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아병

한자 漢人牙兵
중문 漢人牙兵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요령성  
시대 조선/조선 후기
상세정보
성격 제도
제정 시기/일시 효종 초
개정 시기/일시 1790년(정조 14)
관할 지역 서울
정의

조선 후기 군영(軍營) 중 하나인 훈련도감(訓鍊都監)에 소속된 명나라 귀화인.

개설

한인 아병은 병자호란 이후 심양(瀋陽)에서 생활하던 봉림 대군이 귀국할 당시, 조선으로 귀화한 명나라 8성(姓)의 후손들이다. 이들은 훈련도감에 소속되었으며 생계를 위한 고기잡이가 허용되었다. 시간이 경과하며 이들을 업신여기는 풍조가 심화되고 이들의 생활 여건 또한 열악해지자, 1790년(정조 14)에는 한인 아병이라는 호칭을 금지하고 한려(漢旅)로 개칭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병자호란 직후 조선의 세자인 소현 세자(昭顯世子)를 비롯해 봉림 대군(鳳林大君)[후일의 효종] 등은 청의 볼모가 되어 심양(瀋陽)에서 약 8년 간 생활하다 귀국하였다. 봉림 대군이 귀국할 때 8성(姓)의 명나라 사람들이 그를 따라 귀화하였다. 봉림 대군은 국왕에게 이들 8성의 명나라 사람을 궁궐 부근에 살 수 있게 해줄 것을 요청해 허가를 받았다. 봉림 대군은 왕위에 오른 뒤 이들을 내수사(內需司)에 소속시켜 식량을 제공하는 한편 훈련도감의 아병에 편입시켜 한인 아병이라고 칭했다.

관련 기록

한인 아병에 대해서는 『정조 실록(正祖實錄)』과 『만기요람(萬機要覽)』 등에 관련 기록이 전한다. 이들 기록에서는 한인 아병이 창설된 배경과 이후 한려(漢旅)로 변화된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내용

봉림 대군이 귀국할 때 수행했던 8성의 명나라 사람은 박배원(朴培元)·신진익(申晉翼)·오효성(吳孝誠)·조양(趙壤)·장애성(張愛聲)·김지웅(金志雄)·박기성(朴起星)·장사민(張士敏) 등이다.

봉림 대군은 왕위에 오른 뒤 이들 8명을 대상으로 국왕의 호위 조직인 별군직(別軍職)을 조직하였다. 이후 8성의 자손 중 무예가 뛰어난 자 등을 중심으로 별군직을 유지하였다.

별군직에 속하지 못한 명나라 사람들은 한인 아병이 되어 훈련도감에 소속되었다. 훈련도감에 속한 한인 아병에게는 생계를 위한 어업 종사가 허용되었다.

변천

한인 아병의 생활은 시대가 바뀌면서 곤궁해졌을 뿐 아니라, 조선에서 명나라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면서 이들을 업신여기는 풍조가 생겼다. 심지어 무술을 연마하는 교장에서는 한인 아병을 가왜초(假倭哨)라 하여 가상의 적으로 삼아 연습하기도 하였다.

이에 1790년(정조 14) 3월 정조는 단풍정(丹楓亭)에 나아가 이들을 접견한 뒤에 한인 아병을 한려(漢旅)로 개편하였다. 한려의 정원은 30명으로 하여 훈련도감에 소속시키도록 하고, 이들도 군사로 근무하는 역(役)을 지도록 하였으며, 창덕궁 후원에 설치한 대보단(大報壇)에서 제사가 있을 때는 한려가 신탑(神榻)을 받드는 일과 제찬(祭饌)을 마련하고 거두는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한려가 일정 기간 근무하면 수직관(守直官)으로 임명하게 하는 동시에 수직관 이후에는 자급(資級)을 올려주도록 하였다.

의의와 평가

한인 아병의 존재는 조선 후기 사회의 명에 대한 존숭 의식에서 나온 산물이다. 이를 통해 조선 후기 대명 의식의 변화 양상을 살필 수 있다.

참고문헌
  • 『정조 실록(正祖實錄)』
  • 『만기요람(萬機要覽)』
  • 장필기, 「조선 후기 별군직의 조직과 그 활동」(『사학 연구』40, 한국사 학회,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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