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宗敎 |
---|---|
중문 | 宗教 |
분야 | 종교/불교|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종교 | 동북 3성에 거주하는 조선족들이 가진 종교 유형 |
---|
중국 동북 3성에 살고 있는 조선족의 여러 신앙 행위를 총칭하는 범주.
종교는 정치·경제·사상·예술·과학 등 인간 사회의 전 영역에 깊이 관련되어 있으며, 절대적이며 궁극적인 가치 체계로서 기능해 왔다. 종교는 절대성·궁극성을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발전 단계를 반영하고 있는 구체적인 문화 현상이다.
종교라는 말은 원래 근본이 되는 가르침을 의미하는 불교어였다. 그런데 그 말이 19세기 말 일본 메이지 시대[明治 時代]에 독일어의 ‘religion’의 번역어로 쓰이게 되면서 일반화된 것이다. ‘religion’의 어원은 라틴어의 ‘religio’로서,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외경의 감정과 그것을 표현하는 의례 등의 행위를 의미한다. 현재 ‘religion’의 번역어로서의 ‘종교’는 불교·기독교·이슬람교·유교 등의 개별 종교들을 총칭하는 유(類)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오늘날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은 56개 민족으로 구성된 복합적인 다민족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공민권을 소유한 소수 민족 가운데 하나이며, 주로 동북 3성에 집거하고 있다. 이들은 해외 한인 사회에서 유일하게 자치권을 행사하면서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와 장백조선족자치현(長白朝鮮族自治縣), 그리고 50여 개의 자치향(自治鄕)과 진(鎭), 1천 5백여 개의 조선족 촌을 세우고 전통성과 종교를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조선족들은 한말 이주하면서부터 종교와 관련을 가졌다. 해방 이전 조선족의 종교는 다종교였다. 그 유형으로는 전통 종교인 유교와 불교, 외래 종교인 기독교와 천주교, 민족적 신종교인 천도교(天道敎)· 대종교(大倧敎)·원종교(元倧敎)· 청림교(靑林敎), 친일적 종교인 시천교(侍天敎)와 제우교(濟愚敎) 등이 있었다.
동북 3성에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종교인인 동시에 교육자로서 근대 교육 운동과 종교 운동을 결합시키면서 ‘종교 구국’의 슬로건을 내걸었고, 항일 민족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1930년대 조선족 종교인수는 61,750명으로 전체 이주자의 약 6%를 차지하였다. 종교별로 살펴보면 대종교· 시천교· 천도교 등 신종교인 수는 4,373명, 불교는 3,675명, 유교는 14,543명, 천주교는 9,941명, 기독교계는 26,998명이었다.
1. 기독교
조선족 사회에 기독교는 18세기 말경 북경(北京)에 갔던 연행사(燕行使)에 의해 전래되었다. 조선족 기독교의 전래는 두 갈래로, 하나는 19세기 이후 한인의 만주(滿州) 이주와 함께 포교되었고 다른 하나는 외국인 선교사들이 동북 3성에서 직접 포교를 하였다.
해방 이전까지 조선족 종교 가운데 기독교의 교세가 가장 컸는데, 1930년대 중기에는 4만여 명에 달하여 조선족 종교인구 중 63.1%를 차지하였다. 해방 이후 대부분의 종교인들도 귀국하였는데, 기독교인도 귀국함에 따라 교세가 크게 위축되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이래 중국 공산당의 종교 정책에 따라 조선족의 종교도 위기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1978년 이후 중국 공산당의 개혁개방 정책과 종교 신앙 자유 정책에 따라 조선족 기독교도 다시 교세를 확장하였다.
1980년대 이후 조선족 기독교인은 연변(延邊)을 중심으로 1만여 명에 이르렀으며, 요령성(遼寧省)과 흑룡강성(黑龍江省)에서도 급속도로 교세가 확장되었다. 1990년의 통계에 따르면, 국가로부터 승인을 받은 삼자 교회(三自敎會)의 조선족 기독 교회는 요령성 12개, 길림성(吉林省) 9개, 흑룡강성 1개이고, 지하 교회는 요령성 12개, 길림성 15개, 흑룡강성 22개였다.
동북 3성의 대표적인 조선족 기독 교회는 심양(瀋陽)의 서탑 교회, 연변의 연길 교회, 하얼빈의 임마누엘 교회가 있으며, 연길 교회는 1만 명 이상의 신자를 확보한 대형 교회로 성장하였다.
2. 불교
조선족 사회에 불교는 한인의 이주 과정에서 포교되었으나 크게 교세를 확보하지는 못하였다. 해방 후인 1951년 조선족 불교인은 1,760명이었다.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조선족을 대상으로 포교 활동을 꾸준히 전개하고 있다.
2007년 봉은사, 조계사, 흥국사 등 조계종 소속의 사찰들은 연변자치주 불교 협회에 6억 원을 지원하였다. 이를 계기로 2008년 5월 조선족 최초의 사찰인 수월정사를 개원하였다. 천태종도 일찍부터 포교를 한 바 있으나, 현재는 조계종이 조선족 불교를 관장하고 있는 중국 당국과 우호적인 교류를 통해 교세를 확장해나고 있다.
3. 천주교
중국 동북 3성의 천주교는 국내에 앞서 일찍 포교되었다. 이러한 영향을 받은 조선족 천주교회는 한말 이주 한인을 중심으로 포교를 하였지만 교세를 크게 확장하지는 못하였다. 해방 후 1951년 연길현 팔도향에서 연변 지구 천주교인들 가운데 37명의 대표가 모여 새로운 변화를 도모하였다. 1959년에 이르러 2,363명이 신자를 확보하였으며, 1980년 연변의 ‘노마’라고 불리는 팔도구 천주교회가 회복되었다. 1983년 도문시 석빈현 출신 천주교인 엄태준이 첫 조선족 신부가 되었다.
개혁개방 이후 천주교는 수원 교구를 맡았던 김남주 주교가 동북 3성 출신이었던 관계로 적극적인 포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천주교는 비교적 중국의 법 테두리 안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파견된 신부는 한인 사목을 위주로 하고, 조선족 포교는 주로 수사나 수녀들이 맡고 있다. 이외에도 조선족을 한국에 있는 가톨릭 대학교로 유치하여 신학 교육을 시키고 있으며, 2009년 1월 현재 4명의 조선족이 경제적 지원을 아래 신학 교육을 받고 있다.
4. 신종교[기타 종교]
조선족에 대한 신종교의 포교활동은 1905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행해졌다. 일제가 용정(龍井)에 임시 파출소를 설치하자 동학계열의 친일 종교인 시천교가 일제의 후원으로 교세를 크게 확보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천도교도 동북 3성 일대에 포교되기 시작하였으며, 일제 강점 이후 대종교가 총본사를 동북 3성으로 옮기면서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3.1 운동 이후 일제의 후원으로 제우교가 동북 3성에 진출하였고, 이 시기 청림교도 함께 포교되었다. 신종교 가운데 민족적 성향이 강한 천도교와 대종교는 교세를 확장하였으나, 친일적 성향의 시천교와 제우교는 교세가 위축되었다.
해방 전까지 동북 3성의 신종교는 천도교와 대종교, 원종교가 주류를 이루었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크게 위축되었다. 청림교는 일제의 탄압으로 대성유교로 개종하였다. 해방 후에는 대부분의 천도교인과 대종교인이 귀국함으로써 교세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중국의 개혁개방과 관련된 종교 정책이 발표된 이후 원불교가 1994년부터 포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원불교는 연길(延吉), 혼춘(琿春), 단동(丹東), 장춘(長春), 심양 등에 교당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대순 진리회는 하얼빈 사범 대학에 대진 대학교 중국 캠퍼스를 두어 포교의 교두보를 확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