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개방

한자 改革 開放
중문 改革开放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정책
관련인물/단체 덩샤오핑/중국 공산당 중앙 위원회
정의

198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에 따른 조선족의 변화 양상.

역사적 배경

1978년 12월 중국 공산당 중앙 위원회 제11기 제3차 전원 회의에서는 개혁개방 정책의 실행을 결의하였다. ‘문화대혁명’ 기간과 이전의 좌편향의 과오를 비판 시정하고 ‘조절·개혁·정돈·재고’의 방침과 ‘대내적으로 경제를 활성화하고 대외적으로는 개방’하는 방침을 제정하였다.

이후 조선족 사회는 중국 정부의 개혁개방 정책에 발맞추어야 했고, 이는 조선족들의 경제·문화 교육·민족 의식 등에서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198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조선족 사회는 전대미문의 충격을 받았다. 중국은 점차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되었고 경제 발전이 날로 가속화됨과 동시에 큰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200만 조선족 사회도 이에 따라 변화의 길을 모색해야만 했다.

경과

조선족 사회는 이주 초기부터 100여 년 동안 벼농사 중심의 농업에 안주하고 살아왔다. 조선족 전 인구의 80% 이상이 단일한 벼농사에 종사해왔다. 그러나 개혁개방 이후 제한된 땅에서 얻는 수확으로는 예전처럼 잘살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조선족들은 현지 자원을 이용하여 농림 어업과 목축업을 발전시키거나 향진 기업(鄕鎭企業)을 세우고 시장 소매, 음식점 경영 및 기타 사업으로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 결과 1차 산업이 1980년 23.6%에서 1997년에는 16.8%로 감소한 반면에 서비스업인 3차 사업은 25.2%에서 41.6%로 증가하였다. 농업 수입이 차지하는 비율도 점차 낮아졌다. 개혁개방 이전 조선족의 사회적 지위는 상당히 높은 편이었고 이미지도 좋았다. 본래 조선족은 1인당 월 평균 수입이 300~500 위안 씩 높았지만, 개혁개방 시기에 이르러서는 농업 부문의 단일 경영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해 중국 내 전체 농촌 월수입 평균치와 비슷한 2,858원에 그쳤다.

반면 젊은이들은 선조들이 개척한 삶의 보금자리를 떠나 새로운 기회를 찾아 도시로 진출하였다. 1980년대 도시로 진출한 조선족 농민들이 제일 많이 선택한 생업이 김치 장사였다. 적은 자본으로 시작할 수 있는 이점도 있었지만, 도시에서 상대적으로 집중되지 못하고 보다 넓은 지역으로 분산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김치 장사로 번 돈은 대부분 다시 요식업에 재투자되었다. 그들이 도시에서 선택할 수 있는 직업에는 한계가 있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국의 개혁개방은 점점 심화되었고 1992년 한중 수교가 체결되면서 조선족 사회는 새로운 기회를 접하게 되었다. 이전보다 더 많은 조선족들이 부(富)를 찾아 고향을 떠났다. 한국 경제인들의 중국 진출 붐을 타고 조선족들은 북경(北京)·천진(天津)·심양(瀋陽)·대련(大連)·청도(靑島)·상해(上海)·광주(廣州) 등지의 연해 개발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그들은 주로 한국 관련 회사나 공장의 노동자, 회사 직원으로 채용되거나 한국인을 상대로 하는 유흥업소, 여행사 등의 업소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1996년 말의 조사에 따르면 북경시 인구의 0.4% 정도의 조선족이 가라오케, 나이트클럽 등 북경시 유흥업소의 66%를 운영하였다.

1990년대 이후 이농 현상은 한국으로의 노무 이민 붐이 일어난 것이 주요 원인이다. 농촌에서 한 해 동안 힘들게 번 소득이 한국에 가서 벌어온 수입의 10분의 1을 밑돌 정도였기 때문이다. 이에 수많은 조선족 농민들은 ‘코리아 드림’의 유혹에 이끌려 한국으로 몰려갔다. 그러나 외국인 노무자의 불법 체류가 사회 문제로 떠오르면서 조선족들의 한국 입국은 점점 어려워졌다.

조선족들은 어려워진 한국 입국을 위해 브로커들에게 가족의 전재산과 친지들의 담보로 융자 받은 돈, 미화 6천 달러 내지 1만 달러의 수수료를 건네고 ‘기회의 나라’ 한국으로 건너왔다. 여기에서 악덕 브로커들의 사기가 빈발하여 한때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와 함께 조선족 여성들 사이에서는 한국 남성과의 결혼이 유행하였다. 한국 남성과의 결혼은 조선족 여성들이 보다 쉽게 ‘코리아 드림’을 현실화할 수 있는 합법적이고도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다. 2000년 말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까지 6만 여 명의 조선족 여자들이 한국으로 시집을 왔다. 그만큼 조선족 사회에서는 농촌 총각들이 그만큼 늘어만 갔고, 조선족 인구도 줄어들어 1999년 말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조선족 신생아 출산수는 10년 전보다 75%나 줄어든 3,800여 명에 불과하였다.

특히 연변조선족자치주의 경우 1996년부터 조선족 인구가 감소하고, 그 자리를 한족이 메꾸면서 한족 거주자 비율이 늘어나고 있다. 그 대신 조선족의 비율은 1997년 39.18%에서 2000년에 38.55%로 줄어 들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내에서 조선족의 비율이 절반을 넘었던 연길시(延吉市)·도문시(圖們市)·용정시(龍井市)·화룡시(和龍市) 조선족의 인구가 연길시를 제외하고는 모두 감소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개혁개방 이후 조선족 농민들의 중국 내 대도시 유출과 한국 진출의 여파로 ‘문화 영토’였던 조선족 마을의 공동화(空洞化)가 가속화되고 있다.

참고문헌
  • 임채완, 장윤수, 최영관, 이진영, 최영표, 김재기, 『재외 한인 집거지역 사회 경제』(집문당, 2005)
  • 황유복, 『개혁개방 30년 이래 조선족 사회의 변화와 발전』(민족 출판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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