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분류

금주위 전투

한자 錦州衛 戰鬪
중문 锦州为战斗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요령성 금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상세정보
성격 전투
관련인물/단체 홍타이지[皇太極, 청 태종]|소현 세자(昭顯世子)|봉림대군(鳳林大君)|조대수(祖大壽)|임경업(林慶業)
발생|시작 시기/일시 1638년(인조 16)
종결 시기/일시 1641년(인조 19)
발단 시기/일시 1627년(인조 5)
전개 시기/일시 1638년~1641년
발생|시작 장소 요령성(遼寧省)
종결 장소 요령성(遼寧省)
정의

1638년(인조 16) 청나라가 중국 본토로 진입하기 위해 금주위(錦州衛)를 공격하면서 일어난 전투.

개설

금주위는 요령성(遼寧省)에 위치했던 군사적 요충지이다. 1638년 청나라의 홍타이지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약 4년 간의 전투 끝에 이곳올 점령하였다. 이 전투의 승리로 청나라는 명나라의 산해관(山海關)으로 정면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역사적 배경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을 통해 조선과 화약을 맺은 후금(後金)은 중국 본토로의 진입을 위해 같은 해 5월 금주위 공격을 위한 원정길에 올랐다. 그러나 이때의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1631년 7월 홍타이지는 대릉하성(大凌河城)을 공격하여 성을 함락시키고, 명나라 장수 조대수(祖大壽)[?~1656]가 투항하는 전과를 올렸을 뿐 아니라 조대수를 앞세워 금주위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조대수는 오히려 금주성으로 도망가 청군에 대항함으로써 역시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경과

청나라가 다시 금주위 공략에 나선 것은 1638년으로, 이때 청나라는 조선에 지원병 파견을 요청한 바 있다. 조선은 이를 거부하다가 결국에는 응하여 임경업(林慶業)을 주사상장(舟師上將)으로, 황해 병사 이완(李浣)을 부장(副將)으로 삼아 군대를 파견하였다.

초기 원병 파견에 대한 거부로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불편한 외교 관계가 형성되었고, 당시 심양(瀋陽)에 있던 조선의 소현 세자(昭顯世子)와 봉림 대군(鳳林大君)[후일의 효종]이 금주위 공략에 나서는 홍타이지를 따라야만 하였다.

금주위 공략은 쉽지 않았다. 명나라에서는 총독 홍승주(洪承疇)와 함께 원병을 파견하는 등 청나라 군대에 강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1641년 홍타이지가 직접 군대를 지휘하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오랜 숙원을 풀 수 있었다.

결과

금주위를 공략한 청나라는 이후 금주와 주변의 송산(松山), 행산(杏山)의 연결을 차단하는 작전을 폈다. 당시 송산성으로 들어가 저항하는 명나라 총독 홍승주의 잔여 병력을 고립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 작전은 유효하여 결국 1642년 2월 송산성이 함락되었다.

의의와 평가

금주위 전투는 청나라가 명나라의 산해관(山海關)을 전면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한 서막을 알리는 전투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 이갑(李岬), 『연행 기사(燕行 記事)』
  • 한명기, 『정묘·병자 호란과 동아시아』(푸른 역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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