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자 映畵
중문 电影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길림성  
시대 현대/현대
정의

일제 강점기 이후 만주에서 제작되었거나 보급된 조선인 영화.

만주 사변 이전

동북 3성에서 처음으로 상영된 영화는 1920년에 외지 상인들이 돈화에서 상영한 흑백 무성 영화 「채플린」이었다. 그 뒤 1927년 용정과 연길 등지에서 나운규 감독의 데뷔작인 무성 영화 「아리랑」이 상영되었다.「아리랑」은 1926년 10월 서울의 단성사(團成社)에서 개봉되어 민중들에게 일대 충격을 안겨준 혁명적인 영화였다.

이 영화는 당시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항일 민족 정신을 담았을 뿐만 아니라 작품 또한 영화 사상 초유의 예술성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만주에는 이보다 뒤늦게 들어왔지만 영화는 재만 한인들에게도 크게 유행 하였다. 독립운동가 김약연이 “우리 명동 중학교 학생 나운규가 조선 영화계의 명인으로 되었소!”라며 기뻐하였다고 한다.

‘만주국’ 당시의 ‘조선 영화’

1930년대 말에서 1940년대 초 만주에서 상영된 ‘조선 영화’는 자세하지는 않지만, 주로 대봉 극장·대승 극장·장춘좌 등에서 상영되었다. ‘조선 영화’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조선 총독부의 후원으로 제작되었던 내선 일체 선전 영화 「지원병」과 「그대와 나」는 대형 일류관인 조일좌에서 개봉되었다. 또한 만주 영화 협회와 합작한 「복지만리」가 ‘조선 영화’ 중 가장 많은 영화관에서 개봉되었다. 1940년에 만주 영화 협회는 전창근이 각색한 조선 영화 「복지만리」를 협조 촬영하였는데, 당시 영화 주제가인 「격정 시대」는 청년들에게 널리 불려졌다.

만주에서 상영된 조선 영화 중 가장 오랜 기간에 걸쳐 여러 번 재개봉된 영화는 「장화 홍련전」이다. 조선에서보다 만주에서 더 큰 인기를 누렸다. 만주에서 ‘조선 영화’가 상영되는 일이 드물었던 것도 이유였겠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장화 홍련전」의 인기는 각별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조선족 영화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조선족 출신의 영화 감독, 영화 배우들이 배출되었고 한글 시나리오도 창작되었으며, 농촌 이동 영사대와 조선어 영화 대역 등이 조직되었다. 1949년 동북 영화 촬영소는 조선족과 한족 출신의 여전사 8명이 목단강에서 죽음으로써 일제에 저항한 이야기를 「중화의 딸」이란 제목으로 영화를 제작하였다.

「중화의 딸」은 1950년 4월 북한에서 뿐만 아니라 「유결대의 딸」이란 제목으로 인도네시아에서도 상영되었다. 「중화의 딸」은 이러한 호응에 1950년 7월 체코에서 열린 제5차 세계 영화 축전에서 ‘자유 투쟁상’을 수여하였다.

1958년 이홍규·황봉룡·최형동·최현숙 등이 창작한 시나리오 「봄우뢰」가 영화로 제작되었다. 장춘 영화 촬영소는 1959년에 왕가율 감독의 「김옥희」를 제작하였고, 1960년에는 우체국 배달원의 삶을 주제로 한 「기러기」를 세상에 내놓았다.

아울러 조선족의 약사와 생활을 반영한 「환난 속에서 사귄 벗」·「빙상 위에 피어난 진달래」 등을 제작하였다. 중앙 시보 기록 영화 촬영소는 집단 농장의 성취를 소개하는 기록 영화 「새 중국의 첫 번째 집단 농장-성화 집단 농장」[1953]을 제작하였다.

1950년 6·25 전쟁 이후에는 전쟁을 다룬 영화들이 제작되었다. 8·1 영화 촬영소는 1965년 연변 가무단의 무용수 이송죽이 출연한 「침략자를 타격」을 제작했다. 이송죽은 「빙상 위에 피어난 진달래」에서 항일 전사로 출연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한국의 고유 무용을 영화로 제작하기도 했다. 1955년 중앙 시보 기록 영화 촬영소가 연변 가무단의 「부채춤」을 「즐거운 가무」로, 1957년에는 「물동이춤」을 「민간 무용」으로, 1964년에는 동방 가무단의 최미선의 독무 「장고춤」을 「꽃나비」로, 그해 전국 소수 민족 군중 과외 예술 축전에서 연변 대표팀이 공연한 「황가물을 싸워 이긴 처녀들」이란 작품을 「송이송이 붉은 꽃 태양 따르네」로 제작하여 완벽한 기록 영화로 탈바꿈 시켰다.

‘문화대혁명’ 시기 조선족 영화

1966년 ‘문화대혁명’ 당시 연변 영화 공사에 보관되었던 많은 영화 필름이 유실되었고 영화 선전차가 파괴 되었다. 중국과 외국의 대다수 영화가 상영 금지되었고 870여 부의 한글 번역 대본이 ‘독초’로 취급되어 사라져 버렸다.

‘문화대혁명’ 초기에는 주로 모택동이 홍위병을 접견하는 기록 영화가 제작되었고, 1969년에는 선전 영화인 「붉은 신호등」·「사가퐁」 등이 제작되었다.

1971년 ‘문화대혁명’이 약화되면서 조선족들의 문화 생활을 담은 「꽃 파는 처녀」·「남강 마을의 여성들」·「꽃피는 마을」·「사과 딸 때」 등이 제작되어 관객들의 높은 호응을 받았다.

이 가운데 「꽃 파는 처녀」는 1972년 10월 연길에서 상영되었는데, 용정·도문·화룡·안도와 왕청 등지의 많은 관람객들이 몰려 연길로 오는 버스는 초만원이었고 영화관 앞은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새로운 역사 시기의 조선족 영화

‘문화대혁명’ 이후 영화 예술 창작에서도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1982년 연변조선족자치주 30주년을 맞아 연극 「축배」를 각색한 영화「첫봄」이 제작되었다. 「첫봄」은 중국이 건국된 이후 처음으로 시나리오·작곡 뿐만 아니라 모든 배역을 조선족이 맡아 제작된 영화였다. 작자 최정연은 ‘문화대혁명’ 이후 질곡에서 벗어나 개혁의 봄바람을 타고 부유함으로 나아가고 있는 조선족의 삶을 담아내고자 했다.

한편, 중앙 시보 기록 영화 촬영소는 연변조선족자치주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기록 영화 「연변의 봄」[6권]을 제작하였다. 이 영화는 연변의 아름다운 자연 풍경과 조선족들의 행복한 생활을 진실하게 담아냈다.

이후 조선족들이 쓴 시나리오가 많이 발표되어 영화 창작의 길을 넓혀주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윤일지·임효원의 「해란강 환상곡」, 김훈의 「민들레꽃」·「어머니 시름 놓으세요」, 황봉룡의 「산귀신」, 한원국·김덕순·권세윤의 「양해하시라 신랑이여」, 유순호의 「숲속의 메아리」, 이선호의 「논보라를 헤치고」 등이 있다.

이 시기 조선족 영화 예술의 또 하나의 특징은 유명한 영화 작곡가, 영화 녹음사, 인기 배우 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김정평·이영걸·허창석 등을 꼽을 수 있다. 특히 배우 김염은 1930년대 최고의 배우로서 「도화읍혈기」·「야초한화」·「대로」·「장지릉운」 등에 출연하였다. 그는 상해 인민대표대회 대표, 중국 영화 작가 협회 이사로 활동하는 등 중국의 일급 배우로 임명되었으나, 문화대혁명 기간에 수용소에 들어가 어려운 생활을 했다. 그 뒤 수용소에서 나와 투병 생활을 하다가 1983년 12월 상해에서 생을 마쳤다.

1983년부터 텔레비전과 VTR이 보급되어 대중 문화가 다채로워지면서 영화 산업은 하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1985년 이후 여러 개혁 조치에 영화 산업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1989년 연변에서 상영된 35㎜ 영화가 184편 정도였는데 각 영화관에서는 월 평균 15편의 새로운 영화가 상영되었다. 16㎜ 영화는 한 해에 75편 정도가 상영되었다.

참고문헌
  • 북경 대학 조선 문화 연구소, 『예술사(중국 조선 민족 문화사 대계; 3)』민족 출판사, 1994
  • 김려실, 「조선 영화의 만주 유입 : 『만선 일보』의 순회 영사를 중심으로」(『한국 문화 연구』32, 2007)
관련항목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