발휘하여 민족의 체육·스포츠의 보급과 발전 뿐 만 아니라 조선족 사회와 한반도, 한국북한중국의 스포츠 교류에도 기여하고 있다.

조선족 체육인들은 중국 내의 타자화와 한국의 타자화를 감수하면서도 중국 조선족으로 입지를 든든히 하면서 ‘접본’에 중국 문화라는 ‘접목’를 가접하여 새로운 체육·스포츠 교류에 기여하고 있다.

결어

조선족들은 한국의 체육 및 스포츠 문화에 대해 긍정적 입장을 가지고 있으며 축구·태권도·빙상 종목의 전문 지도 프로그램으로 대학 차원의 교류나 학회 차원의 스포츠 문화를 공유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조선족들은 한국의 스포츠를 매우 선호하며 연변의 미래 사회에 있어서 건강과 생활 체육 중심의 건전한 여가 문화와 노인 체육이 활성화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집단 거주 지역의 해체로 인한 학교 공동체의 붕괴, 더 나아가 민족 정체성의 붕괴를 근심하고 있다. 이는 한국의 정치 상황이나 국내 거주 조선족들의 의식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따라서 한국의 체육 및 스포츠 문화를 순조롭게 공유하기 위해서는 신뢰와 한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할 수 있는 계기를 준비해야 할 것이며 그 대표적인 방법으로 스포츠 교류와 국내 거주 조선족을 위한 특별한 스포츠 프로그램 보급이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참고문헌
  • 허광운·이상철·이예승, 「연변자치주 거주민 여가 체육 소비 현황 연구」(『한국 여가 레크리에이션 학회지』 32-4, 2008)
  • 권오륜,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체육 및 스포츠 문화의 한국적 패러다임 구축」(『한국 체육 철학회지』 19-2호, 2011)
  • 강종학, 「중국 조선족 체육인의 생애와 정체성 변화」(강원 대학교 대학원 박사 학위 논문, 2013)
  • 김두섭·류정균, 「연변 조선족 인구의 최근 변화 : 1990년, 2000년 및 2010년 중국 인구 센서스 자료의 분석」(『중소 연구』 36-4,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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