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분류

백두산 정계비

한자 白頭山 定界碑
중문 白头山定界碑
분야 역사/전통 시대|지리/인문 지리
유형 유적/비
지역 길림성  
시대 조선/조선 후기
상세정보
성격 비석
관련인물 목극등|박권
재질
크기 높이는 약 90㎝, 폭 약 60㎝
건립 시기/일시 1712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1년 7월 28일~29일
정의

조선과 청나라 양국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백두산에 세운 비석.

개설

백두산 정계비는 1712년(숙종 38년, 강희 51년) 조선과 청나라가 양국의 국경을 명확히 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청나라 오라총관(烏喇摠管) 목극등(穆克登) 등과 조선의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 등이 현지 답사를 하여 세운 비석으로 높이는 약 90㎝, 폭 약 60㎝이다.

비석이 세워진 위치는 백두산 천지에서 동남쪽으로 약 10리 떨어져 있는 압록강과 토문강 사이의 강원(江原)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1931년 7월 28일에서 1931년 7월 29일 사이에 사라졌다.

건립 경위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진 백두산은 한반도와 중국 사이에 우뚝 솟은 해발 고도 2,750m의 산이다. 역사적으로 청조와 우리 한민족의 발상지이며 그러한 이유에서 영산(靈山)으로 존숭되어 왔다.

장백산(長白山)[중국 측 백두산에 대한 이칭] 동쪽 포고리산(布庫哩山) 아래에 포륵호리(布勒瑚里)라는 연못[현재 두만강 발원지 부근에 있는 원지(圓池)]이 있는데, 중국은 청을 건국한 여진족의 조상이 발상한 곳으로 「만주실록(滿洲實錄)」 제1권에 기록하고 있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는 조선을 건국한 이조(李朝)[이성계의 5대조 목조(穆祖)]가 정착하여 살았던 곳이 백두산 부근 두만강 동쪽 알동(斡東)[경흥(慶興)의 동간도(東間島) 지방]이라 기록하고 있으며, 영조(英祖)조부터는 백두산을 조상이 발상한 영지로서 숭앙해왔다.

청의 강희제(康熙帝)는 「대청일통지(大靑一統志)」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조상의 발상지인 백두산의 지리가 분명하지 않고, 조선과의 경계 역시 불분명 하기 때문에 조선과의 국경을 분명히 하기 위해 백두산 답사를 명하였다.

1677년(강희 16년) 내대신 각라무묵눌(覺羅武默訥) 등이 휘발하(輝發河) 방면에서 백두산의 서북면 일부를 답사한 것이 1차 였다. 1684년(강희 23년) 서남 방면 시찰을 위한 2차 답사가 행해졌는데, 조선인으로부터 난을 당하여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1710년(강희 49년) 조선인 이만지(李萬枝) 등이 청나라 사람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황제는 이 사건에 대하여 조사하는 동시에 조선과의 경계를 살피도록 은밀하게 분부하여 3차 답사가 행해졌다.

다음 해인 1711년 강희제는 관리를 파견하여 의주(義州) 방면에서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 토문강을 조사하라는 명을 내렸으며, 청은 조선의 사신이 접반할 것을 명하는 통첩을 보냈다.

1712년 청은 오라총관 목극등을 파견하였고, 조선 측에서는 박권 등을 접반사로 명하여 청과 함께 백두산을 답사하도록 하였다. 양국의 답사를 통하여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게 되었다.

위치

백두산 정계비는 백두산 천지로부터 동남 기슭으로 약 10리[3,927.27m]가 되는 지점, 압록강과 토문강의 강원(江原) 사이 평탄한 안부에 세웠다.

형태

백두산 정계비는 높이 약 3척[90.9㎝], 폭은 약 2척[60.6㎝]이며 돌로 만든 비석이다.

금석문

大淸

烏喇摠管穆克登

奉旨査邊至此審視

西爲鴨綠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勒石爲記

康熙五十一年五月五日

蘇爾昌筆貼式通官二哥

朝鮮軍官李義復趙台相

差使官許樑朴道常

通官金應瀗金慶門

현황

백두산 정계비는 1712년 세워졌으나, 1931년 7월 28일에서 1931년 7월 29일 사이에 사라졌다.

의의와 평가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진 이후 조선과 청나라 양국 사이의 영토 분쟁이 일어나면 백두산 정계비의 비문 내용은 중요한 단초가 되었다. 특히 1869년, 1870년 대흉년으로 관북 지방을 넘어 간도로 향하는 월경민이 다수 발생하여 간도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韓人)이 2만여 호에 달하였으며 그들에 대한 청국 관리들의 침탈과 학대가 심하였다. 조선 정부에서는 한인을 보호하기 위해 토문강을 경계로 청과의 국경 회담을 두 차례 열게 되었다.

1885년과 1887년 이중하(李重夏)는 토문 감계사(土門勘界使)로 임명되어 청과 회담을 열었으나, 청측은 토문강과 두만강[도문강(圖們江)]이 같은 강이라는 일강설(一江說), 조선 측은 토문강과 두만강이 다른 강이며, 토문강은 황화송구자(黃花松溝子)[현재의 이도강(二道江)]라는 이강설(二江說)을 고수하여 두 차례의 회담은 결렬되었다. 2차 감계 회담에서는 회담의 내용을 바탕으로 『백두산 정계비 지도 (白頭山定界碑地圖)』[奎軸26675, 서울 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소장]를 작성하였다.

정계비 비문의 내용 가운데 ‘동위토문(東爲土門)’의 '토문'에 대한 해석은 여전히 분분하며, 중국은 토문을 두만강으로 해석하여 두만강 이북의 영토를 중국의 영역으로 주장하고 있다. 일본은 청으로부터 남만주안봉선(安奉線) 철도 부설권을 획득하는 대가로 이러한 해석을 바탕으로 1909년 9월 청측과 간도 협약을 맺어 현재의 국경을 정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숙종실록』
  • 『통문관지(通文館志)』
  • 『유하집(柳下集)』
  • 이시욱,「1960년대 만주 활극 연구 : 액션 영화의 활극성 문제를 중심으로」, (『한국 예술 연구』(창간호), 한국 예술 종합 학교 한국 예술 연구소, 2010)
  • 이선근, 「백두산과 간도 문제回想되는 우리 疆域의 歷史的 受難」(『역사 학보
  • 학』17·18, 역사 학회, 1962)
  • 김용국, 「백두산고」(『백산 학보』 8, 백산 학회, 1970)
  • 류봉영, 「백두산 정계비와 간도 문제」(『백산 학보』13, 백산 학회, 1972)
  • 김경춘, 「조·청 국경 문제의 일시점」, (『경주 사학』6, 동국 대학교 사학회, 1987)
  • 신영길, 「백두산 정계비」(『상서』13권, 한국장서가회, 1995)
  • 문상명, 「고지도에 나타난 백두산 및 백두산 동북부 하천」(성신 여대 박사 학위 논문, 2012)
  • 篠田治策, 『白頭山 定界碑』(樂浪書院,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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