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한자 演劇
중문 话剧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연극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0년대 이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4년 전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0년대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6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6년 1월-12월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7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0년대 중반
정의

중국 동북 3성 조선족 출신의 배우가 무대 위에서 관객에게 어떤 대사나 행동으로 보여 주는 종합 예술.

조선족 연극의 시작과 1920년대 대중 연극

조선족의 다른 문화 예술과 마찬가지로 연극도 한인이 한반도에서 만주로 이주한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 1900년대 이전까지는 유랑 연예인단 및 전문 소리꾼에 의해 한반도의 전통극 가운데 가면극·인형극·그림자극·판소리 등이 전개되는 정도였다.

그 뒤 조선족 연극은 1914년 전후 용정·연길 등지에서 공연된 신파극 「신 가정」·「미신 타파」 등으로 시작되었다. 이는 민권 자유와 남녀 평등, 자유 혼인 등을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당시만 해도 전문 극단이 공연하였다기보다는 단지 문학 청년들이나 학교 학생들의 과외적인 활동에 불과하였다.

1920년대에 들어서 조선족 연극은 창극, 신파극 시대를 거쳐 근대극으로 나아가기 시작하였다. 한반도의 영향보다는 중국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아 반제 반봉건의 대중적인 연극 활동이 주류를 이뤘고 간혹 반일 내용의 연극도 공연되었다.

당시 연극 활동이 빈번하였지만 직업 연극인이나 전문 연극 단체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대부분 진보적인 문인들과 학생들에 의해 창작, 공연되었다. 용정대성 중학교의 ‘문우사’, 광명 중학교의 ‘예우사’ 등의 문예·연예 단체가 있었고 ‘황금좌’와 ‘애국호’ 등의 연극 단체가 활동하였다.

당시 연극들은 대개 봉건 지주 계급의 압박, 착취의 잔인성과 비인간적 행위의 폭로를 비판하면서 가난한 농민들의 비참한 운명과 그들의 자연 발생적인 반항 투쟁을 보여주고, 일제에 대한 증오와 항일 정신도 표현되었다. 전통 고전극도 많았는데, 창작극으로는 「경숙이의 마지막」·「야학으로 가는 길」·「이렇다」·「파랑새」등의 작품이 공연되었다.

1930~1940년대의 항일 연극

1930년대부터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의 연극은 주로 항일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 연극은 단순한 문학 창작만이 아니라 대중들을 교양·선동·궐기시키는 투쟁의 한 수단이었다. 주로 항일 근거지나 유격구에서 연극이 공연되었다. 연극을 통해 망국의 설움을 토로하고 민족적 울분을 불러일으켰으며 착취 사회의 죄악을 폭로하곤 하였다.

특히 항일 연극은 항일 무장 투쟁에 적극적은 역할을 담당하였을 뿐 만 아니라 조선족 연극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당시 연변 지구에서 많은 작품들이 창작, 공연되었지만 전해지는 원본은 몇 편 되지 않는다. 「4·6제」·「아버지와 아들을 찾는 사람들」·「엿물벼락」·「게다짝이 운다」·「경축대회」·「혈해지창」·「싸우는 밀림」 등이다.

이들 작품들은 대개 항일을 주제로 하면서도 혁명적 영웅의 창조가 주된 것이었다. 기동력이 있는 소형 연극이 많았지만 장막극도 더러 있었다. 대부분 완전한 형태를 갖추지 못한 채 무대에 올랐고 예술적인 면에서 미흡한 점이 많았다.

해방 후 연변 문예 공연단 활동

해방 후 연변 지역의 연극은 전례 없이 활기를 띠었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기 전까지 연변에서 86편의 연극이 공연되었을 정도이다. 「평강 공주」·「이향 아리랑」·「풍장」·「승리의 혈사」·「상해의 밤」·「토성」·「파몽기」·「적」등의 장막극과 「호가장 전투」·「꼬맹이의 참군」·「아침은 밝았다」·「파업」 등의 단막극 등이 공연되었다.

이 시기의 연극은 전문적인 단계로 나아가는 과도기였다. 당시 길림 구국군에 소속된 조선족 문예 공작대가 연변 문공단으로 개편되었고, 이어 흑룡강성의 노신 문공단의 조선족대가 이에 편입되면서 10여 명으로 구성된 연변 문공단이 연극 활동을 전개하였다.

연변 문공단의 초창기 공연은 소련 번역극 공연이었지만 점차 창작극이 무대에 올려졌다. 이에 연변식의 새 연극 「삼노인」 형식이 창조되었다. 「삼노인」은 노인 세 명이 등장하는 극으로, 개명한 노인, 동요하는 노인, 보수적인 노인이 각기 자기 견해에 따라 쟁론하다가, 동요하는 노인이 개명한 노인의 견해에 동조한 뒤에 보수적인 노인을 설득하여 마음을 바꾸도록 하는 형식의 연극이다. 흥미로운 형식으로 꾸며져 조선족 관객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당시 주요 작품으로는 「울우리 조장 동무」·「새각시」·「완두씨」·「물남에서 온 영감」·「봄철에 생긴 일」·「백양나무 아래에서」·「백약이 무효」 등이 있다. 연길에서는 조선 고전극 「흥부전」·「양반전」·「임꺽정전」 등이 공연되어 관객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다른 지역에서도 창작극이 많이 공연되어 해방된 기쁨을 노래했고, 6.25 전쟁 당시에는 소위 ‘항미 원조’와 관련한 연극도 공연되었다.

흑룡강성의 김태희·황봉룡·최수봉·원주삼·정인덕·광정희·이명희 등의 극작가와 배우들이 활동했고, 통화 출신의 최정연·주선우 등의 극작가들과 연변의 홍성도·윤지헌·차창준·박응조·김세형 등이 두각을 보였다.

연변 연극단 창단과 연극 활동

1956년 연변 연극단이 창단되면서 본격적으로 연극 활동이 시작되었다. 중국 정부는 연변 가무단의 연극부와 연변의 기타 지역, 그리고 흑룡강 지구의 연극 애호가들을 불러 모아 연변 연극단을 설립하였다. 연변 연극단은 민족 언어 예술의 한 몫을 담당하고 조선족 관객들을 위한 연극 문화를 널리 보급, 발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창단 작품인 전통극 「춘향전」은 1956년 1월부터 연말까지 12개월 동안 50여 회 공연되었고 관객수만도 4만여 명에 달했다. 1957년에는 전통극 「심청전」을 공연하였는데, 장롱 깊숙이 간직해온 새 옷을 입고 극장으로 찾아온 여인에서부터 아기가 울까봐 수면제를 먹인 뒤 업고 나온 새색시도 있었다. 어느 노인은 수십 리를 손수레를 타고 와서 구경하고는 살아 생전에 소원을 이뤘다며 기뻐하기도 했다 한다.

이렇듯 조선족의 아름다운 전통 미덕과 애틋한 사랑, 그리고 지극한 효성을 그린 연극은 당시 조선족 관객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고 연변 연극단 배우들은 여느 배우들보다 인기가 높았다. 특히 이 「춘향전」으로 중국 제1회 연극 콩쿠르에 참가하여 좋은 성적을 거둠으로써 연변 연극단은 중국 소수 민족 연극단으로서 굳건히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1950~1960년대 연극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 조선족의 연극 형세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당시 중국 대도시에서는 훌륭한 연극들이 많이 공연되었고 관객들도 급증하였지만, 연변 연극단에는 극작가가 매우 부족한 실정이었고 전통극도 한계를 노정하였다. 「춘향전」·「심청전」을 뛰어 넘는 전통극을 올리는데 어려움이 뒤따랐고 창작극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연변 연극단은 조선족 연극단을 대표하는 단체였지만 하나의 소수 민족 극단에 불과했다.

이에 연변 연극단은 중국의 명작가들이 창작한 극을 번역한 「서망장안」·「뇌우」·「홍기보」·「붉은 바위」 등의 작품을 공연하여 그나마 조선족 관객들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이외에도 구 소련의 「의사 보로위요브」, 알바니아의 「어부의 집」 등 외국 작품도 번역, 공연하기도 했다.

1970~1980년대

1970년대에 들어서 전통극으로는 겨우 「춘향전」이 다시 공연되는데 그쳤고, 창작극으로는 「백산의 봄우뢰」가 맥을 이었을 뿐이다. 이후 중국의 여덟 가지 본보기극 중의 번역극인 「붉은 신호등」·「위호산을 지혜롭게 탈취」·「두견산」 등이 무대에 올랐다.

이어 공연된 번역극 「단풍잎이 붉어졌을 때」·「침묵 속에서」·「고요한 야밤」 등은 ‘문화대혁명’의 상처를 받은 조선족들의 상처를 치유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1976년 중국의 대장정을 그려 중국 전역에서 공연된 장막극 「만수천산」이 공연되었는데, 이는 사회적·경제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중국 정부의 개혁개방이 이루어지면서 상황이 많이 나아져 문화 예술의 창작이 활성화되고 조선족들의 민족 문화에 대한 관심도 높아져 연극 창작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에 다시금 전통극에 관심이 쏠려 「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가 무대에 올랐고 「심청전」을 재공연하게 되었으며, 혁명 연극 「성황당」이 공연되었다. 뿐만 아니라 창작극도 성황을 이뤘다.

1981년에 창작된 장막극 「눈 속에 핀 꽃」은 대성황을 이뤘고 이 작품으로 작가는 전국 소수 민족 문학상을 수여하였다. 「배우와 강도」 ·「도시+농민」 등의 연극도 수많은 조선족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들였다.

조선족 연극의 위기

1990년대는 전국적인 연극 위기 상황이 발생했다. 그럼에도 연변 연극단은 장막 통속극 「털 없는 개」를 무대에 올려 무려 2년간 400여 회의 공연을 기록함으로써 중국 전역을 놀라게 했다. 그 결과 중국 정부로부터 ‘문화부 새 극목상’을 수상하였고, ‘92 상해 국제 희극 연구 토론회’에 초청되어 특별 공연을 하였으며 작가는 조선족 작가로서는 유일하게 ’조우(曹禺) 문학상‘을 수상했다.

이외에 장막극 「사랑의 품」은 3개월 동안 117회 공연 기록을 돌파하여 중국 연극 시장에 큰 파문을 일으켰고, ’94 전국 연극 콩쿠르‘에 참가하여 문화부의 새 극목상을 수상했다. 이에 당시 중국 연극 협회가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연변 연극단에 와서 세미나를 열기도 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하강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고, 2000년대에 들어서 조선족 연극은 큰 위기에 봉착했다. 많은 투자를 필요로 하는 전통극은 공연되지 못했고, 연극 한 편도 보기 힘들게 되었다.

더욱이 연변 연극단은 창단 50주년에 이르는 시점에 연변 가무단에 귀속되고 말았고, 현재는 연극 지망생들도 눈에 띄게 줄었다. 민족의 얼을 지키고 민족의 언어 예술을 지키는 연변 조선족 연극인들의 연극 부활의 꿈은 다시 이뤄져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 김운일, 『중국 조선족 연극사』(신성 출판사, 2006)
  • 북경 대학 조선 문화 연구소, 『예술사(중국 조선 민족 문화사 대계; 3)』민족 출판사, 1994
  • 방미선, 「연변 조선족 연극의 회고와 현실 상황」(『드라마 연구』 25, 한국 드라마 학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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