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한

한자 洪翼漢
중문 洪翼汉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요령성  
시대 조선/조선 후기
상세정보
성격 문신(文臣)
성별 남(男)
본관 남양(南陽)
대표관직 사간원 정언
출생 시기/일시 1586년(선조 19)
활동 시기/일시 1621년(광해군 13)
활동 시기/일시 1624년(인조 2)
활동 시기/일시 1635년(인조 13)
몰년 시기/일시 1637년(인조 15)
추모 시기/일시 1653년(효종 4)
추모 시기/일시 1686년(숙종 12)
추모 시기/일시 1705년(숙종 31)
묘소|단소 경기도 평택시 팽성면 본정리
사당|배향지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문단리 93번지
사당|배향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선행리
사당|배향지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함정리
사당|배향지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사당|배향지 충청남도 부여군 구룡면
사당|배향지 경상 북도 영주시 상망동
사당|배향지 경상 북도 고령군 운수면 운산리
사당|배향지 전북 부안군 부안읍 연곡리
정의

청나라에 대해 척화를 주장하다가 심양(瀋陽)에 인질로 잡혀가 처형된 조선 시대 삼학사(三學士) 중 한 명.

개설

홍익한(洪翼漢)[1586~1637]의 본관은 남양(南陽)으로, 초명은 홍습(洪霫)이다. 자는 백승(伯升)이고 호는 화포(花浦)·운옹(雲翁) 등이다.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하다 심양에 잡혀가 처형당한 삼학사(三學士) 중 한 사람이다.

가계

홍익한의 고조부는 좌찬성을 지낸 홍숙(洪淑)이고, 증조부는 관찰사를 지낸 홍서주(洪叙疇)이며, 아버지는 홍이성(洪以成)이다. 어머니는 안동 김씨김림(金琳)의 딸이다. 후에 백부 홍대성(洪大成)에게 입양되었다. 부인 중 초취(初娶)는 능성 구씨구곤원(具坤源)의 딸이고, 재취는 양천 허씨허식(許寔)의 딸이다.

활동 사항

홍익한은 1621년(광해군 13) 문과에 급제했으나 파방(罷榜)되었다. 파방은 여러 가지 이유로 합격이 취소되는 것을 말한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으로 국왕이 공주(公州)로 파천(播遷)했을 때 시행한 문과에서 급제하였다. 이후 성균관 전적과 사헌부 감찰, 세자 시강원 사서 등을 거쳐 1635년(인조 13)에 사간원 정언과 사헌부 장령을 지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국왕을 수행해 남한 산성에서 들어가 끝까지 청나라에 대항하며 화의를 반대하였다. 1637년 병자호란이 종식된 후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등과 함께 심양에 인질로 잡혀가 모두 처형당하였다.

홍익한이 심양에 잡혀간 것은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636년(인조 14) 2월 후금에서 사신이 국서를 가지고 오자, 후금이 황제를 칭하는 것은 참람된 것이라고 하여 사신을 처단하자는 상소를 올린 것 때문이었다. 죽기 직전 종이와 붓을 구해 “천하에 아버지가 둘인 자식은 없다”며 명나라를 배반할 수 없는 이치를 항변하였다.

학문과 저술

홍익한이정구(李廷龜)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문집인 『화포집(花浦集)』이 있다.

묘소

홍익한의 묘소는 경기도 평택 서쪽 경정리에 위치하였는데, 평소에 타던 말 안장과 옷을 수습해 장사지냈다. 1945년 경기도 평택시 팽성면 본정리로 이장하였다. 한편 그가 살던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문단리 93번지에는 충렬각(忠烈閣)이 세워졌다.

상훈과 추모

홍익한은 1653년(효종 4)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1686년 이조판서가 추증되었으며, 충정(忠正)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그 뒤 1705년(숙종 31) 금산의 유학 길경조(吉景祖)의 상소를 계기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681년(숙종 7) 남한 산성에 현절사를 세워 홍익한을 비롯해 윤집, 오달제를 제향하였다.

1683년(숙종 9) 정문(旌門)을 하사하였다. 이밖에도 강화의 충렬사(忠烈祠), 평택의 포의사(褒義祠), 홍산의 창렬 서원(彰烈書院), 부안의 도동 서원(道東書院), 영천의 장암 서원(壯巖書院), 고령의 운천 서원(雲川書院), 평양의 서산 서원(西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숙종실록』
  • 정옥자, 『조선 후기 지성사』(일지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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