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속 민요

한자 通俗 民謠
중문 通俗民谣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민요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0년대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0년대 이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6년-1976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0년대 초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3년
정의

전문 소리꾼들이 불러 동북 3성 전역으로 널리 알려진 조선족 민요.

통속 민요의 전승

통속 민요는 1910년 8월 경술 국치 이후 일본의 축음기 회사가 한반도에 들어오면서부터 향토 민요와 분리되면서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일상 생활에서 부르던 많은 향토 민요 중에서 유행했던 잘 다듬어진 노래들이 전문 소리꾼에 의해 음향으로 제작되어 지역적인 제한을 받지 않고 동북 3성으로 널리 퍼져나갔다. 특히 1927년 경성 방송국 라디오 방송이 개시되면서 통속 민요는 더욱 빠르게 전파되었다.

당시 일본빅타 음박 회사에서 녹음으로 소리를 남긴 인물들은 박춘재·문영수·김종조·민형식·최섬홍·백운선·구재회·김능사·신해중월·표연월·김추월·이영산홍·장금화·질진홍·조모란 등이었다. 방송 매체 또는 SP음반을 통해 한반도의 통속 민요는 재만 한인 사회로 확산되어 갔다.

대표적인 곡으로는 「아리랑」·「밀양 아리랑」·「경상도 아리랑」·「제비가」·「놀량」·「관산융마」·「몽금포 타령」·「뽕타령」·「까투리 타령」·「풍년가」·「도라지」·「양산도」·「단가」·「별조단가」·「함평천지」·「농부가」·「방아 타령」·「산천초목」·「제비가」·「유산가」·「새타령」 등이었다.

통속 민요의 편입

1910년 이후 통속 민요는 한인들의 이주와 함께 재만 한인 사회에 편입되었다. 1910년 경술 국치 이후 20, 30년 동안 해마다 수 천, 수 만 명의 한인들이 연변 지역으로 이주하여 왔다. 동북 지역의 한인 수는 1907년 7만여 명이었는데 1930년에는 63만 명에 달했다.

이때 유입된 통속 민요는 향토 민요와 달리 경기 민요에서 사용되는 경토리가 많았다. 이외도 경토리와 기타 토리의 혼합된 것도 적지 않았다. 경토리가 많았던 것은 한반도의 문화 중심지인 경기도 민요 또는 경기창 민요가 음반 매체를 통해 확산되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들 통속 민요는 전문 소리꾼에 의해 불리지 않았다. 당시 재만 한인 사회에서는 한반도처럼 일본의 축음기 회사가 진출하지 않았고 많은 명창들도 없었기 때문에, 통속 민요는 주로 이주 한인들 스스로 익힌 것들이 입으로 전파된 것이 아닌가 한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상황이 변화하였다. 유랑 악극단의 순회 공연으로 유행가와 더불어 통속 민요가 재만 한인 사회에 전파되었다. 당시 유랑 악극단은 한반도는 물론 동북 3성을 비롯하여 일본·미국 등지로 떠돌아 다녔다. 그들은 한 곳에서 공연하기 전에 가두 순회를 하였다. 선전 대열의 맨 앞엔 악극단의 이름과 공연 종목, 가수의 이름을 쓴 큰 깃발과 악대가 줄지어가고 그 뒤로 인력거 또는 마차 행렬이 이어졌다. 그 뒤로 인기 가수들이 앉은 차들이 뒤따랐다.

유랑 악극단은 주로 유행가를 공연하였지만 그 가운데는 통속 민요도 포함되었다. 가수 선우일선은 「조선 팔경가」를 불렀고, 왕수복은 「능수버들」, 이은파는 「노들강변」, 이화자는 「어머님 전상서」를 불렀다고 한다.

유랑 악극단은 주로 용정에서 공연하곤 했다. 용정은 당시 문화의 중심지였다. 때문에 용정 지역의 통속 민요가 가장 많이 나타난다. 이곳에는 함경도 출신들이 대다수여서 용정 지역에는 길림성의 안도·왕청·돈화 등지보다 상대적으로 함경도 지방에서 나타나는 메나리토리가 많이 전승되었다.

통속 민요의 전승과 침체

재만 한인 사회의 민요는 수십 년을 거쳐 중국에 정착되면서 다른 소수 민족과의 접촉에 의해 여러 변화된 양상을 보였다. 특히 해방 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고 재만 한인들이 소수 민족의 하나인 ‘조선족’으로 불리면서 민요는 중국의 정치·경제·문화 등 제반 요소들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 조선족 민요의 발굴, 정리 사업이 진행되었고 책으로 출판되었다. 또한 1960년대 이후 여러 음악 관련 단체들이 설립되면서 이들 위주로 민요 연구가 진행되었고 민요집이 출판되었다. 그 결과 1980년대 초에 조선족 민요의 전면적 자료화가 진행되었고 아울러 연변조선족자치주 민간 가수 콩쿠르이 생겨나면서 조선족 민요 열풍이 불기도 했다.

또한 음악 교육 기관인 연변 예술 학교[연변대학 예술 학원 전신]가 설립되어 민요 등 민족 음악의 후계자들이 양성되었다. 하지만 점차 한족들의 노래가 중국 방송을 통해 전파되고 노래집에 실리면서 조선족 사회에 한족 민요가 침투하여 섞이게 되었다. 이에 한족 노래를 부르는 조선족들이 늘어나면서 조선족 민요는 상대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1966년부터 1976년까지의 문화 대혁명으로 말미암아, 조선족의 전통 음악은 한순간에 ‘복고주의’, ‘봉건 잡귀신’으로 치부되고 말았다. 당시에는 전통 문화와 외래 문화를 전면 부정하였기 때문에 민요를 부를 수 없게 된 것이다.

통속 민요의 변용

통속 민요는 이주 시기부터 계속하여 조선족 사회에 잠재되어 왔다. 조선족이라면 누구나 「아리랑」·「도라지」를 부를 줄 안다. 하지만 통속 민요가 본격적으로 널리 전파된 것은 한중 수교가 이뤄진 후 1993년부터이다. 연길을 중심으로 연변 각 지역에 ‘노래방’이 등장하면서다.

1993년에는 한국의 대흥 전자에서 제작한 ‘아리랑’ 기기가 유입되었고 1995년에는 한국의 금영 회사가 중국의 금영 과기 발전 유한 공사와 합작한 이후 금영 노래방 기기는 전 중국의 30여 개 도시로 확산되었다. 금영 노래방 곡목 가운데 통속 민요가 29곡이 포함되어 있다.

「강남 아리랑」·「꽃타령」·「노다지 타령」·「노들강변」·「노랫가락 차차차」·「능수버들」·「닐리리맘보」·「맹꽁이 타령」·「봄맞이」·「뽕따러 가세」·「산천리 강산 에라 좋구나」·「신만고강산」·「아리랑 낭랑」·「아리랑 목동」·「앵두나무처녀」·「짚세기 신고 왔네」·「처녀 총각」·「초립동」 등이다.

이는 예전보다 조선족들에 의해 즐겨 불리던 통속 민요가 줄어든 것이다. 이주 시기의 통속 민요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고문헌
  • 김예풍, 『조선족 민요 연구』(박이정, 2006)
  • 김예풍, 「조선족 민요의 전승과 변용에 대한 음악적 연구」(『아시아 민족 조형 학보』 5,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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