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시대

한자 傳統 時代
중문 传统时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고대/고대|고려/고려|조선/조선
상세정보
개념용어 전통 시대의 요령성의 고려인·조선인의 삶
정의

고대부터 근대 이전까지 동북 3성 한민족의 역사.

개설

전통 시대는 현재 중국 조선족 사회를 구성하는 조선족의 역사를 개관하기 위한 글이다. 요령성은 고조선·고구려·발해의 활동 영역이었으며, 지석묘·산성·고분 등의 유적이 많이 남았다. 발해가 거란에 의해 멸망된 후 요령성은 중국의 영토로 귀속되고 말았다. 따라서 요(遼) 이후의 요령성의 고려인·조선인 등 한인의 자취는 많은 편이 아니며, 주로 전쟁 포로로서 끌려와 살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을 차지하여 한민족의 아픔과 한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었다.

고조선

전통 시대 요령성 일대에는 기원전 10세기 이전부터 비파형 동검 문화가 발달하였는데, 요하 유역을 경계로 양식의 차이가 있어 일반적으로 요하 동쪽에 해당하는 요동 지역에는 고조선으로 비정되는 독자적인 문화권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요령 지방에 고조선이 존재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발전했으며, 이 지역 또는 그 일부는 고조선의 영토였음이 분명하다.

요령성이 고조선의 영향 하에 놓였다는 사례로 비파형 동검과 지석묘 등 유물 유적을 들고 있다. 현재 요서 지역에서 비파형 동검이 출토된 곳으로 영성(寧城) 소흑석구, 조양(朝陽) 목두구·황화구·대파라적촌, 북표(北票) 하가구·양수구, 객좌(喀左) 남동구·노야묘, 수중(綏中) 후반석(後矾石), 건평(建平) 노와복촌(老窩卜村), 오한기(敖漢旗) 산만자(山湾子) 유적 등이 있다. 요동 지역에서 비파형 동검이 출토된 곳으로 신금(新金) 쌍방(雙房), 청원(淸原) 이가보, 요양 이도하자, 대련 강상·곽가둔·이가촌·누상·즉주묘(堲周墓), 교하 양리지북강, 관전 조가보, 집안 오도령구문, 영길 성성초, 본계 상보, 쌍요 길상둔, 장해 상마석 등 유적이 있다. 주로 무덤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다.

고구려

기원전 2세기 무렵 한민족의 하나인 부여[예맥]족이 부여를 건국했으며 기원전 37년에는 부여 출신 주몽고구려를 건국하였다. 한편 요령성 지역은 하상(夏商) 때는 유주(幽州)·영주(營州)의 땅이었고, 기원전 300년을 전후하여 전국 시대 연(燕)이 자리하고 있으면서 요동군·요서군을 두었다. 진(秦) 때 요동군·요서군·우북평군(右北平郡)이 설치되었고, 한(漢)·삼국(三國) 시대에는 유주에 속하였다. 위만 조선의 영토에 설치된 한사군(漢四郡) 외에 요동군은 고조선 및 부여, 고구려 등의 초기 국가들을 예속시키고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고구려는 1세기 초 이후 요동군을 최전선으로 삼아 전쟁을 치렀다. 부여는 주로 한과 우호 관계를 맺고 공동으로 고구려에 맞섰다.

이후 3세기부터 5세기 초에 광개토왕이 요동군을 완전히 정복할 때까지 요령성 지역의 주인공은 공손탁, 위(魏), 진(晉), 북위, 동위(東魏), 북제(北齊), 전연[모용부], 전진(前秦), 후연[모용수] 등 여러 왕조들이었다. 300여 년간 분열되었던 중국을 통일한 수(隋)는 요령성 지역에 유성(柳城)·요동·연군(燕郡)을 두었다. 이때 고구려의 최전선 지역은 요동의 신성·현도성·개모성·요동성·백암성·안시성·건안성 등이었다. 고구려는 598년(영양왕 9)부터 614년까지 와 싸웠다.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요서 지역에 승전 기념탑(京觀)을 세웠다. 가 멸망하고, 당(唐)이 들어서자, 요령성 지역은 하북도(河北道)에 속하게 되었다. 고구려와 당의 전쟁 중 신성·현도성·개모성·요동성·백암성·안시성·건안성 등은 당을 막는데 전초 기지였으며, 요동 반도 끝에 위치한 비사성은 황해발해를 지키기 위한 성이었다. 요동의 가장 후방에 위치한 오골성은 적의 압록강 진출을 막기 위한 요동의 마지막 보루였다. 고구려의 멸망 후 당은 평양에 안동 도호부를 두어 고구려의 영토를 통합 관리하게 하였다. 그러나 안동 도호부고구려 유민의 저항으로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치소를 요동 지역으로 계속 옮겨야 했다.

발해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자 고구려 유민 일부는 말갈족과 연합하여 발해를 건국하였다. 발해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방, 연해주 지방 등지를 통치하였다. 『문헌 통고』에, 발해는 바로 고구려의 옛 땅 곧, 영주(營州)의 2천 리인데, 남쪽으로 신라에 접하여 이하(泥河)로 경계를 하였으며, 동쪽은 바다에 닿고 서쪽은 거란(契丹)이다.”하였다. 가탐(賈耽)의 『고금 군국지』에는, “발해국의 남해(南海)·부여(扶餘)·책성(柵城)·압록(鴨綠) 등 4부(府)는 모두 고구려의 옛 땅이다.”하였다.

발해에는 5경(京), 15부(府), 62주(州)가 있었다. 그 가운데 중경(中京) 현덕부(顯德府)와 동경(東京) 용원부(龍原府)는 지금의 요령성 일대를 아우르고 있었다. 발해가 멸망한 이후 고구려계 발해 유민의 일부는 고려로 귀의했지만 나머지는 만주를 지배했던 북방 민족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고려

발해가 망하자 요동 지역은 거란(契丹)에 흡수되었다. 거란이 옛 요동성을 수축하고 거주하면서 동평(東平)이라고 부르더니, 얼마 뒤에 남경(南京)으로 승격시키고 또 동경(東京)으로 고쳤다. 요(遼)는 요령성 지역을 동경 중경도(中京道)로 삼아 다스렸다. 현 내몽고자치주에 위치했던 고주 삼한현(高州三韓縣)은 고려와 거란의 전쟁 기간 붙잡혀 간 고려인 포로들의 집단 거주지였다. 1115년 건국한 금(金)은 요(遼)를 멸하고 요령성 지역에 동경 북경로(北京路)를 두었다. 1234년[고종 21] 금이 몽고에 의해 멸망되자, 요령성 지역은 원(元)의 요양행성(遼陽行省)의 지배를 받았다. 원과의 40여 년의 대몽항쟁의 결과 수많은 사람과 문화재가 피해를 입었다. 요령성의 요양, 심주(심양) 일대에는 고려인 포로들이 집단 거주하는 마을이 생길 정도였다. 1368년 명(明)이 들어서고, 1388년 고려의 요동 정벌이 추진되면서 명과 요령성 지역을 놓고 대립하기도 하였다.

조선

명(明)은 요령성 지역을 요동 지휘사(遼東指揮司)로 삼고, 아래에 2주(州), 25위(衛)를 두었다. 명이 요령성 지역을 장악한 시기에는 사신로(使臣路)로서 요령성 지역이 중시되었다. 사신로와 관련해서 현재 30여 종의 연행록(燕行錄)들을 조사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이후 명·청 교체기에 요령성 지역에서는 조선·명·후금(청) 삼국이 대립했던 ‘심하(深河) 전투’와 가도 사건(椵島事件)이 발생했으며, 가도 사건은 1627년 정묘 호란의 발단이 되었다. 정묘 호란과 병자 호란 때 약 50만 명의 조선인이 포로로 잡혀갔으며, 인조의 아들 소현 세자와 봉림 대군, 그리고 청과 척화(斥和)를 주장했던 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홍익한(洪翼漢) 등 삼학사 등도 심양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수많은 조선인 포로들은 고향에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며, 요령성 일대에서 삶을 영위했다. 그들은 족보를 만들며 뿌리 의식을 지켰고, 척박한 땅을 개간하여 처음으로 벼 농사를 요령성 일대에서 펼치기도 하였다.

청(清)은 초기에 흥경 특별 행정구(盛京特别行政區)로 삼았고, 후기에 봉천성(奉天省)으로 고쳤다. 1644년 청은 도읍을 심양에서 북경[北京, 혹은 燕京]으로 옮겼으나, 초기 수도가 흥경[건주]과 성경[심양]이었던 만큼 요령성 지역을 매우 중시하였다.

청은 건국 초기부터 왕조의 발상지라고 하여 요령성 일대에 유조변책(柳條邊柵)을 쌓아 출입을 통제하였다. 이로써 요령성 지역은 조선·청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이란 뜻으로 이후에 간도[間島, 서간도라고 불림]라고 불리게 되었다. 19세기 중엽, 철종 이후 양반과 관리의 학정과 수탈, 기근을 피해 조선인들이 이주하여 화전 등으로 밭을 일구거나 인삼 등을 채집하였다. 1885년 청이 조선인의 만주 이민 금지령을 철폐하면서 크게 증가하게 되었고, 청과 조선 사이에 국경 분쟁이 자주 발생하기도 하였다.

의의

전통 시대의 요령성은 한민족의 영광과 치욕의 역사를 잘 보여주고 있는 곳이다. 요령성의 조선족 이주사와 조선족 역사에 대해서는 그 기원을 고조선부터 보려는 설, 14세기 후반 원·명 교체기설, 17세기 초 명·청 교체기설, 19세기 중·후반설 등 다양하다. 요령성 지역은 신석기 시대부터 한반도의 북부 지역과 같은 문화권을 형성하며 교류해온 한민족의 활동 무대로서 고조선·고구려·발해 등 고대 국가가 자리한 곳이었다. 그러나 고려 이후 거란(契丹)에게 점령당하면서 금(金)과 원(元) 이후에는 다시 우리 소유가 되지 않은 채 압록강(鴨綠江) 일대가 마침내 천연적인 경계선이 되고 말았다. 요(遼)와 원과의 전쟁으로 인해 고려인 포로가 요령성 일대에서 생활하였고, 명·청 교체와 병자 호란 등으로 또 다시 조선인 포로들의 집단 거주가 이루어졌다. 이렇듯 한민족의 영욕사 이해 및 중국 조선족사의 정립을 위해 요령성 지역의 연구는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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