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朴趾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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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 | 朴趾源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요령성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성격 | 학자(學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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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 남(男) |
본관 | 반남(潘南) |
대표관직 | 양양 부사 |
출생 시기/일시 | 1737년(영조 13) |
활동 시기/일시 | 1780년(정조 4) |
활동 시기/일시 | 1786년(정조 10) |
활동 시기/일시 | 1789년(정조 13) |
활동 시기/일시 | 1791년(정조 15) |
활동 시기/일시 | 1796년(정조 20) |
활동 시기/일시 | 1797년(정조 21) |
활동 시기/일시 | 1800년(정조 24) |
몰년 시기/일시 | 1805년(순조 5) |
추모 시기/일시 | 1910년(순종 4) |
출생지 | 서울시 중구 순화동과 의주로 2가 |
거주|이주지 | 서울시 종로구 계동, 가회동, 원서동 일대 |
거주|이주지 | 황해도 개성시 |
거주|이주지 | 서울시 종로구 계동, 가회동, 원서동 일대 |
부임|활동지 | 경상 북도 함양군 안의면 |
부임|활동지 |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
부임|활동지 | 강원도 양양군 |
조선 후기 연경(燕京)을 왕래하면서 견문한 내용을 기록한 『열하일기(熱河日記)』의 저자.
박지원은 젊은 시절 이홍유(李弘儒)·황승원(黃昇源) 등과 함께 과거 시험을 준비하면서 성균관시(成均館試)에 응시하기도 하였으나 낙방하였다. 1771년(영조 47) 과거 준비를 중단하고, 개성을 유람하면서 연암골을 발견하고 자신의 호를 ‘연암(燕巖)’이라 하였다. 이후 1778년(정조 2) 당시의 권력자 홍국영(洪國榮)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연암골에 은거하며 저술에 힘쓰는 한편 유생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1780년(정조 4)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칠순을 기념하는 사절단에 삼종형 박명원(朴明源)이 차출되자 그를 수행하여 연경에 다녀왔다. 이때 연경을 왕래하는 동안 거친 요양(遼陽), 심양(瀋陽) 등에서 견문한 내용을 기록한 『열하일기』를 저술하였다. 『열하일기』에서는 당시 요양, 심양을 비롯해 연경 등의 발달한 청나라 문물을 자세하게 소개하였다.
1786년(정조 10) 선공감감역에 제수되었고, 이후 평시서주부, 사복시주부, 의금부도사, 사헌부감찰 등을 역임하였으며, 1791년(정조 15) 안의 현감에 제수되었다. 안의 현감 재직시에는 직접 수차나 물레방아 등을 만들어 사용하게 하였다. 자신이 생각한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지방관으로서 실천한 것이었다. 1797년(정조 21)에 면천 군수, 1800년(정조 24)에 양양 부사에 임명되어 관직 활동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