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분류

책문 후시

한자 柵門 後市
중문 栅门后市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요령성  
시대 조선/조선 후기
상세정보
성격 경제
제정 시기/일시 1660년(현종 1)
폐지 시기/일시 1725년(영조 1)
개정 시기/일시 1754년(영조 30)
폐지 시기/일시 1787년(정조 11)
개정 시기/일시 1795년(정조 19)
관할 지역 구련성(九連城)과 봉황성(鳳凰城) 사이에 위치한 지역
정의

조선 후기 청나라의 책문(柵門)에서 조선과 청나라 상인들 사이에 행해지던 무역.

개설

책문 후시는 책문에서 이루어진 사무역을 말하는데, 책문은 구련성(九連城)과 봉황성(鳳凰城) 사이에 위치한 지역이다. 책문 후시는 요동의 차호(車戶)와 조선의 의주, 개성 상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요동의 차호 12명은 운송 청부 업체인 난두(攔頭)를 조직하여 무역을 독점하였다. 책문 후시는 1660년(현종 1) 시작된 이후 당시 대청 무역을 주도하던 역관(譯官)들과의 마찰로 인해 폐지와 재개가 반복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책문 후시는 압록강변의 중강(中江)에서 행해지던 후시(後市)에 대한 감독이 강화되자 1660년(현종 1)부터 요동의 차호(車戶)와 조선의 의주, 개성 상인들을 중심으로 통상이 이루어지면서 시작되었다.

관련 기록

책문 후시에 대한 기록은 『조선 왕조 실록』을 비롯해 『만기요람(萬機要覽)』, 『통문관지(通文館志)』 등에서 확인된다. 『만기요람』에서는 책문 후시에 대해, “요동·봉성의 차호 12인이 난두라 칭하고 우리 사행(使行)의 왕래하는 복물(卜物)에 그 거각(車脚)[청국의 창]을 전매(專賣)하여 각가(脚價)가 배증하였는데도, 난두 등이 또 관동(關東)의 탐리(貪吏)와 결탁하고 이익을 도모하여 심고(瀋庫)[심양의 창고]에 납세하기를 자원하고 화물을 많이 운수(運輸)하여 후시의 이익을 오로지하여, 사행(使行)이 책문을 출입할 때에는 만상(灣商)과 송도(松都)의 상인 등이 은·삼을 몰래 가지고 부·마(夫馬) 속에 섞여들어 물종을 팔아서 모리(牟利)하며, 회환(回還)함에 이르러서는 거각을 일부러 더디 운전하게 하고 먼저 사신을 책문으로 나가게 하여 거리낄 것이 없게 한 뒤에 저희 마음대로 매매하고 돌아오는데, 이것을 책문 후시(柵門後市)라 한다.”고 기록하였다.

내용

책문 후시에 참여하는 조선 상인들은 연행 사신이 왕래하는 사이에 사신 일행이 가지고 가는 세폐(歲幣)나 방물(方物) 등의 운송 과정에 참여하면서 책문에서 요동의 차호들과 교역하였다. 조선 상인들은 책문에서 머무는 기간을 연장하기 위해 고의로 운송을 지연시키거나 사신 일행을 먼저 귀국시킨 뒤에 교역을 행하였다. 책문 후시가 번성하면서 그 규모가 산해관(山海關) 서쪽의 대도회에 있는 점포와 다를 것이 없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하였다. 책문 후시를 통해서 다량의 청나라 물품이 수입되어 유통되면서 의주와 개성 상인들은 많은 이익을 거두었다. 이에 비해 종전까지 무역을 통해 이익을 얻었던 역관(譯官)들은 이익이 줄어들자, 상인들의 무역 금지를 요청하여 결국 1725년(영조 1) 책문 후시가 중단되었다.

변천

책문 후시는 이후 폐쇄와 재개가 반복되었다. 책문 후시가 중단된 이후 역관들이 무역을 주도하였으나, 상인들의 경우도 의주·강계(江界)·초산(楚山) 등지에서 법으로 금지된 밀무역(密貿易)을 감행하였다.

밀무역으로 인해 재정적인 손실 뿐 아니라 외교적인 문제가 발생하자 조선에서는 1754년(영조 30) 책문에서의 무역을 다시 허용하였으나, 그 대상은 의주 상인으로 한정되었다. 그러나 이 또한 역관들의 반발로 1787년(정조 11) 혁파되었다가 1795년(정조 19) 다시 허용하였다.

의의와 평가

책문 후시는 조선 후기 대청 무역의 한 양상으로, 사상인(私商人)들의 성장과 그에 따른 무역 형태를 보여준다.

참고문헌
  • 『만기요람(萬機要覽)』
  • 『통문관지(通文館志)』
  • 유승주, 「청과의 무역」(『신편 한국사』33, 국사편찬위원회,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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