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강진 전투

한자 東江鎭 戰鬪
중문 东江镇战斗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요령성  
시대 조선/조선 후기
상세정보
성격 전쟁
관련인물/단체 모문룡(毛文龍)|유림(柳琳)|임경업(林慶業)|심세괴(沈世魁)
발생|시작 시기/일시 1637년(인조 15)
종결 시기/일시 1637년(인조 15)
발단 시기/일시 1623년(인조 1)
발생|시작 장소 평안도 철산군 백량면
종결 장소 평안도 철산군 백량면
정의

조선 후기 동강진(東江鎭)에서 조·청 연합군과 명나라 군대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

개설

동강진은 1623년(인조 1)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요동 수복’의 명분을 내걸고 평안도가도에 설치한 군사 거점이었다. 동강진은 설치 이후 조선과 후금, 그리고 명나라 사이에서 외교적 마찰을 불러왔다. 병자 호란 직후인 1637년(인조 15) 조·청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결국 함락되었다.

역사적 배경

1621년(광해군 13) 7월 명나라 장수인 모문룡(毛文龍)은 군사를 이끌고 요동으로 잠입하여 진강(鎭江)을 탈취했다. 진강은 오늘날 단둥(丹東) 부근으로 중국과 조선을 마주보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모문룡이 진강을 장악하자 후금은 대대적인 병력을 동원하여 반격에 나섰다. 이에 모문룡은 도주하여 조선의 미곶(彌串)에 상륙했다. 광해군은 후금과의 외교적 마찰을 우려해 모문룡을 설득해서 철산 앞바다에 있는 가도로 들어가게 했다.

모문룡은 1623년(인조 1) ‘요동 수복’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가도와 주변의 목미도(木彌島) 등을 아울러 동강진(東江鎭)을 설치하고, 조선에 군량 보급 등 여러 가지 요구를 하였다. 명나라에서 후일을 위해 이곳에 도독부를 두고 모문룡을 도독으로 임명했다. 모문룡은 이곳을 거점으로 후금과 조선을 견제하는 거점으로 삼은 것이다. 모문룡은 동강진을 설치하면서 ‘요동 수복’을 명분으로 내걸었으나 이후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오히려 조선과 후금의 외교적 마찰을 불러오는 장소가 되었으며, 이후 병자 호란의 한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경과

1637년(인조 15) 2월 청나라 장수 용골대와 마부대는 인조에게 가도 정벌에 협조할 것을 강요하였다. 이에 조선은 황해도의 병선 100척과 수군 3,000여 명을 징발했고, 평안 병사 유림(柳琳)을 주장으로, 의주 부윤 임경업(林慶業)을 부장으로 삼아 군사를 파견하였다.

조·청 연합군은 병력을 이끌고 철산 앞바다로 진격하였다. 당시 가도에는 모문룡 사후 그를 대신해 명나라 도독 심세괴(沈世魁)가 군민 5만여 명을 이끌고 방어에 임하고 있어 쉽게 공략할 수가 없었다. 조·청 연합군은 1637년 4월 9일, 철산 앞바다를 출발하여 총공격을 개시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나 임경업의 제안에 따라 남쪽 해안에 상륙하여 동강진의 배후를 기습하는 한편 전면에는 조선군이 공격하여 결국 심세괴가 전사하고 명나라 군사 역시 궤멸되면서 연합군의 승리로 이어졌다.

결과

동강진 전투의 승리로 가도와 동강진을 중심으로 저항하던 명나라 군대가 제압되면서 약 15년 이상 지속되던 가도는 붕괴되었다.

의의와 평가

동강진 전투의 승리로 인한 가도와 동강진의 붕괴로 청나라는 본격적인 중국관내(關內)로의 진출이 가능하였다.

참고문헌
  • 유재성, 『병자호란사』(국방부 전사 편찬 위원회, 1986)
  • 한명기, 『정묘·병자 호란과 동아시아』(푸른 역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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