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한자 藝術
중문 艺术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현대/현대
정의

중국 동북 3성의 자연과 역사 등을 소재로 특별한 재료나 기교, 양식 따위로 감상의 대상이 되는 아름다움을 창작, 표현하려는 활동 및 그 작품.

예술 단체

조선족의 예술 단체는 1946년 초부터 설립 되기 시작 하였다. 연변에서 ‘불꽃 극단’과 ‘길동군구 정치부 문공단’이, 목단강에서는 ‘목단강 민주 연맹 문공단’이 창단되었다.

목단강 민주 연맹 문공단은 ‘목단강시 문공단’으로 개칭한 뒤에 1949년 8월 하얼빈의 ‘송강성 노신 문공단’에 합병 되었다. ‘송강성 노신 문공단(조선 의용군 3지대 선전대 후신)’은 송강군구 8사단 선전대로 창단 되었다. 통화에는 ‘요령군구 이홍광 지대 선전대’ 등이 있었다.

‘길동군 정치부 문공단’은 1947년 12월 연변 전원 공서 소속으로 되었다가 1948년 3월 ‘연변 지구 전원 공서 민족 사무처 문공단’[연변 문공단으로 약칭]으로 바뀌었다가 1953년 1월 연변 가무단으로 개칭 되었다. 편제는 93명이었다.

희곡과 연극

조선족 예술 역사에서 연극은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1914년경 용정·연길 등지에서 민권 자유, 남녀 평등과 자유 혼인을 주장하는 신파극 「새 가정」· 「미신타파」 등이 공연 되었고, 1925년경에는 「경숙이의 마지막」·「야학으로 가는 길」 등이 훈춘 일대에서 공연 되었다.

1927년 용정에 연극 단체 ‘예우사’가 조직되어 무언극 「그렇다」 등 여러 편의 희곡을 무대에 올렸다. 1920년대 당시 희곡은 전문 작가와 단체가 없었으나 대중들의 출연으로 많은 호응을 얻었다.

1931년 9·18 사변 후, 동북 항일 유격 근거 지역에서는 연극 창작과 공연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 되었다. 「혈해지창」· 「4·6제」·「싸우는 밀림」이 대표적인 작품들이었다. 일제 통치구에서는 「흰 독수리(白鷲)」·「왕자호동(王子好童)」 등의 연극이 공연 되었다.

해방 후 1945~1949년 당시 연극은 더욱 활기를 띠였다. 간도에서 창작, 공연된 「승리의 혈사」, 박노을의 장막극 「아침해 솟았다」와 「막다른 골목」, 고철의 「길」과 「꼬맹이의 참군」, 신활의 가극 「인민무장은 일떠섰다」와 장막극 「누가 죄인이냐?」, 그리고 장막극 「토성」, 가극 1승리의 대진군」 등이 있으며, 이밖에 번역극 「애국자」와 「이완 꼬루비」 등이 대표적인 연극들이었다.

목단강 지구에서 공연된 「밀림의 고백」·「새 결의」·「너?! 이 놈」, 가극 「그리운 강남」, 비극 「안중근」, 정극 「전선」, 희극 「추석명절」, 풍자극 「인생안내」 등이 대표적이었다. 통화에 주둔하고 있던 이홍광 지대 선전대에서 창작, 공연한 「이홍광」과 가극 「폭파영웅 조성두」, 그리고 제 3지대 문공대에서 공연한 「우리의 맹세」 등이 있다.

특히 「승리의 혈사」는 1930년대 초, 일제가 간도의 많은 부락을 잿더미로 만들고 무고한 백성을 살해한 해란강 대유혈 사건을 소재로 하였다. 1946년 겨울, 4일간 지속된 해란강 청산 대회 기간에 이스크라 극단이 공연되었다.

음악

재만 한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한반도에서 전해온 민요 혹은 계몽 가요를 불렀다. 대표적인 곡으로는 「월강곡」·「요람곡」·「달아, 달아」·「아리랑」·「농부가」 등을 꼽을 수 있다. 1954년 5월 연변에서 처음으로 민가집이 출판되었는데, 49수의 조선 민요가 수록되었다. 1963년에는 180수의 가요를 수록한 「민가집」이 정리, 출판되었다.

1900년대 초에 간도에서 전파되기 시작한 종교는 찬송가를 통하여 대량적으로 서구 음악이 전파되었다. 김선목이 지도한 용정동산 예배당 합창단은 한인 사회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1920년대에 접어들어 중학교를 기반으로 하여 많은 음악 사업자들의 노력에 힘입어 작곡·성악·기악 등 여러 면에서 민족적인 토대가 닦아졌다. 1920년대 중기부터 조선족 작곡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작곡가로는 윤극영·황병덕·최남·김광희·박창해·문하연·조두남·김선문 등을 꼽을 수 있다.

1930년대부터 1940년대 초에는 조선 이주민 전문 예술 단체는 없었지만 각 중학교와 교회당에 취주악대가 보편적으로 조직되었다. 1943년에 조직된 간도 방송국 방송 악단[허세록 지휘]과 협화 청년 악대[허세록 지휘]가 활동하였다.

당시 재능 있는 연주가로는 만주국 신경 교향 악단의 제1 바이올리니스트 김동진, 할빈 교향 악단의 첼로 연주원 김인수 등이 있었다.

당시 뚜렷한 분야는 항일 가요였다. 항일 가요는 항일 근거지 음악이 주체를 이루고 있었다. 당시 애창 되었던 「의병가요」·「계몽가요」·「신민요」·「동요곡」 등에 새로운 가사를 붙여 부른 항일 가요들이 많았다. 동요 「고드름」[윤극영 곡]에 새 가사를 붙인 「여성해방가」를 일례로 들 수 있다. 「유격대 행진곡」·「총동원가」·「결사전가」·「의회주권가」 등이 대표적인 항일 가요이다.

무용

한인 이주 초기에는 전업 무용 예술 단체가 없었다. 조선 이민 무용은 민간 무용이 전부였다. 민간 무용은 19세기 후반기에 만주에 전수될 정도로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다. 1930년대 간도의 조선 이주민은 농악무·탈춤·학춤·승무·삼삼이춤 등을 추었다.

농악무는 농촌에서 모내기·김매기·가을 걷이·길 닦이 혹은 경사가 있을 때면 마을 남녀 노소들은 한자리에 모여 먼저 막걸리를 마시고 흥에 농악무를 추었다. 노동 정서를 고무하거나 풍작을 경축하는 오락이다.

흥미 있는 것은 춤추는 남자의 머리에 씌워진 상모이다. 악기는 꽹과리·징·소고·장고·나팔·퉁소 등이다. 1938년 3월, 70세대의 조선인들이 안도촌으로 이주해 온 뒤에 돈을 모아 조선에서 여러 악기·옷·상모 등을 사왔다. 새마을 농민은 농악대를 꾸려 민족의 풍습에 따라 농악무를 추면서 비롯되었다.

1943년, 장춘에서 28개 민족이 참가한 문예 경연이 있었다. 안도촌 농악대를 이끈 조선 이주민 대표단 김평권을 단장으로 경연에 참가하여 농악무가 동양 민족 무용 공연 종목 1등상을 수상했다.

조선 팔도에 널리 유행된 탈춤은 조선 고대 수렵춤과 전사춤에서 기원하였다. 한말에 이르러 종류도 상당히 많아졌다. 조선 이주민이 간도에 정착한 후 조선 각 지역의 주민들이 잡거 하였기에 탈춤도 많이 변화하였다. 각지의 탈춤의 장점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중국인의 양걸춤의 정화까지 받아들여 조선족의 특징이 두드러진 탈춤이 되었다.

도시의 조선 이주민 문화권에서는 극장, 공회당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무대 무용을 중심으로 하는 현대 무용이 조선 이주민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 하였다. 1935년 4월 28일에 도문 극장이 준공되고 6월 14일에 훈춘 공회당이 낙성 되었으며 9월 6일에는 연길 간도 극장이 낙성되었다. 이러한 장소를 이용한 조선인, 일본인들의 순회 공연이 잦았다.

1935년부터 전통 무용의 대집성가로 이름 높았던 한성준은 만주 지역의 공연을 진행 하였으며, 조택원은 1940년 4월 25일부터 26일까지 도문 극장에서, 6월 30일에는 장춘 만철 사원 구락부에서 무용 조곡 「춘향전」 6곡 외의 무용을 공연하여 굉장한 인기를 끌었다.

또 조선 악극단은 1940년 6월 18일부터 19일까지 목단강에서, 8월 3일부터 4일까지는 신경풍난 극장에서, 8월 5일부터 8일까지는 길림 공회당에서, 6일에는 사평에서 음악, 노래, 무용, 연극 작품을 공연하였다. 그 작품 속에는 최승희가 창작한 무용 「초립동」도 있었다.

1937년 여름, 반석현 소재지의 고급 조선인 예기관 명월관이 개업되고 그곳에서 가야금 병창, 창극 등이 공연 되었고 아울러 궁중 무용도 출현 되었다. 1940년대에 흑룡강성·목단강 등 지역에서 가야금 병창이나 창극·승무·칼춤 등 춤과 노래가 출연되었으며, 1942년 만주국 성립 10주년 때 신경 공회당에서 간도 안도현 명월구「조선농악」이 공연하였으며 잡지에 평론까지 실리기도 했다.

당시 세계적인 무희 최승희도 조선 민족 문화권에 영향을 끼쳤다. 1941년, 일본 공연을 마친 최승희가 10여 만 명 조선 이주민이 살고 있는 목단강 지역에서 공연하였다. 이러한 공연은 광복 전까지 매년 지속 되었으며 안동·심양·장춘·하얼빈·치치하얼·대련·목단강·길림·도문 등지에서 진행되어 처음으로 완벽한 극장 무용을 조선 이주민에게 보여 주었다.

미술

1920년대 유화가 간도에 처음 들어왔고 당시 용정의 중학교 미술 교원은 모두 유화를 가르쳤다. 1930년대에 이르러 서양 문화를 접수하는 유행이 일었으며 많은 청년들이 유학하여 고학의 길을 걸었다. 이리하여 조선 이주민 화단에 예술가로서의 창작 활동이 시작되었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한낙연[1898-1947]·신룡검[1916-1948]·석희만 등이 활동 하였다.

참고문헌
  • 주성화 저, 『중국 조선인 이주사』(한국 학술 정보(주), 2007)
  • 장일민, 「연변 조선족 문화 예술의 어제와 오늘」(『교포 정책 자료』 36, 해외 교포 문제 연구소, 1991)
  • 전성호, 「중국 조선족 예술의 어제와 오늘」(『한국 논단』43, 한국 논단, 1993)
  • 김성희, 「조선족 전통 예술의 전승 기반」(『통일 인문학』 49, 건국 대학교 인문 과학 연구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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