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회빈 강씨

한자 閔懷嬪 姜氏
중문 闵怀嫔姜氏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왕족·호족
지역 요령성  
시대 조선/조선 후기
상세정보
성격 세자빈(世子嬪)
성별 여(女)
본관 금천(衿川)
출생 시기/일시 1611년(광해군 3)
혼인 시기/일시 1627년(인조 5)
활동 시기/일시 1637년(인조 15)
활동 시기/일시 1645년(인조 23)
몰년 시기/일시 1646년(인조 24)
추모 시기/일시 1718년(숙종 44)
묘소|단소 경기도 광명시 학온동 산141-20번지
정의

병자호란 이후 심양(瀋陽)에서 약 8년 동안 인질로 생활했던 세자빈(世子嬪).

개설

민회빈 강씨강빈(姜嬪)이라고도 한다. 인조의 장자인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빈으로, 1637년(인조 15)부터 약 8년간 심양에서 생활하였다. 심양에서 세자를 대신하는 역할을 수행하거나 직접 농사를 짓고 무역에도 종사하였다. 1646년(인조 24) 인조를 암살하려 했다는 이유로 사사되었다.

가계

민회빈 강씨의 본관은 금천(衿川)이다. 아버지는 강석기(姜碩期)이고, 어머니는 고령 신씨(高靈申氏)신식(申湜)의 딸이다.

활동 사항

민회빈 강씨는 1627년(인조 5) 소현세자와 가례를 올려 세자빈이 되었다. 병자호란 직후인 1637년(인조 15) 세자빈은 소현세자, 봉림대군(鳳林大君) 등과 함께 인질로 심양에 잡혀갔다가 1645년(인조 23) 귀국하였다.

심양에서 세자빈은 세자가 심양관을 비우는 경우 세자를 대리하여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당시로써는 선진적인 조선의 농법을 활용해 농지를 경작하였고 많은 수확을 올려 식량과 경비 등에 충당하였다.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무역 거래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기도 하였는데, 수익 일부는 조선인 포로를 속환하는 데 사용하였다.

귀국 후 소현세자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되면서 세자빈으로서의 입지가 흔들렸다. 여기에 인조의 총애를 받던 후궁인 소용(昭容) 조씨가 세자빈이 인조를 저주하였다고 무고하였고 결국 인조의 수라상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를 받고 1646년(인조 24) 사사되었다.

묘소

민회빈 강씨의 묘소는 경기도 광명시 학온동 산141-20번지에 있다. 사적 제35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처음에는 민회원으로 불렸으나 1903년(고종 40) 영회원(永懷園)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애기릉’ 또는 ‘아왕릉(阿王陵)’으로 부르기도 한다.

상훈과 추모

민회빈 강씨는 1718년(숙종 44) 무고가 밝혀져 복위되면서 민회(愍懷)로 신원되었으며, 아버지의 관직도 회복되었다. 형제들도 함께 신원되었다.

참고문헌
  • 『소현 동궁 일기(昭顯 東宮 日記)』
  • 『심양일기(瀋陽日記)』
  • 김남윤, 「소현세자빈 강씨의 심양관 생활」(『역사 연구』24, 역사학 연구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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