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安東 都護府 |
---|---|
중문 | 安东都护府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길림성 요령성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
제도 | 당(唐)이 고구려를 멸망하고 설치한 기관. |
---|---|
제정 시기/일시 | 668년 |
폐지 시기/일시 | 758년 |
개정 시기/일시 | 670년 |
개정 시기/일시 | 676년 2월 |
개정 시기/일시 | 677년 2월 |
개정 시기/일시 | 699년 |
개정 시기/일시 | 704∼705년경 |
개정 시기/일시 | 714년 |
개정 시기/일시 | 743년 |
관할 지역 | 고구려 평양성 |
당(唐)이 고구려의 평양성을 함락시킨 후 설치한 기관.
안동 도호부는 고구려 유민의 저항에 부딪혀 치소를 요동 지역으로 계속 옮겨야만 했다. 설치 당시 검모잠(劒牟岑)을 비롯한 고구려의 유민들이 부흥 운동을 펼쳤다. 당은 670년에 안동 도호부의 치소(治所)를 신성(新城)[현 요령성 무순 서쪽]으로 옮겼다. 그 뒤, 신라와의 전투에서 잇달아 참패하자, 당은 676년 2월에 다시 부치(府治)를 신성에서 요동성(遼東城)[현 요령성 요양]으로 옮겼다. 677년 2월에는 고구려보장왕(寶藏王)에게 요동 도독 조선 군왕(遼東都督朝鮮郡王)에 봉하여 요동 지역의 자치를 허락하게 됨에 따라 안동 도호부를 다시 신성으로 옮겼다.
697년에 당의 요동 지배의 근거지였던 영주(營州)가 거란인들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자, 안동 도호부 유지가 어렵게 되었다. 더욱이 고구려 유민들이 주축이 되어 발해를 건국함에 따라 당은 보장왕의 아들 고덕무(高德武)에게 만주 지방의 고구려 유민들을 다스리게 하는 통치 방침을 채택해 일단 안동 도호부를 폐지하고, 699년에 안동 도독부를 두어 고덕무를 안동 도독에 임명, 부임하도록 하였다.
그 뒤, 704∼705년경에 다시 안동 도호부로 복구되었으나 치소는 계속 이전되었다. 714년에 안동 도호부의 치소를 평주(平州)로, 다시 743년에는 요동군으로 옮겼다. 그 임무는 설치 당시의 고구려 유민에 대한 감시로부터 말갈족 견제로 변경되었다. 그 과정에서 안동 도호부 자체의 실권을 평로 절도사(平盧節度使)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안동 도호부는 안록산(安祿山)의 난을 계기로 758년경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