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한자 佛敎
중문 佛教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종교 동북 3성의 조선족들이 가진 신앙 가운데 하나인 불교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1년 3월
정의

중국 동북 3성에 거주하는 조선족들의 신앙 대상 가운데 하나.

개설

조선족 사회에 불교가 포교된 것은 1910년대 전후이다. 초기에는 승려나 사찰은 없었다. 그런 가운데 신자는 소수에 불과하였지만 존재하였다. 1911년 3월 승려 김본연과 최기남이 용정에 운흥사(雲興寺)를 건립하고 포교에 힘썼다. 김본연은 혼춘(琿春)에서도 포교에 힘써 신도가 200여 호에 달하였다. 1915년 범어사 선승 김구산이 조선족 사회에 포교를 하였으나 교세는 여전히 미약하였다.

이후 1920년 7월 화룡현 월청 용암동에 신흥사(新興寺), 1923년 연길현 부암촌에 용주사(龍珠寺), 1926년 안도현 송강진 문장촌에 태안사(泰安寺), 1927년 용정에 대각사(大覺寺), 1929년 용정에 신흥사, 1930년에 연길에 연명사가 설립되는 등 여러 지역에 사찰에 건립되면서 교세가 점차 확대되었다.

『동아 일보』에 의하면 1924년 조선족 사회에 불교 신자 수는 1,906명, 교육 기관 1개소에 49명의 학생이 있었으며, 1925년 통계에 의하면 사찰 7개, 신자 수는 1,923명으로 밝혀진 바 있다.

그리고 만주국(滿洲國) 건립 후인 1933년 8월 화룡현 약수동에 김인휘의 발원으로 감로사(甘露寺)를, 이해 4월에는 삼도구 송림평에 학룡사가 각각 건립되었다. 1934년 당시 조선족 사회에 불교의 교세를 살펴보면 사찰 14개, 신자 2,441명을 확보하였으며, 1936년에는 3,301명으로 증가하였다.

대각교 운동과 백용성

백용성은 3·1 운동 이후 불교의 대중화와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해 대각교(大覺敎) 운동을 전개하였다. 대각교 운동은 개개인의 운명과 시대를 새롭게 자각하자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보다 진취적이고 불교의 정신을 새롭게 구현하자는 것이다. 이에 백용성은 1927년 용정에 대각사를 건립하고 봉불식을 가졌다. 대각사는 조선족 사회의 불교 신도들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들의 은신처로도 활용되었다.

불교와 독립운동

3·1 운동 이후 국내에서 활동하던 승려들이 만주 일대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례가 적지 않다. 박달준·박영희·강재호 등은 신흥 무관 학교에 입학하여 항일 무장 투쟁에 참가한 바 있다. 이외에도 박무·신지찬·석창수 등이 무장 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 뿐만 아니라 3·1 운동 이후 안동현에 박민호가 중심이 되어 불교 청년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간접적으로 지원하였으며, 김법린과 김대용은 안동현 육도구에 동광 상점을 설립, 상해와 국내의 독립운동 세력과의 연락을 담당한 바 있다.

해방 이후

1949년 10월 중국의 소수 민족 정책과 종교 정책을 배경으로 조선족 사회의 불교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함에 따라 1951년 1,760명의 신자를 확보하였다. 최근 들어 조선족 사회에 불교의 역할이 크게 확장되고 있다. 조계종은 2007년 봉은사·조계사·도선사·흥국사의 지원으로 연변자치주 불교 협회에 경제적 지원을 한 바 있으며, 2008년 5월 조선족 최초의 사찰인 수월정사(水月精舍)[화엄사(華嚴寺)]를 복원하는 등 중국 당국과 협의 아래 교세 확장에 주력하고 있다.

참고문헌
  • 고병철 외, 『간도와 한인 종교』(한국학중앙연구원, 2010)
  • 강돈구 외, 『현대 중국과 한국 종교』(한국학중앙연구원 종교 문화 연구소, 2010)
  • 계림, 「중국 조선족의 종교 신앙에 대하여」(『한국 종교』16, 원광 대학교 종교 문제연구소, 1991)
  • 최봉룡, 「중국의 종교 정책과 조선족의 종교 문화」(『한국 종교』28, 원광 대학교 종교 문제 연구소, 2004)
  • 강돈구, 「현대 중국의 한국 종교-동북 삼성을 중심으로-」(『종교 연구』54, 한국 종교 학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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