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분류

연행 팔포

한자 燕行 八包
중문 燕行八包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길림성  요령성  
시대 조선/조선 후기
상세정보
성격 재정(財政)
제정 시기/일시 1628년(인조 6)
개정 시기/일시 1670년(현종 11)
정의

조선 후기 연경(燕京)으로 가는 사신 일행의 경비로 1인당 허용한 80근의 인삼을 지칭하는 말.

개설

인삼 10근을 1포(包)로 하여 인삼 80근을 팔포라고 하였다. 팔포는 사신 일행이 개인적으로 사용할 수 경비인데, 역관(譯官)의 경우 이를 무역 자금으로 활용해 많은 경제적 이익을 얻기도 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고려 시대에는 사신의 경비로 은을 사용하였으나, 조선 초 마포(麻布)와 인삼으로 대체하였다. 이에 따라 대략 인삼 5근이나 10근 정도가 소요되었는데, 점차 시간이 경과하면서 수량이 증가하였다.

특히 요동 지역이 후금에 의해 장악된 후에는 연경으로 가는 사신 일행이 요동 지역을 통과하는 반대 급부로 인삼을 이용하게 되면서 더욱 증가하였다. 이에 일정하게 제한할 필요가 생기면서 1628년(인조 6)에 80근까지 휴대를 허용하는 팔포제가 제정되었다.

관련 기록

연행 팔포는 많은 자료에서 언급되고 있지만, 이를 종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자료는 『만기요람(萬機要覽)』 정도이다. 『만기요람』의 재용편 연행 팔포조에는 “국초에는 연경에 가는 인원이 은화를 지니고 가서 반비(盤費)·무역의 자금으로 삼았는데, 선덕(宣德)[명 선종의 연호] 연간에 이르러서 금·은은 국산이 아니므로 주청하여 면공(免貢)하였다. 이로부터 연경에 가서 매매하는 데에는 은화를 가져가는 것을 금하고 인삼으로 대신하여 한 사람에게 10근씩으로 하였는데, 뒤에 점점 넘쳐서 그 수량이 많아지므로, 숭정 초년에 이르러 매인에게 80근을 가져가게 허락하니, 이것을 팔포라 이르는 것이다. 그 뒤에 또 은자를 지니고 가는 것을 허락하여 인삼 1근을 은 25냥으로 환산하여 80근, 즉 2천냥을 1인 팔포로 하였다.”라고 기록 하였다.

내용

연행 팔포의 시행으로 인해 일단 무역이 활성화되면서 왜은(倭銀)의 수입이 증대하였다. 일본에서 수입된 은(銀)은 이후 청나라로 흘러들어갔다. 이에 조선에서는 은 유출의 방지에 주력하는 한편 1670년(현종 11) 인삼 1근을 은 25냥으로 환산하여 은 2천냥을 8포 정액으로 확정하였다.

단, 사신 일행 중 정사(正使)와 부사(副使), 서장관(書狀官)은 추가로 1천냥을 더해 모두 3천냥을 허용하였다. 연행 사신 일행이 한 번에 소요하는 은화는 대략 10만냥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팔포는 개인 사치품을 구입하는 데 쓰이기도 했으며, 역관들의 경우는 이를 무역 자금으로 활용해 엄청난 부를 축적하기도 하였다.

변천

연행 팔포의 시행으로 국내 은광업이 쇠퇴하면서 은화 대신에 가죽이나 종이 등의 물품으로 충당하는 경우도 있었고, 1797년(정조 21)에는 팔포에 홍삼을 가지고 갈 수 있도록 하는 조치가 취해지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연행 팔포는 연행 사신의 개인 경비로 정해진 것이지만, 무역 자금으로 이용된다는 점에서 조선 후기 대청 무역의 모습을 해명하는 데 중요한 요소이다.

참고문헌
  • 『만기요람(萬機要覽)』
  • 유승주·이철성, 『조선 후기 중국과의 무역사』(경인 문화사, 2002)
  • 유승주, 「조선 후기 대청 무역의 전개 과정-17· 8세기 부연역관의 무역 활동을 중심으로-」(『백산 학보』8, 백산 학회, 1970)
  • 민덕기, 「팔포 무역으로 보는 사대·교린 사행 외교의 특징」(『일본학』28, 동국 대학교 일본학 연구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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