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한자 近代
중문 近代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정의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의 동북 3성의 역사.

개설

중국 조선족의 이민 역사는 2백여 년 가까이 되었다. 19세기 중엽 한인들은 청나라의 ‘봉금책(封禁策)’으로 수백 년간 묵혀두었던 땅을 일구어 논밭을 만들고 삶의 터전을 일궜다. 조선족들은 청나라 정부의 ‘치발 역복(薙髮易服)’·‘귀화 입적(歸化入籍)’ 등의 동화 정책과 중화 민국 시기 군벌(軍閥), 일제의 민족 동화 정책 등과 싸워 민족 생존권을 확보 해야 했다. 더욱이 중국 동북 지역은 오랫동안 반일 무장 투쟁의 주요한 근거지 및 전쟁터였기 때문에 조선족의 역사는 처절한 민족의 수난사이자 생존사였다.

19세기 중엽 만주 이주

한인들이 중국만주(滿洲)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엽부터였다. 1860년대와 1870년대 사이에 조선에서 재해와 흉년이 연속으로 발생하자 많은 이재민들이 사람이 살지 않으면서 비옥한 간도(間島) 지역으로 대규모로 이주한 것이다.

이주민들은 도강(渡江)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넘어 중국 동북 지역으로 들어갔다. 그 이전에도 몰래 만주로 건너간 사람이 있기는 했지만 그 수는 많지 않았다. 대다수는 봄·여름에 두만강을 건너가 농사를 짓고 겨울에는 다시 돌아오곤 했다.

살길을 찾아 만주로 이주한 한인들은 삶에 대한 굳은 의지와 노력으로 묵은 땅을 개간하고 논을 일구어 삶의 터전을 만들었다. 만주 지역의 한인 인구는 1860년대에 이미 7만 7천명에 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주 초기에는 한인이 통화(通化)·집안(集安)·장백(長白)·신빈(新賓)·용정(龍井) 등 두만강압록강 부근에 정착하였으나 점차 연변(延邊)과 기타 지역으로 확산되어 중국 동북부 지역에 한인 사회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예전부터 밭곡식을 위주로 재배하던 곳을 수전(水田)으로 개간하여 벼를 재배하는데 성공하였다.

1910~1920년대, 우국 지사들의 망명과 독립운동

1910년 8월 경술 국치를 전후로 한국의 많은 우국 지사들도 만주로 건너갔다. 이때부터의 이주는 단순히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라를 찾기 위한' 정치 망명 성격을 띤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일제 식민지 통치 기간에 만주로의 한인 인구 이동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중국 동북부 지역의 한인 사회는 더욱 확장되었다. 1910∼1918년에 걸쳐 진행된 일제의 토지 조사 사업으로 인한 조선 농민의 소작화, 일본인 지주와 동양 척식 회사 등에 의한 체계적인 착취와 궁핍화로 인해 많은 농민들이 만주로 이주하게 된 것이다.

동북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인구 집계를 보면, 1907년에 7만 명이었는데 경술국치 이후 1910년에는 10만 명을 초과하였고 1916년에는 20만 명을 넘었으며 1920년에는 45만 9천명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이때부터 중국으로의 이주는 단순히 살길을 찾아 온 것이 아니라 일제의 통치를 피해오거나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이주한 사람들도 있었다. 1910년대에 만주로 이주한 독립운동가들과 초기 이민자들은 즉각적인 항일 투쟁보다는 우선 학교를 설립하고 후손들을 교육하여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1906년 이상설(李相卨)·이동녕(李東寧) 등은 먼저 용정에 서전 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였으며 그 뒤에는 명동학교(明東學校)·창동 학교(昌東學校) 등 수많은 학교가 세워졌다. 1919년에는 군사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신흥 무관 학교(新興武官學校)까지 세웠다. 1910년대에는 항일을 목적으로한 민족주의 학교가 연변 지역에만도 72개소나 되었으며 1926년에는 191개소로 늘어났다.

1919년 3월 서울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재만 한인 사회의 반일 운동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1919년 3월초, 「독립 선언서」가 연변에 전해졌고 연길·용정 등지의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거리에 나가 강연을 하거나 전단지를 뿌리는 방식으로 3·1 운동의 의의를 대중들에게 선전했다. 이에 3월 9일에 조선인 반일 단체 지도자들이 회의를 열었고, 예정한대로 3월 13일에 용정에서 2만여 명의 사람이 모인 가운데 민중 대회가 조직되었으며, 대회 이후에는 큰 규모의 반일 시위 행진이 있었다.

일제와 해당 지역 경찰들은 비무장한 시위 군중을 향해 사격을 가하여 그 자리에서 10명이 숨지고 4명의 중상자와 30여 명의 경상자가 발생했다. 용정에서 일어난 ‘3·13반일 민중 시위는 연변 각지는 물론 통화·류하(柳河)·집안·홍경(興京) 등지의 서간도 지역의 조선인 집거구들에서도 맹렬히 일어났다.

‘3.13 운동’을 계기로 조선인 집단 거주 지역에서는 항일 무장 독립군이 조직되었다. 그들은 ‘3.13’의 교훈에 따라 오직 무장 투쟁만이 일본의 침략을 물리치고 생존권을 되찾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 인식하게 되었다. 이에 1919년 4월부터 동북 각지의 항일 독립운동 단체들은 모두 무기를 구입하고 무관 학교를 세우며 무장 대오를 갖추기 시작했다.

당시 조직된 독립군으로는 안무(安武)가 이끄는 국민회(國民會)[대원 400명, 보총 450자루], 서일(西一)·김좌진(金佐鎭)이 이끄는 북로 군정서(北路軍政署)[대원 600명, 보총 500자루, 권총 150자루], 홍범도(洪范圖)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大韓獨立軍), 최명록(崔明錄)·박영(朴泳)이 이끄는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삼원포(三源浦)에서 조직된 독립단(獨立團) 등이 대표적인 독립군 단체였다. 이외에도 왕청(汪淸)의 의군단(義軍團), 혼춘(琿春)의 청년단(靑年團), 장백의 독립군비단(獨立軍備團) 등이 활동하였다.

무장 독립군들은 변경 지구 및 두만강을 건너 일본 군경들을 습격했다. 한 통계에 의하면 1921년 한 해 동안 독립군들이 일본군과의 교전한 것이 602차에 달했다고 한다. 그 가운데 가장 혁혁한 전과를 올린 것이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이었다.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봉오동에서 독립군이 홍범도의 지휘 하에 단번에 150여 명의 일본군을 소멸시켜 국내외에 큰 영향을 줬다. 그리고 같은해 10월 하순, 화룡현 청산리와 와룡 일대에서 진행된 청산리 대첩은 규모와 일본군을 사살한 수로 보아도 봉오동 전투보다 훨씬 컸다.

김좌진이 지휘한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들과 연합하여 일본군 총 1,400여 명을 섬멸하고 수많은 무기와 군용 물자를 얻었다. 그러나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중국 군벌 정부와 결탁하여 직접 연변 등 조선족 집거구에 출병하여 독립군을 소멸할 계획을 세웠다.

일제는 소위 불령 선인(不逞鮮人)들이 일본 영사관을 습격했다는 이른바 ‘혼춘 사건’을 조작하고, 이를 구실로 일본군을 직접 동북 지역에 보내 재만 한인들에 대한 대학살을 감행하였다. 이것이 ‘경신년 대토벌’이다.

일본군은 제19 사단의 두개 여단을 주력으로 시베리아로부터 철수한 제11·13사단과 동북 주재 관동군, 조선 헌병대와 총독부 경찰대까지 총 동원하여 1920년 10월부터 시작하여 동만과 남만 일대의 조선인 집거구에 대하여 대토벌 작전을 벌였다.

일본군은 가는 곳마다 살인·방화·약탈 등 갖은 야만적 만행을 저질렀다. 어떤 곳에서는 한인 마을을 포위하고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집안에 가둔 채 불을 질렀으며, 어떤 곳에서는 사람들을 밖으로 끌어낸 뒤에 총살하였다.

자료에 의하면 1920년 10월 9일부터 30일까지 21일 동안에 혼춘·왕청·연길 등 몇 개 현에서만 총 3,500여 명의 한인들이 학살당했으며 소각당한 민가는 2,600여 채, 학교 31개, 교회당이 7개라고 한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수천 명의 무고한 한인들이 일본 병사에게 학살당했으며 수많은 조선인 마을들이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1930년대 만주국 설치와 독립운동

1931년 7월 길림성 장춘현(長春縣) 삼성보(三姓堡)에서 만보산(萬寶山) 사건이 발생하였고, 같은 해 7월에는 김이삼(金利三) 기자가 길림 우마황동아 여관에서 피살당했다. 1931년 9·18 사변이 일어난 뒤 동북 지방은 일제의 완전한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1932년에 일본은 오족협화[五族協和, 오족은 한국인·만주족·일본인·한족·몽골족을 가리킴]를 내걸고 세운 괴뢰국인 만주국(滿洲國)을 세운 뒤, 동북 지역을 대륙 침략의 병참 기지와 식량 기지로 활용하고자 했다. 이에 1년에 1만 호씩 이주시킨다는 계획 아래 한인을 집단으로 이주 시켰고, 그 결과 1930년에 60만 명에 달했던 한인 인구가 1940년에는 145만 명으로 두 배 이상 증가하였다.

이어 일제는 1937년 7월 7일 ‘노구교(盧構橋) 사건’을 일으켜 중국에 대한 전면적인 전쟁을 개시하였다. 일제의 전면적인 중일 전쟁과 함께 중국은 항일 전쟁기에 접어들었다. 만주 사변 이후 한동안 일제의 침략에 무저항주의, 소극적인 항일을 고수하던 국민당 정부도 중국 공산당과 합작하여 공동 항일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만주 사변 후 한인들은 항일 유격대를 조직하여 광복이 될 때까지 무장 투쟁을 견지하였다. 특히 1930년대 초 한인 유격대들은 당시 일본의 식민 통치가 아직 공고하지 못한 점을 기회로 백두산과 대흥안령(大興安嶺) 그리고 중소 변경 등 산악 지구에 수많은 유격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한인 유격대들은 1930년대 중엽 통일적인 동북 항일 연군(東北抗日連軍)이 조직되자 이에 가담하여 일본군과 일전을 치렀다.

해방과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 중국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내전이 발생했다. 이때 한인들은 토지 개혁을 비롯한 소외 계층과 소수 민족을 지지하는 모택동 노선을 지지하며 공산당을 도와 해방 전쟁에 참여하였다.

한인들이 국민당에 대항해서 공산당을 지지한 이유는 국민당이 한인을 차별하여 한교(韓僑)라 부르며 귀국을 종용한 반면 공산당은 일찍이 한인을 소수 민족으로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민당과 결탁한 토비(土匪)들이 한인을 포함한 양민들을 약탈할 때 공산당과 함께 대항했다.

한인은 이전의 항일 전쟁은 물론 해방 전쟁에서도 인구 비례로 볼 때 중국의 56개의 민족 중에서 가장 열성적으로 참여하여 신중국을 건설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연변을 위시하여 동북 3성 전역에서 해방 전쟁에 참가한 한인의 수는 62,942명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전쟁 속에서 목숨을 잃은 한인은 3,550명이나 되는 등 많은 아픔과 희생을 겪어야했다.

그러한 공로로 한인은 이주 민족이면서도 토지 개혁, 정권 건설, 해방 전쟁 등 모든 분야에서 중국 공민으로 자격을 부여받았고, 신중국을 건설하는 핵심 민족으로 인정되었다. 그리고 1949년에 소수 민족의 민족 대학으로는 처음으로 종합 대학인 연변대학을 설립하였고, 1952년 9월 3일에 연변조선족자치주를 건설하였다.

참고문헌
  • 조선족 약사 편찬조 지음, 『조선족 약사』(백산 서당, 1989)
  • 국사편찬위원회, 『중국 한인의 역사』상)(국사편찬위원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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