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崔鳴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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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 | 崔鸣吉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요령성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성격 | 문신(文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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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 남(男) |
본관 | 전주(全州) |
대표관직 | 영의정(領議政) |
출생 시기/일시 | 1586년(선조 19) |
활동 시기/일시 | 1605년(선조 38) |
활동 시기/일시 | 1610년(광해군 2) |
활동 시기/일시 | 1611년(광해군 3) |
활동 시기/일시 | 1623년(인조 1) |
활동 시기/일시 | 1627년(인조 5) |
활동 시기/일시 | 1634년(인조 12) |
활동 시기/일시 | 1635년(인조 13) |
활동 시기/일시 | 1637년(인조 15) |
활동 시기/일시 | 1638년(인조 16) |
몰년 시기/일시 | 1647년(인조 25) |
추모 시기/일시 | 1681년(숙종 7) |
출생지 | 서울시 중구 정동 |
거주|이주지 | 경기도 평택시 송탄동 |
거주|이주지 | 인천광역시 |
충청북도 진천군 | |
묘소|단소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대율리 |
조선 후기 청나라와 외교적 마찰로 심양(瀋陽)에 압송되어 구금되었던 문신.
최명길은 1605년(선조 38) 문과 급제 후, 1610년(광해군 2) 사헌부 감찰과 예조좌랑을 거쳐 1611년(광해군 3)에 공조좌랑과 병조좌랑을 지냈다. 1618년(광해군 10) 인목대비(仁穆大妃)가 폐서인(廢庶人) 되어 서궁(西宮)[인경궁(仁慶宮)]에 유폐된 후 신경진(申慶禛), 김류(金瑬) 등과 반정을 논의하기 시작, 1623년(인조 1) 인조 반정을 성공시켰다. 반정 이후 이조좌랑과 이조참의를 지냈고, 정사 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완성군에 봉해졌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을 때 안현 전투(鞍峴戰鬪)에 참여하여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후금 측에서 화의를 요청하자 조정 내 논의를 주도하여 성사시켰다. 이후 형조참판과 병조참판 등을 지냈으며, 1634년(인조 12)에 이조판서를, 1635년(인조 13)에 호조판서를 지냈다.
1635년 봄 후금에서 황제를 칭하는 국서를 보내오자 조정에서 후금과의 국교를 단절하자는 논의가 제기되어 국서를 받지 않고 돌려보내자 후환에 대한 대책 마련을 요구하였다. 1636년(인조 14) 12월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국왕의 피난 시간을 벌기 위해 청나라 진영에 가서 맹서(盟誓)를 어기고 군대를 몰고 온 것을 힐책하였다.
그 사이 국왕과 세자 및 백관은 남한 산성으로 피신했다. 이후 산성에서 국왕을 호위하며 강화(講和)를 주장하였다. 병자호란 후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냈는데, 이 기간에 청나라에서 포로가 된 조선 사람들의 몸값을 과도하게 요구하는 문제가 발생하자 법을 제정해 노소귀천에 따라 그 값을 조정하게 하였다.
1638년(인조 16) 영의정에 제수되었다. 당시 청나라에서 금주위(錦州衛)를 공격하기 위한 원병을 요청하자 의리상 따를 수 없다며 거부한 뒤 수상(首相)으로서 책임을 지고 심양에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642년(인조 20) 승려 독보(獨步)를 통해 명나라 황제에게 자문(咨文)을 보낸 일과 선천 부사 이계(李烓)가 중국 배와 몰래 교역한 사실이 드러나 청나라와 외교적 마찰이 발생했다. 특히 이계는 조선 조정에서 일부 관리가 척화를 주도했다고 주장하며 관리 10여 명의 명단을 청나라에 제출했는데, 이 때 최명길의 이름도 거론되어 심양에 구금되었다. 1645년(인조 23) 석방되어 돌아와서는 진천(鎭川)에 낙향해서 생활하였다.
최명길은 어려서 이항복(李恒福)과 신흠(申欽)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최명길은 양명학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으나 후일에는 그 병폐에 대해 논하기도 하였다. 조익(趙翼), 장유(張維), 이시백(李時白) 등과 교류하며 학문을 강론하였다.
손자인 최석정(崔錫鼎)이 찬술한 행장에 따르면, 시(詩) 4권, 소차(疏箚) 10권, 계사(啓辭) 2권, 비장(碑狀)과 잡저(雜著) 3권이 세상에 전하고, 『주역기의(周易記疑)』, 『논어기의(論語記疑)』, 『맹자기의(孟子記疑)』, 『괘변설강(卦變說綱)』, 『용학관견(庸學管見)』 등이 있다고 하였다. 문집으로 『지천집』이 전한다.
최명길의 묘소는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대율리에 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