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조선족 기업의 산실, 연변 그리고 연변 조선족 기업의 성장 과정

한자 中國 朝鮮族 企業의 産室, 延邊 그리고 延邊 朝鮮族 企業의 成長 過程
중문 中国朝鲜族企业的产房,延边和延边朝鲜族企业的成长过程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경제|기업 활동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2년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1년 이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3년 이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8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9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6년도
정의

조선족 기업의 산실, 연변 그리고 연변 조선족 기업의 성장 과정.

개설

조개가 진주를 만드는 데는 5~10년이란 세월이 걸린다고 한다. 왜냐하면 진주 한 알을 생산하기 위해서 조개는 10년 동안 이물질과의 싸움에서 오는 고통과 아픔을 참아야 하기 때문이다.

수 년 전 한국부산에서 개최된 세계 한상 대회에는 조선족 기업인 200여 명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는 “오늘 여기 참석하신 조선족 기업인 여러분은 진흙속의 진주 같은 존재입니다. 향후 10년 뒤 여러분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알게 될 것이니 지금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고 의기소침해 하거나 낙심하지 맙시다.”라는 내빈의 축사가 있었다. 그로부터 10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 상전벽해와 같이 10년 전 보잘 것 없었던 조선족 기업들은 지금은 어엿한 중견 기업이 되어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연길의 초기 공·상업

연길은 이전에 국자가(局子街) 또는 옌지강[延集岡]이라 불렸다. 일찍이 만청(晩淸) 시기의 연길 지구는 삼림이 무성한 황야여서 인가가 아주 드물었다. 1869년에 조선 북부 지구에 심각한 자연 재해가 발생하여 수많은 유민들이 봉금령에도 불구하고 두만강을 건너 연변 각지로 이주해왔다. 이로 인해 연길의 인구는 급속히 늘어나게 되었다. 청나라 정부에서 설립한 초간국(招墾局)에서는 이주해온 조선 농민들에게 직예(直隶), 산동(山東) 등지로부터 이주해 온 한족 개간민들과 함께 넓은 황무지를 개간하게 하였다.

1915년(민국 4년) 중국 정부는 동북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이 중국 국적에 가입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 시기에 연길은 교통이 불편하였고 백성들의 생활이 가난하였으며, 소금과 천 및 기타 생활, 생산 용품들이 매우 부족했다. 따라서 연길에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일부 황아 상인과 피혁 상인, 약재 상인 등이 전후로 연길에 발을 들여놓았다.

민국 초년[1912년경]에 산동과 산서, 하남, 하북, 안휘 등 성의 일부 소상인들과 수공업자들이 연길을 왕래하면서부터, 연길에는 점차적으로 작은 가게와 단순한 수공업 작업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그때 생겨난 《만발상》과 《금집성》이 두 대장간은 국자가[연길]에서 가장 먼저 생겨난 대장간이었다.

1921년 이후에 연길에는 상점이 적지 않게 생겨났는데 대표적인 상점들로는 다음과 같은 12개의 상점이 있었다. 이는 영화흥 잡화점, 덕순성 잡화점, 천증의 비단 잡화점, 길순화 포목 비단점, 복순덕 식료품 잡화점, 천순성 식료품 잡화점, 인화훙 잡화점, 복성덕 일용 잡화 도매점, 복화성 잡화점, 광순성 잡화점, 춘화영 잡화점 등이다. 그리고 백러시아인이 경영하는 류브린스끼 철물 상점이 있었다. 이 시기에는 연변이 아직 미개발 상태였기 때문에 대다수 상점들에서는 쇠솥과 보습, 화로, 사탕, 과자 등 여러 가지 종류와 산간 지대 산물 및 베(천), 소량의 견직물 및 기타 생활 용품들을 위주로 경영하였다. 대부분 주주들을 모아 합작 경영하였기 때문에 어떤 점포에는 주주가 5~6명씩 되었고, 이런 상점들은 1945년 8월 15일 광복 때까지 경영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 후 2년이 지난 1923년 후부터 연길에는 여러 가지 유형의 점포가 갈수록 많아졌는데 무명천 가게, 비단천 가게, 식료품 가게, 식당, 목욕탕 등 전문적인 점포들이 많이 생겼으며 평무늬천, 줄무늬 천 및 기타 서양 상품들도 연길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1929년 이후부터 연길에는 새로 개업을 하였거나 혹은 원래의 점포 이름을 바꾸어서 재개업한 원발흥, 천흥원, 천순복, 복화성, 통순복, 순발화, 경복상 등 식료품 점포와 화무창 철물 상점 및 도향춘 등 잡화점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1938년부터 연길에는 또 《영풍호》,《태흥후》,《거영구》 등의 비단 점포가 나타났다. 이밖에도 양철포, 대장간, 가죽방, 도로기방, 약방 및 이발관, 사진관, 여관 등이 영업을 시작하였다. 이 시기를 해방 전 연길 공상업 발전의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때 연길에는 크고 작은 점포와 여러 가지 수공업 작업실이 200여 곳 있었으며 시장이 비교적 번창하였고, 상품의 종류가 전례 없이 많았다. 서양 물건과 일본 상품이 대량으로 연길로 쏟아져 들어왔으며 여러 종류의 면직물과 견직물이 시장에 넘쳐났다. 이 시기의 연길시 인구는 약 2만 명 정도가 되었다.

중국 조선족 기업의 산실, 연변

지금은 조선족 기업들이 연변을 비롯한 동북 3성 뿐만 아니라 북경(北京), 천진(天津), 청도(靑島), 상해(上海), 심천(深圳), 광주(廣州) 등 중국 대도시에서 우후죽순처럼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하지만 개혁개방과 한중 수교 이전만 하여도 조선족 기업은 연변과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등 동북 3성에 한정되어 있었다.

1952년 9월 3일에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성립된 이래 중국 공산당 민족 정책의 혜택으로 연변 조선족들의 생산에 대한 능력 충분히 발휘되었고, 풍속이나 민족 특유의 소비 수요도 존중되었다. 따라서 조선족들의 일상 생활에 필요한 조선족 특용품 생산 부문의 발전도 당의 많은 지원을 받게 되었고, 이에 따라 조선족 특용품을 전문적으로 생산하거나 부수적으로 생산하는 업종별 부문이 점차 형성되었다.

1952년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성립된 이래 30여 년 간의 노력과 성장의 결과, 조선족들의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제품인 비단, 편직물, 옷, 구두, 모자, 도자기, 고무신, 비닐 제품, 페인트, 목제품, 가구, 철제품, 악기, 알루미늄 제품, 취사 도구, 민족 수공업 제품 및 농기구 등 20여 가지 유형의 생산 부문을 갖춘 조선족 특용품 공업 체계가 형성되다. 따라서 연변은 중국 전역 11개 민족 특용품 공업 기지 중의 하나로 되었다.

연변의 조선족 특용품 생산 기업

1986년도 연변의 조선족 특용품 생산 기업은 75개로 늘어나 1952년도 보다 무려 6배나 성장하였다. 그 중에서도 민족 특용품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기업은 50개나 되었다. 또한 민족 특용품 전문 생산 기업의 종업원은 2만 5천여 명 정도 되었고, 그중 조선족 종업원은 1만 8천여 명에 달하였다. 또한 1986년도 한 해만도 조선족 특용품 공업 생산액은 1억여 위안에 달하여 연변 공업 총생산액의 4.8%를 차지하였다. 이를 통해 1952년도와 비교하여 15배 이상 성장되었다. 따라서 지난 30여 년간 제품 생산 능력이 크게 향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연변의 조선족 특용품 공업은 처음부터 줄곧 중국 정부의 많은 관심과 지원을 받았다. 1949년 중국 공산당과 중국 정부에서는 재정이 풍부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재정 자금을 조선족 특용품 공업 건설에 지원하여 도문에 고무 공장을, 훈춘에 조선족 도자기 공장을 세우게 하였다. 조선족들의 고무신 및 구두 등 의복 문제와 일용 생활 용품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서다. 이 두 공장은 연변에 제일 처음으로 세워진 조선족 특용품 공업 기업들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성립된 1952년도부터 1959년까지의 8년 동안은 연변의 조선족 특용품 공업이 신속하게 발전된 시기였다. 예를 들어,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조선족의 비중이 비교적 큰 연길, 도문, 용정, 화룡과 훈춘 등지에서는 전후로 대량의 자금을 투자하여 민족 복장과 편직물, 민족 식품, 민족 가마와 알루미늄으로 만든 취사 도구, 민족 가구와 페인트, 민족 일용 철제품 등 7개 부문을 망라한 15개의 기업을 설립함으로써 조선족 특용품 공업의 전면적인 발전을 위해 훌륭한 물질적 토대를 닦아 놓았다. 또한 1962년 이후 10년 사이에 10여 개소에 달하는 민족 공업 기업체가 새로 설립되었다. 연길 조선족 비단 공장과 조선족 옷 공장, 조선족 어린이옷 공장, 조선족 악기 공장 등이 있다. 도문에는 민족 비닐 공장과 민족 편직물 공장, 민족 꽃신 공장, 민족 수놓이 공장 등이 있고 용정에는 민족 옷 공장, 화룡에는 민족 면방직 공장과 민족 교편물 공장 등이다.

위에서 말한 기업체들의 설립과 발전은 연변의 조선족 특용 공업이 점차적으로 도약, 발전하려는 징조들을 보여준다. 그러나 10년 동란 시기에 연변의 조선 민족 특용품 공업은 전반 민족 사업과 마찬가지로 많은 피해를 받았다. 즉 악기, 옷, 일용철제품 등 공업은 「봉건주의, 자본주의, 수정주의」로 몰리고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들은 계속되는 핍박에 의해 문을 닫게 되었다. 기타 민족 공업도 마찬가지로 핍박 속에서 생산을 중단하고 문을 닫게 되어 연변조선 민족 공업 나아가서는 전체적인 중국 경제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개혁개방과 연변의 조선 민족 공업

1978년 중국의 대변혁이자 시장 경제도입의 단초가 된 개혁개방 이래 그 동안 성장이 중단되었던 연변의 조선 민족 공업에도 활력이 생겼다. 중국 정부와 길림성에서의 우선적 투자와 지원이 도약과 발전의 견인차가 되었기 때문이다. 즉 지난날 핍박에 의해 문을 닫았던 조선족 악기, 옷, 전통 일용품 등 제조 업체가 신속히 회복되고 기타 기존의 수많은 기업체의 생산 능력이 강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민족 편직물, 민족 모자와 신, 민족 과자, 민족 법랑 칠기, 민족 도자기, 민족 공예 미술품, 민족 가구 등을 포함한 30여 개소와 민족 경공업과 민족 방직 공업 기업체가 새로이 설립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집중적인 투자에 의하여 설립된 조선족 법랑 칠기, 가죽 구두, 과자, 공예 미술품 등이 새로운 항목으로 자리 잡았다. 이어서 연변 조선족 특용품 공업이 연변 경공업, 방직 공업의 모태로 자리 잡았다. 개혁개방 이후 몇 년 사이에 조선족 특용품 공업은 생산 능력이 곱절로 늘어나고 전문화로 생산 수준이 눈에 띄게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제품의 종류도 초창기의 고무신과 오지독 생산의 2종류로부터 300여 종으로 늘어났다.

조선족 특용품 공업은 생산품의 양적 측면뿐만 아니라 질적인 측면에서도 고급화되어 자치주 내의 소비자들의 수요를 만족시킬 뿐만 아니라 중국 내의 10여 개 성, 자치주와 직할시에 공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부 제품은 일본과 동남아 지역에 수출도 하고 있다. 1990년대 들어서는 연변에서 생산된 조선족 가마, 밥상, 찬장, 진달래표 어린이옷 등 아홉 가지 제품이 중국 소수 민족 경공업 우수 제품으로 선정되었다. 연길시 조선족 일용 주물 공장, 연길시 조선족 모자 공장, 도문시 민족 비닐 공장, 용정 민족 목제품 공장 등 6개의 기업이 전국 소수 민족 특용품 선진 기업으로 선정되었다. 또한 조선 민족 공업이 신속히 발전하고 우수 제품이 날로 늘어남에 따라 수출하는 제품도 계속적으로 늘어났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전체적으로 120여 종에 달하는 민족 공업 제품이 외국에 수출되어 벌어들이는 외화가 1,500여 만 달러에 달하였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에는 갑을 방직(현 대경 방직)이 한국 투자 1호 기업으로 연변에 정착하면서 한국의 의류, 방직 등 노동집약형 제조 업체와 각종 서비스 업체가 진출했다. 관광이나 학업을 위해 연변을 찾는 한국인들이 점차 많아져서 당시 연변의 한국인은 1만 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2000년에 들어서 연변에는 조선족이 경영하는 기업체가 약 1천여 개 있으며 주된 업종은 부동산 개발이나 건설, 무역, 서비스업체 등이다. 대표적인 기업들을 예로 들면 전규상 회장이 경영하는 길림 천우 그룹, 최정금 회장이 경영하는 연변 국제 무역 대하 유한 책임 공사, 김길춘 회장이 경영하는 백두산 실업 유한 회사, 김창익 회장이 경영하는 신원 그룹, 이동철 회장이 경영하는 애득 그룹 등이 있다. 이를 자본금 규모별로 분류해 보면 1억 위안에 달하는 기업은 10여 개, 1천만 위안 이상에 달하는 기업은 40여 개인 것으로 나타났다.

연변 조선족 기업의 경영 활동

연변 조선족 기업의 업종별 현황을 종합해보면 서비스업, 제조업, 도소매업 순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서비스업 중에서는 음식업에 제조업 중에서는 건설업과 음식가공업 그리고 도소매업 중에서는 의류·액세서리 가방 전문업에 주로 종사하고 있다. 연변 조선족 기업이 아직은 선진국형 기업 모형에 진입하지 못하고 있다. 기업을 경영하면서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과잉 경쟁’이다. 경영상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사항으로는 ‘기술 개발’[89%]과 ‘사업 확장 및 판로 개척’[87%]인 것으로 나타났다. 연변의 조선족 기업들은 38%가 기업 경영에 필요한 자금을 ‘개인 저축’을 통해서 조달하며, ‘친인척’ 을 통해서 조달하는 경우도 36%에 이른다.

연변의 조선족 기업들은 회사에서 필요한 인력을 채용 시 ‘공개 채용’[46%]을 최우선으로 고려한다. 다음으로는 ‘연고 채용과 공개 채용’[41%]을 병용해서 직원을 채용하고 있다. 도한 ‘종업원에 대한 교육’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93%]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연변의 조선족 기업들은 임금 결정 시 ‘능력’[80%]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며, 종업원 복지 정책으로는 ‘식당 및 식비 부담’[38%]을 주요하게 여긴다. 종업원과의 주된 의사 소통 수단으로서는 ‘사내 상조회’[44%]와 ‘시내 동호회’[25%]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어서 연변 조선족 기업들의 정보화 정도를 보면 ‘영업 관리’에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가장 많이 활용[40%]하며, 다음으로는 ‘고객 관리’와 ‘인사 및 급여 관리’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기업의 반 이상이 홈페이지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고 응답함으로써 아직은 기업의 정보화가 만족스러운 수준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연변 조선족 기업의 네트워크 구축

21세기는 글로벌 네트워킹 시대이고 지식 경영 시대이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국가든 어떻게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미래의 발전 가능성과 위상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척도가 된다. 따라서 연변 조선족 기업의 네트워크 구축에 대한 실태를 조사 분석하는 것은 미래 연변 조선조 기업의 발전 가능성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자 척도라고 생각된다.

연변 조선족 기업을 대상으로 네트워크에 대한 설문 조사를 통해서는 중국 내 및 해외 기업이나 단체와의 네트워크 구축 정도를 알 수 있다. 첫째, 연변 조선족 기업은 중국 대도시에 있는 조선족 기업[88%]들과는 원재료나 제품 조달 측면에서, 중국에 진출한 한국 투자 기업[77%]과는 사업 정보 교환이나 판로 개척 부분에서 각각 상호 협력하고 있다. 한국에 있는 기업[79%]과도 원재료나 제품 조달, 사업 정보 교환 분야에서 강한 연대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연변 조선족 기업은 민족 금융 기관의 설립 필요성[73%]를 강하게 열망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둘째, 연변 조선족 기업은 중국 내 외국 기업[33%]이나 동종 업종 기업가 협회[39%]와는 중간 연대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셋째, 연변조선족 기업은 중국 기업[24%]과는 사업 정보 교환으로 그리고 해외 외국 기업[25%]과는 합자나 합작 등에서 약한 연대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넷째, 연변 조선족 기업은 한국에 있는 기업과는 수출[46%] 및 완제품 수입[73%] 측면에서 상호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연변 조선족 기업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종합해 볼 때 가장 강한 연대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는 대상은 중국 조선족 기업[88%]과 한국에 있는 기업[79%], 한국 투자 기업[77%] 순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향후 글로벌 한상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된다.

연변 조선족 기업의 미래 비전과 기업가 정신

세계적인 부자이자 기업가인 워렌 버핏은 고향인 미국의 조그마한 시골 오마하에서 ‘버크셔 해서 웨이’ 회사를 경영하면서 세계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지구촌의 투자가들은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이고 투자에 대한 의사 결정을 한다. 연변조선족자치주 또한 중국 대도시에 비해서 규모나 인구 면에서 크지는 않지만 중국 조선족들의 마음의 고향이며 조선족 기업의 산실이다. 워렌 버핏을 예로 들었던 것처럼, 기업의 성장은 기업이 처해있는 주위 환경의 영향보다는 기업을 경영하는 기업가의 마인드 즉 기업가 정신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변 조선족 기업을 대상으로 연구 조사한 바에 의하면, 연변 조선족 기업들은 비교적 건실하게 성장하고 있으며, 한국 기업들과의 네트워크가 잘 구축되어 있다. 연변대학 등의 최고 경영자 과정에서 선진 경영 기법을 학습하여 기업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다. 또한 중국 정부의 동북 진흥 정책에 따라서 연변 조선족 기업에게 한 단계 더 도약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다가오고 있다. 게다가 더 중요한 것은 연변 조선족 기업을 이끌어가는 지도자인 전규상 회장의 긍정적인 마인드와 글로벌화 된 사고 방식이 연변 조선족 기업의 밝은 미래를 기대케 한다.

전규상 회장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의 조선족 사회가 중대한 기로에 놓였다고 진단하면서도 “탈 연변 현상은 조선족 공동체 팽창 발전의 징표”라고 하면서 이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낙관했다. 또한 전규상 회장은 “조선족 공동체의 협력과 상생을 위해 조선족 기업가 협회가 적극적인 역할을 하겠으며 궁극적으로는 국제적인 한민족 네트워크가 형성되어야 하고 한국 기업들이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연변에 투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한국 기업과의 네트워크를 중시했다. 전규상 회장은 또한 한국과 중국의 조선족 사회가 상생할 수 있는 길로서 신뢰 구축과 소통을 그리고 재외 동포의 취업과 관련해서 포용 정책을 더욱 확대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위기 앞에서 절대 긍정을 외치면서 앞장서서 이끌어가는 지도자가 있는 한 그 사회나 조직은 절대 망하지 않는다. 따라서 향후 연변조선족자치주연변 조선족 기업들은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 나갈 것이며, 미래 조선족 사회의 희망의 증거가 될 것이다.

연변 조선족 사회와 연변 조선족 기업의 발전을 위한 제언

첫째, 한국 체류 중국 조선족은 52만 명이며 아직은 미약하지만 이들 중에는 상당수의 능력 있는 기업가도 있다. 따라서 이들과의 네트워크 구축을 통하여 한국의 기술이나 우수한 제품을 중국 기업을 대상으로 내수 시장에 판매함으로써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이 될 수 있다. 둘째, 조선족 기업은 중국 내의 대도시에 진출해 있다. 따라서 연변의 조선족 기업들은 대도시 조선족 기업들과의 네트워크 구축뿐만 아니라 이들을 통하여 중국 거대 기업의 한족 C대들과의 네트워크도 구축하여 기업을 성장시킬 수 있기를 바란다.

셋째, 세계 곳곳에 조선족이 진출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많은 국가에 진출해 있다. 따라서 이들과의 글로벌 한상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수출, 수입, 투자 등을 통하여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제안한다.

넷째, 기업가는 급변하는 내외 환경에 대처하여 기업을 성장시켜야 하므로 부단히 신기술이나 신 경영 기법을 도입하기 위한 지식을 습득하는데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대학 등과 연계하여 지속적으로 배우고 또한 외부 경영 진단도 받기를 권유한다. 마지막으로 기업가에게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필수 덕목으로는 기업가 마인드 즉 기업가 정신을 들 수 있겠다.

연변 조선족 기업가들에게는 어떤 위기 상황도 기회로 만들어 나가겠다는 개척 정신이 필요하다. 이를 통하여 연변의 조선족 기업이 아닌 세계적인 조선족 기업으로 성장해나가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 최웅용, 『중국 조선족 사회의 경제 환경』(2005, 집문당)
  • 이장섭 등, 『중국 조선족 기업의 경영 활동』(2006, 북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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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장섭 등, 『연변 조선족 기업의 형성사』(2012, 북 코리아)
  • 표성룡,「민족애를 실천한 기업인」(2011, http://korean.people.com.cn/75000/15154174.html)
  • 표성룡 , 「천우가 시공한 건물은 질이 최고」 (2011, http://korean.people.com.cn/75000/1515895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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