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가촌[동항시]

한자 于家村[東港市]
중문 于家村[东港市]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요령성 단동시 동항시 의권진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행정촌
가구수 37호
인구[남/여] 112명
개설 시기/일시 1964년
변천 시기/일시 1997년
현 소재지 요령성 단동시 동항시 의권진(북위 39°52'46.41", 동경 123°49'41.49")
정의

요령성(遼寧省) 단동시(丹東市) 지구에 속한 동항시(東港市) 의권진(椅圈鎭)의 조선족 마을.

개설

우가촌단동시 지구에 속한 동항시 의권진의 행정촌 중 하나이다. 의권진[이촨쩐]에는 몇몇 조선족이 집거하는 작은 촌락들이 있다. 장산촌(長山村), 북정자촌(北井子村)과 더 나아가 우가촌(于家村)[위지아춘]이 있다.

이 촌은 한족의 자연 촌락들이 모여서 하나의 행정 단위를 이룬 것이며 그 안에 40호의 조선족들이 집거하는 작은 마을이 있다. 이를 ‘조선족조’라고 하는데 일상적으로는 ‘선족대(鮮族隊)’라고 한다. 이 마을은 곧 우가촌 안에서 한족 마을들에 의하여 둘러싸여 있는 소수 민족 집단인 것이다.

형성 및 변천

1964년에 동구현 일대의 바닷물이 들었던 습지를 간척하면서 이주민을 모집했는데, 이때 조선족들이 대거 이주해 왔다. 처음에는 여러 곳에서 조선족들이 왔으나 지금은 관전현 출신들만이 남아 있다. 그들의 관전에서의 생활은 정치·경제적으로도 어려웠지만, 생태 환경에서도 그러하였다. 그들은 황무지를 개간하였고 주로 밭농사를 지어 옥수수와 조, 콩 등을 심었고 수전은 그리 많지 않았다.

1960년대 초 대기근을 겪은 그들은 마침 현재의 지역을 개간하는 사업에 응하여 이주해 왔다. 당시 이 지역은 바닷가로서 염분이 가득한 갯벌 지역이었다.

조선족 동포들은 이 황량한 습지에 이주하여 움막에 기거하면서 갖은 고초에도 굴하지 않고 마침내 소금기 가득한 웅덩이들을 너른 논으로 만들었다. 즉 이 마을은 조선족들이 이주하여 개척한 마을인 것이다.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에 와서 땅의 염분이 어느 정도 빠져서 겨우 벼농사도 본 궤도에 오르고 생활이 안정되어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으나, 곧 개혁개방의 바람이 불어닥쳤다. 이는 농촌의 공업화를 의미하는데 이 마을에는 기업이라고는 없다. 따라서 식량은 풍부하나 다른 현금 수입원이 없는 경제적으로 정체된 농촌의 전형이다. 이러한 형편에 따라 현재 가장 큰 수입원은 한국에 노동자로 다녀오는 것이다.

초가를 없애고 흙담을 벽돌로 바꾸고 번듯한 슬레이트 기와지붕의 집을 짓는 것은 모두 한국에 노무를 다녀온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한국으로 갈 수 있는 기회는 적기 때문에 원양 어선을 타고 뱃일을 하는데 어릴 때부터 뱃일을 익혔기 때문에 이런 일에 익숙하다. 마을의 젊은 사람들은 상당수가 한국에 다녀왔거나 지금도 한국에 머물고 있다. 한국을 다녀와서도 다시 가는 길을 모색 중이거나 한족들이 북한과의 해상 무역을 하는 데 통역 및 안내자로서 함께 일을 한다. 전반적으로 벼농사와 계절에 따른 소규모 어업 외에는 이렇다 할 경제 활동이 없다. 최근에는 바닷물을 이용한 큰새우 양식에도 손을 댔으나 병충해로 실패했고, 지금은 논게를 양식하는 사업이 있을 뿐이다. 이 촌에는 소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한족 중심의 학교이지만 따로 조선족 학급을 두고 있다.

1997년 7월 현재 44호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은 37호이며. 인구는 112명이다. 이들은 벼농사를 주업으로 삼는 한편 바닷가에 위치한 지형 조건에 따라 어업에 종사하는 반농 반어의 경제 생활을 한다.

자연 환경

압록강을 끼고 북한과 접하고 있는 남부 지역은 접경 지대라는 특성이 작용하고 있다. 해안에는 간척지가 있다.

현황

1997년 7월 현재 44호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은 37호이며, 인구는 112명이다. 소학교가 자리 잡고 있다. 한족 중심의 학교이지만 따로 조선족 학급을 두고 있다.

참고문헌
  • 『중국 요령성 한인 동포의 생활문화』(국립 민속 박물관,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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