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성 조선족 기업의 거목들, 석산린, 최수진을 이은 김춘학과 최용길의 기업가 정신

한자 黑龍江省 朝鮮族 企業의 巨木들, 石山麟, 崔秀鎭을 이은 金春學과 崔龍吉의 企業家 精神
중문 继承黑龙江省朝鲜族企业的巨木们石山麟, 崔秀镇的,金春学和崔龙吉的企业家精神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흑룡강성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인물|기업가
정의

흑룡강성 조선족 기업의 거목들, 석산린과 최수진에 이은 김춘학과 최용길의 기업가 정신.

개설

흑룡강성 조선족 기업의 발전은 찬란한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민족 업체는 물론 전국적인 민영 업체에서도 선두를 달리며 중국 전역을 주름잡던 조선족 업체들인 창녕 그룹(총재 석산린), 흑룡강 민족 개발 총공사(사장 최수진)가 민족 기업 발전에 크나큰 기여를 하였다. 또한 많은 민족 기업 인재들을 양성한 창녕 그룹은 ‘조선족 공업 대학’으로, 많은 민족 산업 무역 인재들을 양성한 민족 개발 총공사는 ‘조선족 산업 대학’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후에 여러 가지 원인으로 창녕 그룹이 본부를 진황도(秦皇島), 북경(北京)으로 옮기고 민족 개발 총공사가 부실 경영에 시달려 민족 호텔이 부도나면서 흑룡강성의 조선족 기업 발전이 크게 위축되었다.

2010년 현재 흑룡강성 지역의 조선족 업체는 약 2,000개 정도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업종별 분류에 의하면 서비스 업체가 대부분이며 기계, 급수설비, 보일러, 펌프 등을 생산하는 제조업체가 200여 개이고, IT 등 첨단 산업에 종사하는 업체는 극히 드물다. 또한 한국, 러시아, 일본 등 국제무역에 종사하는 업체도 여러 개가 있다.

현재 하얼빈 조선족 상공회, 흑룡강 조선족 상공회 등을 주축으로 조선족 기업들이 뭉치고 하얼빈 한국 기업 투자 협의회, 한국 상회 등을 중심으로 한국 업체들이 뭉치면서 다양한 산업 변화와 발전을 시도하고 있다. 다음에서는 흑룡강성의 건설적인 기업인인 석산린과 최수진을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대표주자로 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제조 업체 창녕 집단 석산린 회장

석산린은 당대 중국에서 이름난 조선족 과학 기술형 창업가였다. 1992년 현재 중국에는 한족을 포함하여 총 56개 민족이 살고 있는데, 그 중에서 조선족들의 평균 교육, 문화 수준이 제일 높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중국 전체 5억 2천만 재직인구 중 과학 연구 및 종합 기술 사업에 종사하는 전문 인력이 1백 20만 명으로 재직 총인구의 2.3%를 차지한다. 55개 소수 민족의 3천만 명 재직 인구 중 과학 연구 및 종합 기술 사업에 종사하는 전문 인원이 4만 명으로 재직 총인구의 1.2%를 차지하고 있다. 이 중 조선족은 91만 명 재직 인구 중 과학 연구 및 종합 기술 사업에 종사하는 전문 인원이 3천 5백 89명으로 재직 총인구의 3.9%를 차지하였다. 이는 전국 평균 수준에 비해 1.6%가 더 높고, 전국 소수 민족의 평균 수준에 비해 2배 이상 높은 수치이다.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이 실시되면서 전국 각지 각 부문에 산재되어 있는 조선족 과학 기술 인재들은 능력을 발휘하여 새로운 사업의 영역에서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석산린은 바로 이런 수많은 조선족 창업가들 중 한 분야의 특출한 대표 인물이다. 중국 내 조선족 기업가들은 가장 성공적인 조선족 개인 사업가로 하얼빈에서 창녕 급수 설비창을 경영하는 석산린 씨를 주저 없이 꼽는다. 1984년도에 48만 위안[8천 8백만 원]의 빚을 얻어 시작한 기업이 4년 만에 매출이 1억 위안 순이익 1천여만 위안이 넘는 중국내 굴지의 민간 기업으로 성장, 인민 일보와 중앙 텔레비전에서 「석산린 기인 기창」,「역경속의 사나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할 만큼 대표적 민간 기업인으로 꼽히고 있기 때문이다. “‘창녕’이란 회사 이름은 선친의 고향 경남 창녕에서 딴 것이지요. 어머님을 올해 중으로 친척 방문차 고향에 보내드릴 예정입니다. 저는 사업 때문에 시간이 쉽게 나지는 않지만 회사 이름에서 보듯 고향을 잊지는 않고 있습니다.”

새 공장부지 답사를 위해 연길에 들른 석 사장은 급수 설비창이란 한 마디로 고층 빌딩의 맨 위층까지 물을 공급하는 기계를 설계하고 설치하는 회사라고 설명했다. "하얼빈 공대를 졸업하던 67년 문화혁명에 휩쓸려 이른바 54개 조목의 반혁명 발언이 문제돼 핵물리학을 전공한 보람도 없이 10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감옥에 있는 동안 감옥 내 공장을 개선, 중국 내에서 선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기도 했는데 1979년 문화 혁명이 실패로 끝나게 되자 풀려나 흑룡강 상업 학원 강사가 됐지요. 이때 액압 전동 이론에 의한 자동 급수 장치를 개발, 제 발명에 자신을 갖고 사업을 꿈꿨습니다.”

석 사장은 자신이 개발한 자동 급수 장치가 독창적인 탓도 있지만 굳이 사업이 번창한 이유를 대라면 판매 전략, 인재 전략, 제품 전략의 결과라고 밝혔다. 석산린 자신은 자본주의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다지만 그의 3대 전략 내용은 사실상 서방 사회의 경영 전략과 다를 게 없다. “중국 전역에 1백 8개의 지사와 매매 상담소를 두고 고객 정보를 매일 보고토록 의무화했습니다. 공기업 같으면 안 되겠지만 보고를 안 할 경우 하루 2만 위안의 벌금을 물리고 대신 어김없이 보고하면 매일 20위안 씩 장려금을 줬습니다. 동시에 인민 일보와 중앙 텔레비전에는 1987년에 1백 80만 위안 88년에는 3백만 위안 어치의 광고도 했지요.”

석 사장은 인재 전략에 대해 자신의 회사에 하얼빈 공대대련 선박 대학 출신이 50명이 넘고 이들은 기술 연구소 판매 부문의 책임자가 되는 동시에 공기업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우월한 대우를 해줘 창의성을 스스로 발휘하게 해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제품 전략으로는 급수 설비에서부터 시작했으나 요즘은 건축까지 해주면서 사업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고 말했다. 교통 사정이 좋지 않은 중국 현실에서 석 사장은 주로 밤기차를 이용해 자고 목적지에는 아침에 도착, 낮에 일을 보는 방법으로 1주일에 평균 6개 도시를 방문하는 강행군으로 공사 현장을 다니고 고객을 만난다고 말했다. “언젠가는 한국 기업과 같이 일해보고 싶습니다. 저희 회사 제품을 소련에도 수출해 국제적인 무역과 공사 경험도 축적하고 있습니다. 삼성, 현대, 대우, LG 등 한국의 대표적 기업 관계자들도 만나봤는데 한국 회사 제품이 훌륭하기 때문에 합작 사업을 해보고 싶습니다.” 석씨는 삼성, LG, 현대 등 주요 기업들과도 협력 관계를 모색하고 있다.

서비스 업체인 흑룡강성 민족 경제 개발 공사의 최수진

지금 중국 대륙에 살고 있는 조선족은 총 1백 92만 명으로 주로 동북의 길림, 흑룡강, 요령 등 동북 삼성에 집중되어 있다. 그 중 60%의 인구가 농촌에서 벼농사에 종사하고 있는데, 매호당[평균 다섯 식구] 1.5향[1.5만㎡] 정도의 수전을 경작하며 1.5만 척[7.5t] 정도를 수확하고 있다. 그 금액은 8천 위안에 달하며, 인구 당 연평균 순수입은 8백 위안으로 먹고 살아가기에는 큰 지장이 없다. 그러나 지금 조선족 마을에서 경작지를 더 확대할 수 없고 농업 수입이 낮다는 이유 때문에, 그리고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과 함께 문화 수준이 비교적 높다는 조건을 이용하여 일부 농민들이 농사를 버리고 수입이 더 높은 기타 산업으로 이동하고 있다.

최수진은 바로 이런 조선족 농민들 중의 한 개 특출한 대표 인물이다. 농민 출신인 최수진이 한 사람의 기업가로 성장하는 과정은 바로 현재 중국 조선족 농촌의 대변혁과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그들의 시대적 정신 및 중국개혁개방 정책의 발전을 생생하게 반영해 주고 있다.

최수진 회장의 흑룡강성 민족 경제 개발 공사가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상황은 다음의 내용에서 확인 가능하다.

2014년 6월, 성 정부는 일부분 단위의 번경 무역권을 비준하였다. 그 가운데 최수진의 기업이 있었다. 집체 기업 성적으로는 처음이었다. 같은 해 8월, 최수진은 소련과의 무역을 본격적으로 개척하여 한 공사와 하얼빈에서 첫 담판을 가졌다. 이 담판에서 수출입액 1,000만 위안의 무역 계약이 맺어졌다. 9월에는 총공사가 미국워싱턴 국제 기업 유한 회사와 합작하여 식료품 유한 회사를 세우고 개업하였다. 10월에는 4,000여 만 위안을 투자하여 건설하는 무역 종합 복무 빌딩 공사가 시공의 첫 삽을 떴다. 3년 사이 줄곧 자본주의 나라와의 무역 금지를 못 박아온 총공사 북경 주재소는 이미 미국, 캐나다, 일본, 홍콩 등 나라와 지구의 70여 개 기업과 무역 관계를 건립하고 전방위 무역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가고 있다.

1988년 9월 19일, 흑룡강 일보는 또 제1면 머리 기사로 놀라운 소식을 전하였다. 종업원이 100명 가량인 이 공사의 금년 상반년 수출입 총액은 6,000만 위안, 이윤은 800만 위안, 상납한 세금은 850만 위안으로 종업원당 영업액과 세금액이 모두 전 성 상업계의 으뜸으로 보도되었다. 1989년 2월 3일, 흑룡강 신문은 더욱 놀라운 소식을 전하였다. 1988년 공사의 총 경영액 1억 4,000만 위안, 이윤 세금액 2,200만 위안, 대외 무역에서 처음으로 1억 위안 고비를 돌파했다는 것이었다. 곧 최수진의 이름은 성 내외 각계층 인사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한국 기업과의 성공적인 합작 사례, 금약 그룹의 김춘학 회장

한중 수교 이후 한중간의 기업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한국 기업이 중국에 진출한 케이스는 많지만, 중국 기업이 한국의 유수 기업과 합작하여 국내로 진출하는 경우는 아직도 드문 편이다. 금약(金躍) 그룹의 김춘학 회장은 과감하게 한국의 선진 기술을 지닌 회사와 합작을 추진하고 첨단 산업을 활용하여 한국 시장 진출은 물론 세계 시장으로 도약하기 위해 선구자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금약 그룹은 2000년도에 설립되었고, 현재 그룹 산하에는 16개의 자회사가 있으며 그룹의 총자산은 10억 위안 규모이다. 금약 그룹은 창사 이래 초고속 발전을 거듭하여 현재는 첨단 기술 산업과 신재생 에너지 산업을 주력 사업으로 하여, 부동산 개발 및 시행, 건설 공사 시공, 기계 가공 산업과 군수 산업 상품 생산을 하는 종합 그룹으로 고속 성장하였다. 또한 국가에서 인정한 건설 부문 및 부동산 분야의 면허 및 건축 시공 분야는 1급 면허를 보유하고 있다. 부동산 개발 분야는 2급 면허를 보유하고 있다. 또한 ‘국가 상공 총기관’으로부터 계약을 철저히 준수하고, 기업의 신용을 1순위로 중요시 하는 기업이라는 영예를 얻었으며, 흑룡강성 위원회 성정부의 표창을 여러 차례 수상하였다. 현재는 흑룡강성 인민 대표 및 인민 대표 상임 의원이다. 그리고 한국과 미국에 태양광 발전소 건설 시공 회사가 있으며, 아시아, 유럽, 북미 지역의 기업과 장기적인 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

김춘학 회장의 개인적, 사회적 배경

중국흑룡강성 목단강시(牧丹江市) 남쪽 영안시(寧安市)가 고향인 조선족 2세 김춘학은 소년 시절 학교에서 1등을 도맡아 했지만 친구들에게 ‘조선족’이라는 무시와 놀림을 당하기 일쑤였다. 전라도가 고향인 그의 어머니는 항일 독립운동을 하다 중국 공산당원이 됐다. 당시 목단강시는 독립 투사들의 근거지였다. 아버지는 평양 출신으로 도로 기술자였다.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어머니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소년의 눈에 조선족 남자는 권위적이고 폭력적이었다. 소년은 자신이 조선족이라는 것이 싫었다. 이불 속에서 몰래 한국 방송을 들으며 조국을 그리워하던 어머니도 아들에게 집 밖에서는 한국어를 입에 올리지 못하게 했다. 소년에게 조선족은 자신의 인생을 고달프게 하는 멍에일 뿐이었다. 200만 조선족 중 가장 성공한 기업인으로 꼽히는 김춘학중국금약 그룹 회장의 이야기이다. 그는 이제 조선족임을 누구보다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김 회장은 흑룡강성에서 입지전적 인물이다. 2001년 부동산 회사로 출발한 금약 그룹은 한국과 중국에 IT·태양광 발전 등 16개의 자회사를 가지고 있고 김 회장의 재산은 3,000억 위안이 넘는다. 흑룡강성에 가장 먼저 아파트를 건설한 것도 김 회장이다. 북경, 해남도(海南島)를 비롯해 현재도 상해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건설하고 있다. 지금까지 김 회장이 중국 전역에 개발한 땅이 330만여㎡[약 100만평]에 이른다. 올해는 한국에 30MW 규모의 태양광 발전소 건설을 추진한다. 총 900억 위안이 들어가는 발전소 건설을 위해 전국에 100만㎡[약 30만평]의 부지를 이미 확보해 놓았다. 금약 그룹은 10년 동안 초고속 성장을 했다. 2009년에는 흑룡강성 기업 연합회와 기업인 협회 공동 주최로 선정하는 ‘흑룡강성에서 가장 주목받는 기업인’에 꼽혔다.

그동안 김 회장은 조선족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섰다. 흑룡강성에 조선족 학교를 지어주고, 조선족 대학생 200명에게 매년 2억 위안씩 장학금을 주고 있다. 현재 흑룡강성 조선족 43만 명을 대표하는 흑룡강성 공산당 위원회 인민 대표 상임 위원도 맡고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도의원인 셈이다. 상임 위원은 5년 임기로 이번이 2선 째이다. 올 10월에는 국회의원 격인 중국 인민 대표에 도전할 계획이다. 사업 때문에 한 달에 두 번 이상 한국을 찾는 김 회장은 조선족 대표로 한·중 교류에도 힘을 보태고 있다.

21C 한중 교류 협회[회장 김한규]는 한·중 수교 20주년을 기념하여 김춘학 회장을 ‘자랑스러운 한중인’으로 선정했다. 사단법인 21C 한중 교류 협회는 한·중 지도자들의 교류를 위해 2001년 설립되었다. 중국 제2의 외교부라 불리는 중국 인민 외교 학회와 자매 결연을 하고 민간 외교에 앞장서고 있다. 지난 2월 8일 ‘자랑스러운 한중인’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김 회장을 서울 중구 을지로 1가21C 한중 교류 협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단신인 김 회장은 다부져 보였고 눈빛이 살아 있었다. 한국어는 다소 어눌했지만 의사 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 “이렇게 사업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제가 조선족이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조선족들은 생활력이 아주 강인합니다. 제가 조선족이라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조선족을 무시하던 한족들이 이젠 저한테 꼼짝 못합니다.”

러시아와의 무역으로 성공한 사례, 길신 그룹의 최용길

동녕길신 공업 무역(그룹) 유한 책임 공사는 국가 상무부에서 인정한 일반 무역권과 인접한 국가와 소액 무역을 진행할 권리를 갖고 있는 외향형 그룹 기업이다. 그룹 회사의 등록 자본금은 7,760만 위안에 달하고, 현재 그룹의 자산 총액은 2.4억 위안에 달한다. 그룹은 1,600여 명의 직원이 있고, 연간 수출 총액은 2.6억 달러이며 2005년에는 국가에 6,000만 위안의 세금을 납부하였다. 회사는 변경 무역에 있어서 전 성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해관 A급 관리 기업이다. 그룹은 길신 목업, 길신 동남 목업 유한 회사, 길신 빌딩, 길신 경제 무역 회사, 길신 여행사, 길신 건축 회사, 신흥 도자기 유한 책임 공사, 길원 물류 회사로 구성되어 있다. 변경 무역으로는 러시아 과일 야채 도매 시장, 국제 길신 운송 회사, 우수리스크 중러 목재 가공 공장, 우수리스크 길신 신발 공장, 우수리스크 길신 가구 공장, 우수리스크 길신 삼림 개발 프로젝트 등이 있고, 또한 북한에 철광 프로젝트도 개발하고 있다.

기업은 그룹화, 글로벌화, 실업화를 경영 방침으로 하고 공업과 무역을 통합하는 발전의 길을 걷고 있다. 또한 길신 그룹은 중국 내 뿐만 아니라 러시아 원동 지구에도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1990년에 동녕현의 자그마한 기업소에서 일반 노동자로 일하던 최용길 씨는 갓 붐이 일기 시작한 러시아 장삿길에 올랐다. 길지 않은 10년 사이 최용길 씨는 장사 경험이 별로 없었지만,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철물과 목재, 채소, 복장 등의 장사에서 외화를 대량 벌어들였다. 하지만 치열한 경쟁과 루블(RUB) 환율의 급격한 하락세가 그의 기업에도 큰 위협을 가져다주었다. 2006년도에 나라에서 제기한 '기업의 외국 진출' 전략에 눈길을 돌린 최용길 씨는 제품에 대한 원가 분석을 해보았다. 예를 들면, 중국산 신 한 켤레를 수출하자면 적어도 3~5달러의 해관세를 내야 하지만, 신 만드는 원재료를 수출하면 원가를 25% 절약할 수 있었으며 가구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러시아에서는 흔한 목재를 현지에서 가공하여 호주, 일본 등 여러 나라에 수출한다면 그 경제 성과는 막대하다는 판단이 섰다.

이런 생각에 이르자, 최용길 씨는 대담하게 부지면적이 10만 ㎡ 되는 공업 단지를 우수리스크시에 세웠다. 그리고 가전 제품, 신제품, 목재 제품, 물류, 서비스 등 관련 5개 기업을 세웠다. 현재 이 공업 단지에는 절강, 복건, 흑룡강 등지에서 온 신발 생산 기업만 해도 14개가 있다. 매년 운동화, 구두, 슬리퍼 등 여러 가지 신발 2,400만 켤레를 생산하는데 러시아 총 생산량의 10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즉 러시아 신발 10켤레 중 1켤레가 최용길 씨가 이끄는 이 공업 단지에서 생산하게 되는 셈이다. 또한 중국광주(廣州)에서 이름난 목제품 기술원을 초빙하여 여러 가지 가구들을 가공하여 러시아 대도시나 미국, 일본 등 여러 나라와 지역에 수출하는데 생산하기가 바쁘게 판매되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 이곳에서는 주로 고급 가구를 생산하는데 가격도 매우 비싸서 고급 침대 하나에 8만 루블[약 2만 위안]에 달한다. 2009년도에 이 공업 단지의 총 판매량은 1억 7천만 달러에 이르렀으며, 납세금 또한 1,900만 달러에 달해 전 우수리스크시에서 1위를 차지했다.

최근에는 북경, 온주, 상해 등지의 700여 개 기업들이 최용길 씨의 경외 공업 단지를 참관하고 고찰한 후 전자, 핸드폰, 정밀기기 등 관련 기업을 창업하겠다고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 “앞으로 좀 더 시야를 넓혀 이 공업 단지에 병원, 상점, 호텔 등 서비스 업체를 설립하여 더 많은 기업들을 끌어들일 계획입니다.” 지난 4월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의 높은 평가를 받고 자부심에 가득찬 최용길 씨는 이렇게 말했다.

참고문헌
  • 『흑룡강성 조선족 기업의 성장과 기업가 정신』(2012, 북 코리아)
  • 「김춘학 회장과의 인터뷰」(『㈜조선 뉴스 프레스』 2193호, 2012)
  • 「석산린과의 인터뷰」(『매일 경제』, 1990)
  • 중앙 인민 방송국(http://www.krcnr.cn/jj/qyft/201011/t20101113_63757.html)
  • 「‘중국 조선족 걸출 인물’ 20인은 누구인가」(『매일 경제』, 2014,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4&no=64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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