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獨立運動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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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일제 강점기에 동북 3성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인물.
연변 지역은 일찍부터 북간도(北間島)라고 불렸던 지역으로 1860년 이후 함경도 지역의 한인들이 경제적 이유로 인하여 다수 이주한 곳이었다. 그 후 1905년 을사 늑약 이후 국권 회복을 위하여 정치적 망명객들이 줄지어 이곳으로 이동하면서 연변 지역은 항일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구한말에는 용정(龍井)을 중심으로 이상설(李相卨) 등이 최초의 민족 학교인 서전 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는 것을 시작으로 민족 학교 설립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연변 각지에는 수많은 민족 학교들이 설립되어 독립군을 배출하는 근간이 되었다. 1910년대에는 간민회(墾民會)·중광단(重光團) 등 한인의 자치 기관이면서 독립운동을 병행하는 단체들이 등장하여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간민회는 1913년 4월 인가된 북간도 지역의 대표적인 항일 독립운동 단체였는데, 주요 간부로는 김약연(金躍淵)·김영학(金永鶴)·정재면(鄭載冕) 등을 들 수 있다.
1919년 3·1 운동 때에는 용정 북쪽의 서전 대야(瑞甸大野)를 중심으로 많은 동포들이 만세 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18년 제 1차 세계 대전이 종결되면서 독립운동의 새로운 기운이 도래하자 김약연을 비롯한 북간도 지역 민족 지도자들은 독립 선언을 계획하고 마침내 1919년 3월 13일 용정에서 대규모 독립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북간도 3·13 항일 독립운동은 1910년대 북간도 지역 독립운동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수많은 민족 교육 기관에서 배출한 학생들의 참여는 이 독립운동을 더욱 확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3·13 항일 독립운동 중 48명이 부상 당하고 94명이 체포되었으며 19명이 희생되었다.
그 후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 독립군(大韓獨立軍)·대한국민회군(大韓國民會軍)·북로 군정서(北路軍政署) 등이 조직되어 봉오동 전투·청산리 전투 등을 승리로 이끌기도 하였다. 대한국민회군은 1920년 봄에 결성되었는데 대한 국민회 회장 구춘선(具春先), 부회장 서상용(徐相庸)의 직할 독립군 부대로 왕청현(汪淸縣) 지인향(志仁鄕) 의란구(依蘭溝)에 있었다. 사령관에 안무(安武), 부관에 최익룡(崔翊龍), 중대장에 조권식(曺權植)·임병극, 향관에 김석두·허동규가 임명되어 병사를 모집, 강력한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
북로 군정서는 북간도 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단체로 서일(徐一)·김좌진(金佐鎭) 등 대종교(大倧敎) 신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만주 지역의 대표적인 무장 독립운동 단체였다. 1920년 6월경 대원이 약 500명이었고, 군총 약 400정, 권총 약 150정, 그리고 다수의 수류탄으로 무장하였다. 국민회군(國民會軍) 은 1920년 5월 홍범도(洪範圖)의 대한 독립군 및 최진동(崔振東)의 군무 도독부(軍務都督府)와 연합하여 대한 북로 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를 결성하고,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 참전하였다.
청산리 전투는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 사이에 청산리 일대에서 홍범도의 연합 부대와 김좌진의 북로 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이 연합하여 백운평 전투를 비롯하여 10여 차례 일본군과 싸운 전투다.
민족 종교인 대종교와 관련해서는 나철 등을 꼽을 수 있다. 나철(羅喆)은 1916년 황해도구월산에서 자결한 후 그의 유언을 받들어 그해 10월 안장하였으며, 김교헌(金敎獻)은 1923년 영안현 남관 총본사에서 병사한 후 이듬해 1월 유해를 안장하였고, 서일은 1921년 밀산에서 자결한 후 1927년 청파호로 이장하였다.
1930년대에는 대전자령 전투 등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만주 사변 이후에는 동북 항일 연군의 활발한 활동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대전자령 전투는 한국 독립군이 1933년 중국군과 연합하여 일본군을 물리친 대표적인 전투를 일컫는다.
당시 일본군의 추격으로 노모제하[老母諸河; 현재 명칭하하]에 도착한 이청천(李靑天) 등 한중 연합군은 1933년 7월 대전자령의 지형을 이용하여 전투 준비를 갖추었다. 20리나 되는 험준한 골짜기는 수백 미터나 되는 절벽이 솟아있는 깊은 밀림 지대였는데, 이곳에 매복하고 있던 독립군은 진격해오는 일본군을 단시간 내에 격파하였다. 이를 대전자령 전투라고 한다. 대전자령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 1개 연대를 완전히 섬멸하였고, 군복 3천벌, 군용품 2백여 마차분 등 막대한 전리품을 획득하였다.
이처럼 구한말부터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연변 지역은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대표적인 항일 운동 기지였다. 그것은 이곳에 다수의 한인들이 거주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길림 지역은 북만·남만·동만의 중심에 있고, 교통도 편리하였으며, 일본의 영향력도 덜 미치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했던 지역이다. 이 지역에서 3·1 운동 당시 김교헌 등 39명의 민족 운동가들은 무오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한국 독립운동 사상 의열 투쟁으로 널리 알려진 의열단(義烈團)이 창건된 곳 또한 이곳 길림이다. 또한 1926년 4월 5일에는 정이형(鄭伊衡) 등을 중심으로 고려 혁명당(高麗革命黨)이 창당되기도 하였다.
손정도(孫貞道)는 길림성 밖 조양문 근처 삼풍잔이라는 간판을 단 여관 가까이에 교회를 설립하여 목회 활동을 하였다. 손정도는 평남 강서군 출신으로 감리교 신학 대학을 졸업하고, 1911년 안수목사가 되어 1921년 길림으로 온 이후 우마항(牛馬行)에서 조선인 교회를 세우고 전도 사업을 전개하였다. 또한 길림 농업 호조사 등을 조직하여 재만 한인의 권익 신장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안창호(安昌浩)는 1927년 2월경 북경을 거쳐 길림으로 오게 되었다. 그 뒤 안창호는 5백여 명의 동포들을 대동 공장에 집결시켰다. 장작림(張作霖) 군대 수백 명이 공장 둘레를 포위하여, 정탐꾼의 고자질로 300여 명이 체포되어 길림 감옥으로 압송되었다. 증거 부족으로 투옥되었던 사람들은 두 달이 못되어 모두 석방되었다.
길림시 파호문(巴虎門)에 있는 반씨 객점은 원래 중국인 반씨가 운영하던 여관이었는데, 1919년 11월 9일 이곳에서 의열단이 창립되었다. 단장으로 추대된 김원봉(金元鳳)·이종암(李鍾巖)·윤세주(尹世胄)·강세우(姜世宇) 등 13명이 참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흑룡강성은 범위가 매우 넓기 때문에 남부, 하얼빈 등으로 나눠 독립운동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흑룡강산 남부에 위치한 해림시(海林市)는 목단강시(牡丹江市)의 위성 도시이다. 1920년대 이후 한인들의 이주가 급증하면서 해림시에도 새로운 한인 사회가 형성되었다. 해림 지역이 독립운동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 후 김좌진 부대가 중국과 러시아 국경 일대로 이동한 뒤 다시 영안(寧安) 및 해림 지역으로 이동하면서이다.
김좌진 부대는 영안에서 1925년 신민부를 조직하고 독립운동 단체를 재정비 하였다. 아울러 무정부주의 사상을 수용하여 신민부(新民府)를 한족 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로 발전적으로 해체하여 동포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1930년 1월 김좌진은 산시(山市)에서 암살 당하였다.
한편, 1931년 만주 사변 후 1933년 9월 6일 한국 독립군이청천은 오의성(吳義成)의 중국 구국군(中國救國軍)과 연합하여 동녕현성(東寧縣城)을 공격하였다. 동녕은 일제의 중요한 군사적 거점이었다. 이 전투는 2일간 계속되었고, 일제에 큰 피해를 주었다. 그러나 한중 연합 부대의 손실도 컸다.
하얼빈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를 저격한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안중근의 의거지인 하얼빈 역 구내에는 최근 안중근 의사의 저격점과 이토 히로부미의 피살점을 삼각형으로 표시해 두고 있다.
최근에는 안중근 의사 전시관이 시내에 마련되었으며, 안중근 의사가 의거 전에 잠시 노닐었던 조린 공원[옛 하얼빈 공원]에는 안중근 의사의 유묵이 돌에 새겨지기도 하였다. 또한 하얼빈 인근에는 일제의 만행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731 부대를 찾아 볼 수 있으며, 만주 사변 후 한국 독립군의 승리의 현장인 쌍성보 전투지도 있다.
쌍성보 전투는 1932년 9월 한국 독립군과 고봉림(考鳳林)이 지휘하는 중국의 길림 자위 연합군이 전략적 요충지이며 물산의 집결지인 쌍성보를 공격하여 일·만군을 격퇴한 곳이다.
쌍성보 전투에서 중국군은 동문과 남문을 공격하고 독립군은 서문을 공격하기로 결정한 후 공격을 개시하였다. 성내에는 만주군 3개여 단이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독립군의 공격으로 북문으로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북문 밖에는 미리 이와 같은 사태가 있을 것을 예상하고 매복시켜 둔 연합군의 공격으로 대부분 사살되었다.
쌍성보 전투에서 한국 독립군과 고봉림군의 사상자는 30~40명에 지나지 않았고, 일본군은 부대원의 절반정도를 잃고 만주군은 1,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2,000여 명이 투항하였다고 한다. 1932년 11월에 있은 2차 쌍성보 전투에서도 한국 독립군은 뛰어난 전투를 벌였으나, 일·만군에 비해 화력이 열세하여 전략적 거점인 쌍성보를 내주고 동만으로 이동하였다.
요령성 지역은 서간도라고 불린 지역으로 압록강 연안 경제권에 속하였기 때문에 일찍이 한인들이 이주를 택하기에 적합하였다. 한반도에서의 이주민은 주로 평안도 출신들이었다.
1910년대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 추가가 지역을 중심으로 처음으로 독립운동 기지가 만들어졌다. 경학사(耕學社)·부민단(扶民團) 등이 그 주요 단체들이며, 신흥 강습소(新興講習所)라는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무관 학교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경학사는 1910년대 전반기 서간도 지역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한인 자치 기관이자 독립운동 단체였다. 1911년 4월 유하현 삼원보 대고산에서 군중 대회를 통하여 조직되었다. 책임자인 사장은 이철영(李喆榮) 또는 이상룡(李相龍)이 되었다. 경학사에서는 민생과 교육의 두 가지 목표를 내걸고 이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였다.
신흥 강습소는 독립 전쟁론을 실천하기 위하여 이회영(李會榮) 등이 중심이 되어 만든 무관 학교·무관 학교의 설립을 위하여 서간도 지역으로 망명한 이회영·이시영(李始榮)·이상룡 등 신민회 회원들이 1911년 여름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에서 무관의 양성을 위해 신흥 강습소를 설치하였다
신흥 무관 학교는 1915년 5월 3일 개교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으며 이 학교 출신들은 서로 군정서(西路軍政署)·북로 군정서·의열단·광복군 등에서 활동하였다. 신흥 무관 학교는 일제 군경과 마적의 습격 등 크고 작은 문제로 결국 1920년 8월에 폐교되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배출된 학생들은 만주와 중국 본토의 여러 독립운동 단체에서 각각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 지역 한인들은 그후 서로 군정서·대한 독립단·한족회 등을 결성하여 활발한 국내 진공 작전 및 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압록강과 가까이 위치하고 있던 대한 독립단·참의부 등은 국내 진공 작전을 더욱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참의부의 경우 고마령에서 상당수의 독립군이 희생당하는 비운을 겪기도 하였다. 아울러 고마령에서 훈강을 건너면 나타나는 관전현 하루하(下漏河)에는 1920년대 전반기 서간도 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단체였던 대한 통의부(大韓統義府)의 본부가 있었다. 통화(通化) 지역의 합니하(哈泥河) 일대에는 신흥 무관 학교 학생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1924년 5월, 일제의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1858~1936]가 압록강 순시 중 독립군의 공격을 당하면서 크게 자극된 일제는 한편으로는 동삼성(東三省) 특히 봉천성(奉天省) 당국자와 외교 교섭을 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일제 영사관 경찰을 동원하여 독립군 토벌에 주력하였다.
대한 통의부는 1922년 8월 서로 군정서·대한 광복군 총영·평안북도 독판부등 여러 단체가 통합하여 이루어진 조직이다, 총장 김동삼(金東三)·부총장 채상덕(蔡相德)·민사부장 이웅해(李雄海)·검무국장 최명수(崔明洙) 등이 활동하였다.
독립군도 일제의 이러한 동향에 주목하면서 1924년 겨울 최석순(崔碩淳) 참의장을 중심으로 대책 수립에 부심하였다. 그러던 중 1925년 3월 16일 집안현 고마령에서 국내 진입을 위한 작전 회의를 하고 있을 때 일제 경찰의 기습을 받아 최석순 이하 29명혹은 42명이 전사하는 참변을 겪게 되었던 것이다.
고마령 참변은 참의부 전투 사상 최대의 참변이었고, 최대의 타격이었다. 조직 자체도 재정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나 뒤 따라 ‘삼시 협정’의 영향도 받게 되어 점차 쇠운을 면치 못하였다.
1932년 4월 조선 혁명군은 신빈현 영릉가를 공격하여 격전 끝에 일본·만주군 80여 명을 섬멸하고 점령하였다. 이후 한중 연합군은 전투기까지 동원하여 반격해온 일·만군에 쫓겨 신빈현성에서 철수하였으나, 곧 반격하여 이 성을 탈환하였다. 5월 8일 일·만 연합군이 영릉가를 다시 공격해오자 조선 혁명군은 중국 부대와 함께 2일간이나 격전을 치루며 사수하였다.
요령성 출신 가운데 용맹한 인물로 양세봉(梁世奉)을 꼽는다. 1919년 3·1 운동 직후 양세봉은 평안도 지역 천마산대에서 활동하였으며, 1920년에는 만주로 망명하여 광복군 총영에서 활동하였다. 1923년 참의부가 조직되자 소대장으로 활발한 국내 진공 작전을 전개하였으며, 뒤에는 제3 중대장으로 활동하였다. 1929년에는 조선 혁명군 제1 중대장, 1931년에는 조선 혁명군 총사령이 되어 중국군과 연합 작전을 성공리 수행하였다. 1934년 9월 전부터 잘 알고 있던 일본 경찰의 밀정인 박창해(朴昌海)의 계략에 빠져 대원 여러 명과 같이 소황구(小黃溝)에서 일본군에 포위되어 치열한 전투 끝에 전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