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관

한자 朝鮮館
중문 朝鲜馆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지명/시설
지역 요령성  
시대 조선/조선
상세정보
성격 숙소
정의

조선 후기 연행 사신이 연경(燕京)을 왕래할 때 머물 수 있도록 요동(遼東) 지역에 마련된 숙소.

건립 경위

조선관은 연경으로 가는 조선 사신의 숙식을 위해 요동(遼東) 지역에 마련된 숙소이다. 지역에 따라 조선관, 혹은 찰원(察院)으로 불렀다. 별도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도 있는데, 봉황성(鳳凰城) 내의 조선관은 유원관(柔遠館)이라 불렸다.

위치

조선 후기 연행 사신은 책문과 봉황성을 거쳐 요동 지역으로 들어가는데, 이때 조선 사신의 편의를 위해 약 30여 개의 공참(公站)을 설치하고, 그곳에 조선관을 만들어 숙소로 사용하게 하였다. 단, 시설이 열악하여 조선 사신은 대부분 사가를 빌려 거처하였다.

1828년(순조 28) 사행단 일행으로 연경을 다녀온 박사호(朴思浩)는 「연계 기정(燕薊紀程)」이라는 글에서 심양(瀋陽)의 조선관은 동쪽 변두리의 작은 골목에 위치하였는데, 창틀이며 방문이 거의 황폐해져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형태

홍대용(洪大容)의 연행 기록인 「연기(燕記)」에는 조선관의 모습에 대해서 다음과 기록하였다. “매양 온돌방이 엉성하고 찬 까닭에 반드시 다른 사가로 나가 머물렀던 것이다. 이 때문에 찰원이 모두 허물어지고 황폐한 채 수리를 하지 않고 있는데, 오직 영평부(永平府)의 관사만은 웅장하고 화려하여 금자(金字)의 편액이 걸려 있고, 안팎 뜰의 꽃나무들이 울창하였다. 대개, 들리는 말로는, 황제가 심양으로 거둥하던 도중 여기에 이르러 관사가 많이 파괴된 것을 보고 지부(知府)의 관직을 파면시킨 일이 있었는데, 이때부터 수리를 유독 잘 하여 매양 사행이 올 때면 관에서 침대와 책상이나 기물들을 갖추어 가지고 나와서 대기하고 있다가, 사행이 사가로 들게 되면 그때야 거두어 가지고 간다고 했다.”

의의와 평가

조선관은 조선 후기 연행 사신이 숙소로 사용하던 곳으로, 이곳에서 청나라의 문물을 견문하였다.

참고문헌
  • 박사호(朴思浩), 「연계기정(燕薊紀程)」『심전고(心田稿)』 권1
  • 홍대용(洪大容), 『담헌서(湛軒書)』 외집(外集)
  • 서경보(徐耕輔), 『연원직지(燕轅直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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