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분류

1930-40년대 만주를 배경으로 쓰여진 조선인 문학의 작품 세계

한자 1930-40年代 滿洲를 背景으로 쓰여진 朝鮮人 文學의 作品 世界
중문 1930-40年代用满洲背景所创作的朝鲜人文学的作品世界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문학 작품|소설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9년 10월
정의

1930년대부터 1940년대 만주를 배경으로 간행된 조선인 문학 작품 세계를 설명한 글.

개설

1930~1940년대 만주를 배경으로 출간된 작품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한 부류는 만주에서 생성된 문학으로서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에 의해 창작된 작품들이다. 다른 한 부류는 만주에서 생성된 것이 아닌 만주 지역 이외의 조선 작가들에 의해 집필된 만주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다. 대부분 1930년대 말에서 1940년대 초반에 집중적으로 창작되었다.

1930~1940년대 만주 배경 작품의 성행

한국 문학사에서 만주는 두 시기에 걸쳐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첫째 시기는 1980년대를 기점으로 하는 시기로서, 주로 만주 지역에서 생성된 문학에 주목하였다. 이 시기 연구는 주로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들에 의해 창작된 작품들과 그 시기 만주 지역에서 이루어진 문학 활동에 관심을 보이면서 중요하게는 자료들의 발굴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두 번째 시기는 2000년대 들어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한 친일 문학 논의의 자장 안에서 만주가 새롭게 논의된 것이다.

한국 문학사에서 식민지 말기는 ‘암흑기’, ‘공백기’라고 하여 오랫동안 하나의 단절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 조선이 아닌 만주에서 활발한 문학 활동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작품들이 조선어로 창작되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이 시기 문학사는 만주를 중심으로 다시 써야 한다는 주장이 새롭게 일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만주에서 창작된 작품들을 그렇게 단순하게 논의할 수 없다는 사실이 김윤식을 비롯한 일부 연구자들에 의해 제기되면서 만주에 대한 인식은 연구자에 따라 다르게 드러났다. 동시에 연구의 초점 역시 ‘재만’이라는 사실을 살짝 빗겨가 ‘만주’라는 공간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두 번째 시기에는 주로 만주 현지에서 창작된 작품들보다는 만주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에 대한 논의가 한층 활발했으며 그 연장선상에서 만주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 적지 않게 발굴 조명되었다. 이태준의 「농군」을 비롯하여 이기영의 『대지의 아들』, 『처녀지』, 한설야의 「대륙』, 이효석의 『벽공무한』 등과 같은 장편뿐만 아니라 일부 단편과 기행문들이 주목을 받았다. 그 결과 적지 않은 기행문, 작품들이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발표되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밝혀진다.

그렇다면 작가들은 왜 갑자기 만주를 창작의 소재로 활용하였던 것인가? 그들은 왜 갑작스럽게 너도나도 만주 이야기를 썼던 것일까? 자료를 자세히 들여다보노라면 이러한 소설들이 대부분 만주 기행을 토대로 집필되었다는 공통적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930년대 말에서 1940년대 초까지, 특히 문인 협회의 조성 전후를 중심으로 하여 조선의 많은 작가들은 팀을 무어 만주를 시찰할 기회를 가지게 된다. 그들은 주어진 일정과 스케줄에 따라 움직이고 조선으로 돌아와 기행 소감을 신문에 발표하고 만주에 대한 인상에 토대하여 작품을 창작했다. 식민지 말기 만주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의 대다수가 이러한 생성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시기 만주 기행이 성행했던 것은 정책적인 차원에서의 일이었다. 문인들의 만주 시찰은 본부 척무과의 주최로 진행되었고, 그 목적은 만주 이주 동포의 개척 생활을 조선 문단과 사회에 보고하고자 함이다. 즉 만주 이주민의 개척 성과를 홍보하고 만주국의 위상을 선양(宣揚)하기 위한 국책 차원에서의 지원이었던 셈이다. 1939년 10월 발족한 조선 문인 협회 역시 개편을 맞이할 때마다 새로운 사업으로 ‘만주 개척촌 시찰’을 빠뜨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만주 시찰은 비단 조선 문인들의 일만은 아니었다. 비슷한 시기를 전후하여 만주의 “문화회”, 일본 내지의 “대륙개척문예간화회”, “농민문학회” 등에서도 문인들을 만주로 파견하거나 시찰과 여행을 보냈다. 그리고 그들 역시 만주 기행문을 비롯한 개척을 소재로 하는 시, 소설, 희곡, 인물전기 등 여러 장르의 작품들을 생산해냈다. 조선문인협회와 마찬가지로 “농민간화회” 역시 일본 국내에서 쇠퇴해가는 농민문학을 회생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만주 기행을 기획했다. 이렇게 생성된 것이 “대륙개척문학”, 일명 “개척문학”이라고도 하는 문학의 한 장르였다. 하지만 ‘암흑기’, ‘공백기’라는 말로 식민지말기 문학사가 개관되면서 이 시기에 대한 연구는 말 그대로 거의 공백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 임종국의 『친일문학론』이 다시 거론되고 친일문학 논의가 불거지면서 많은 자료들이 다시 세상을 보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 적지 않은 작품들이 발굴되었고 그중에는 특히 만주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이 주목을 끌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1930년대 중반 ‘만주붐’이 형성되면서 모든 사람들이 만주에만 가면 부자가 되는 듯이 너도나도 만주 나들이를 하면서 만족하기도 하고 고배를 마시기도 했던 시절이었다면 2000년대 만주는 연구자들에 의해 식민의 공간, 이민의 공간, 디아스포라의 공간, 혼종성의 공간 등등 셀 수 없는 많은 성격을 가지는 복합적인 공간으로 재부활 되었다.

이처럼 복잡하고 흥미로운 공간 만주를 문인들은 어떻게 바라보았던 것일까? 지금까지의 논의는 그 시선이 두 가지로 요약된다. 즉 여행자의 시선과 정착자의 시선, 혹은 바깥의 시선과 안에서의 시선으로 대별되었다. 여기에서 여행자의 시선이란 본부 척무과의 주최로 진행된 만주 시찰을 일컫는다. 그러나 그것은 평범한 여행이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거기에는 제약과 규제가 따랐고 목적적이었으며 또한 결과 보고를 요구하는 여행이었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여행이라고 하기는 어딘가 적절하지 못한 면이 없지 않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식민지 말기 만주를 배경으로 한 문학 텍스트들은 정책적인 차원에서 시행되었던 계획적인 시찰이었고 시찰 지역과 일정 등이 일률적으로 배정되어 있었다. 이런 점에서 시찰은 자율성이라는 측면에서 분명하게 ‘순수 여행’과 구분된다. 이런 구분에 의존할 때 ‘순수 여행’의 부류에 해당하는 작가는 이효석과 유진오 정도가 될 것이다. 이에 비해 이태준, 이기영, 정인택, 장혁주, 유치진 등 기타 다수의 문인들은 정부의 지원을 받아 정해진 코스와 정해진 일정에 따라 만주를 ‘학습’해야만 했던 사람들이다.

이러한 외부자의 시선과 달리 내부 주거자의 입장에서 만주를 바라보았던 일련의 작가들이 존재하는데, 이를테면 최서해, 한설야, 강경애, 현경준, 안수길, 박영준, 김만선, 박계주 등 작가들이다.

만주는 제2의 고향, 재만 조선인의 ‘북향 이데올로기’

만주를 배경으로 한 작품 중 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에 의해 창작된 작품들이다. 재만 조선인들의 문학 활동은 1920년대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지만, 발표 지면의 제한과 수준 상의 문제, 그리고 산발적인 활동으로 하여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러다 1930년대 중반에 들어 만주의 간도 지역에 학교들이 대거 건립되고 만주로 이주하는 젊은 지식인 청년들이 증가함에 따라 용정에서는 첫 문학동인 ‘북향’이 결성된다. ‘북향’의 결성과 동인지 『북향』의 간행은 이주민 문학사에 획기적인 사건이었으며, 이는 간도를 중심으로 한 이민 문단 형성의 시초이기도 하다.

1930년대 중후반 만주 간도 지역의 대표적인 문인들로 강경애, 안수길, 현경준이 있었다. 당시 강경애는 이미 국내 문단에서 등단하여 명성을 얻은 중견 문인이었으며, 안수길이나 현경준은 문단에 갓 등단한 새내기 문인들이었다. 그러나 1937년 간도 도문으로 이주한 현경준에 비해 안수길은 14세에 간도로 이주하여 조선과 만주를 왕래하면서 학교 교육을 받은 인물로서 만주에 대한 인식과 이해는 현경준이 따를 바가 못 되었다.

이중 강경애는 선명한 이념적 색채를 강하게 나타냈던 작가로서 그의 대부분 작품들 역시 이념적인 문제를 직간접적으로 다루었다. “간도 문학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봉”을 보여준 작품으로 평가받는 그의 중편 「소금」은 공산당에 대한 발언이 금기시되던 시기에 공산당의 인식의 문제를 정면으로 들고 나온 작품이다. 복잡한 간도의 정세 속에서 공산당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가는 과정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면서 궁극적으로 공산당은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소박하게 고백하는 작품이다.

현경준의 경우는 카프에 가담하거나 혹은 이념적인 조직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던 기록은 찾을 수 없지만 카프적인 경향을 드러내는 작가로서 강경애와 동일한 부류로 분류할 수 있는 작가이다. 하지만 만주에서 현경준은 「유맹」의 작가로 알려져 있다. 아편 중독자들을 마을에 수용하여 그들을 교육 교화하여 새로운 국민으로 탄생시킨다는 목적이다. 이 작품은 아편 중독자들을 다룬 제적인 희소성이라는 측면에서 발표당시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런데 현경준은 「유맹」을 두 번이나 개작하는데, 처음에는 『도라오는 인생』으로 개작하여 『만선 일보』에 연재하고, 「도라오는 인생」을 다시 『마음의 금선』으로 개작하여 홍문 서관에서 단행본으로 간행한다. 이와 같은 여러 차례의 개작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현경준이 「유맹」에 대한 애착 혹은 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연을 짐작하게 한다.

이런 「유맹」류의 텍스트들은 금연 문예라고 지칭되면서 만주국의 금연 정책을 선양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친일 문학 또는 국책 문학으로 평가되었다. 따라서 현경준 또한 친일 작가라는 평판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사실 그의 초기 작품들, 그리고 만주국 이주 초기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유맹」은 오히려 예외적인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맹」은 현경준이 도문의 백봉 우급 국민 학교를 사직하고 『만선 일보』 기자로 재직하던 시기에 썼던 작품들이다.

이 시기 현경준의 소설을 비롯한 일련의 기행문 잡문들 역시 기존의 그의 작품 경향들과는 거리를 두는 글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는 「유맹」 한편만으로 작가 현경준을 평가하고 있다. 이런 점은 응당 시정되어야 하고 그의 전반적인 작품에 대한 평가를 기준으로 그를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현경준을 재만 작가라는 틀 속에 한정할 경우 그는 도문을 대표하는 문인으로, 혹은 도문을 작품화한 문인으로 주목된다. 도문의 흥망을 그리고 있는 동일한 이름의 또 다른 소설 「유맹」은 이런 점에서 흥미로운 작품이다. 이 작품은 조선인 유맹의 생성을 그리고 있다는 측면에서 주목을 요하기도 한다.

강경애, 현경준과 함께 안수길은 재만 조선인 대표적 작가였다. 그중에서도 안수길만주에서 청·장년기를 거의 다 보낸 문인으로서 만주를 가장 잘 알았고 재만 조선인들에 대해 애착을 가지고 작품화했던 문인이다. 그의 대표작 「새벽」은 만주 이주 조선인의 전사를 사실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주목되었고, 동시에 안수길은 이 작품을 통해 작가적 입지를 굳히게 된다. 이어 그는 「벼」, 「목축기」, 「원각촌」 등 작품들을 창작하면서 작가적 역량을 과시한다. 하지만 이상 작품들이 만주국의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훗날 친일적이라는 평가를 피해가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안수길 문학의 귀결은 『북향보』에 있었다.

한국 근대 문학사에서 안수길만큼 만주 이주 조선인의 애환에 근접한 작가는 없을 것이다. 그의 만주 배경 소설의 창작 화두는 ‘북향 정신’이었다. 장편 『북향보』를 통해 본격적으로 서사화 된 ‘북향 정신’은 조선인의 만주국에서의 생존 논리의 이데올로기적 표현에 다름 아니었다. 북향 정신, 즉 만주에 제2의 고향을 건설하자는 것인데, 형식상으로는 만주국의 ‘국민 되기’로서의 방편이었지만 내적으로는 민족 공동체 구축과 민족 교육의 보존을 통한 조선인 자치의 간접적인 드러냄이었다. 이와 같은 ‘북향 정신’의 구조는 ‘국민’과 ‘민족’이라는 양자 사이에서의 줄다리기였으며, 만주국 시기를 조선인의 중심지 용정과 만주국의 수도 신경을 오가면서 살아갔던 작가의 남다른 현실 감각의 발현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만주국 시기의 조선인들은 적극적으로 만주국 체제에 저항하거나 우회적인 방법을 통해 국민으로의 편입을 거부했으며 궁극적으로는 생존논리로서의 ‘북향정신’으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는 여전히 만주국 국민이기보다는 조선 민족이기를 지향하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만주국 시기의 조선인들 역시 20년대와는 다른, 또 다른 이상촌을 지향했던 것이다.

문인들의 만주 나들이, 식민지 학습 관광

만주에 이주하여 살아가던 사람들이 ‘북향 정신’이라는 그들만의 생존 논리를 만들어냈다면 외부자의 눈에서 만주는 어떤 곳이었을까. 특히 의도적으로 만주를 보여주고자 했을 때 그들이 강조했던 부분은 무엇이었을까?

식민지 말기 문인들의 만주 시찰은 정해인 일정에 따라 정해지 관광지만을 관광할 수 있었다. 매번 관광에서 빼놓지 않았던 곳은 봉천 박물관, 봉천 피난민 구휼 기관, 그리고 이어지는 것이 개척지 방문이었다. 이 중에서도 가장 강조되었던 것이 개척지 방문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광자들의 기억에 남는 것은 발달된 만주 봉천의 모습이었다. 이로서 그들은 문인들에게, 그리고 조선인들에게 만주를 선전하고 만주국의 발전과 일본의 국력을 과시했다.

이러한 관광 절차를 거치고 돌아온 문인들은 기행문을 썼고 혹은 기행문을 바탕으로 그것을 다시 소설이나 희곡으로 개작했다. 대부분 많이 작품화되었던 것이 개척민 혹은 개척 부락의 성공적인 사례이다. 정인택, 이기영 등 문인들이 많은 글을 썼고 특히 이기영은 만주를 배경으로 한 『대지의 아들』과 『처녀지』 두 편의 장편을 창작해 낸다.

『대지의 아들』은 22개의 소제목에 총 158회 연재 분량을 가진 꽤 긴 장편이다. 소설은 두 개의 서사 줄기를 가진다. 하나는 개양둔의 설립과 정착 과정, 그리고 다른 하나는 덕성이와 귀순이, 황식이 사이에 벌어지는 삼각 관계의 애정 서사이다. 20여 년 전 김시중 노인에 의해 개척된 개양둔은 만주 사변을 겪으면서 황폐화의 위기를 맞는다. 이즈음 역시 만주 사변의 피해로 마을을 잃고 전전하던 황건오 등 일부 주민들이 개양둔으로 이주하고 강주사, 홍승구, 정대감과 같은 인물들도 흘러들면서 개양둔은 다시 갱생의 길을 걷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두 가지 큰 사건을 겪는다. 마적의 습격과 가뭄이다.

‘개척 문학’에서 이주민과 마적의 투쟁은 항상 크게 부각되는 부분이다. 『대지의 아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마적과 관련된 사항은 여러 차례에 걸쳐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생명선’에는 이주 초기 건오가 마적들에게 끌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오던 이야기를 소개한다. 그리고 ‘수확’에서도 학동이의 입을 통해 마적 이야기를 전달한다. 건국 전 조선 이주민의 어려움 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가 마적의 소란이었다고 한다. 그 마적의 소란에 학동의 두 형은 죽임을 당하고 학동은 그 지역을 떠났다고 한다. 그리고 세 번째 ‘비적’ 장에서 드디어 『대지의 아들』에서의 마적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마적의 반복적인 등장은 식상한 감이 없지 않고 더 문제적인 것은 이 부분이 긴장감이 넘치는 것이 아닌 희화적으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수확을 앞둔 가을날 석룡이네 집에 비적 떼가 들이닥치고 석룡이네 집에서 아무 것도 건질 것이 없는 것을 안 비적들은 석룡이를 앞세워 개양둔의 부잣집으로 안내하라고 지시한다. 우직한 석룡이는 곧바로 부락장 홍승구의 집으로 안내하고 홍승구네는 금붙이와 현금을 포함해 적지 않은 피해를 본다. 마적들은 석룡에게 쌀포대를 지워 함께 끌고 간다. 이런 사태를 당한 개양둔에서는 즉시 사람들을 소집하고 걸음이 빠른 건호가 토벌대를 부르러 현성으로 올라간다. 토벌대는 그 이튿날 아침 첫차로 도착하여 마적 토벌작전에 투입된다. 석룡이는 천만다행으로 살아 돌아오고 건오는 토벌대 선두에서 마적굴을 소탕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이런 과정을 소설은 장장 13회에 걸쳐 늘어놓고 있으며 ‘생명선’과 ‘수확’ 부분의 마적 이야기까지 합치면 장장 20회 분량은 훨씬 넘어선다. 이와 같이 마적을 작품 속에 이렇게 크게 등장시킴으로써 이주민의 고난을 부각시키고 마적을 토벌하고 정착에 성공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개척민의 영웅적 모습을 구가한다. 이 과정에서 부각되는 것은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마적 토벌에 대처하는 토벌대의 작전이며 이에 못지않게 규칙적이고 질서 있게 외부 환경에 대응하는 개양둔 사람들의 단체 행동이다. 동시에 토벌 작전에서 없어서는 안 될 건오의 역할도 크게 확대시킴으로써 미화하고 있다.

또 하나의 문제는 旱騷이다. 가뭄이 들고 나날이 말라가던 강물이 이삼일 내에 갑자기 바짝 말라버리는 사태가 벌어진다. 마을 사람들은 그저 가물어서 그렇거니 하지만 건오는 상류에서 물을 막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진다. 건오의 말에 사람들은 대놓고 빈정거리지는 않지만 다들 어이없다는 반응이다. 그러나 건오는 자기의 판단을 믿고 이틀에 걸려 백여 리 길을 걸어 상류까지 올라간다. 과연 상류에서 강 물줄기를 차단했던 것이고 의외에도 조선 이주민들이었다. 이에 개양둔 전체 성원이 현청으로 청원을 간다. 직접 현장을 만나보고 사정을 소상히 이야기했지만,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도 현에서는 기별이 없다. 두 번째는 부락장과 학교 선생인 이상렬을 대표로 파견한다. 또 이삼일이 지났는데 여전히 감감 무소식이다. 현에서는 관청의 일이라 시간이 좀 걸릴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가뭄에 농작물이 말라죽는 판에 농민들은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드디어 그들은 거사를 결정한다. 강의 상류로 올라가 강둑을 터뜨릴 예정인 것이다. 그들은 척후대, 의료반, 식량반, 경호반 등으로 조를 나누고 각 조마다 반장을 임명하고 또 총지휘 강주사와 부지휘가 정대감을 임명하였다. 그들은 만단의 준비를 하여 길을 떠난다. 밤에 행군하고 낮에는 잠을 자는 형식이다. 이틀의 여정을 거쳐 강의 상류에 도착한 그들은 우선 그 소속 현의 현청으로 찾아간다. 무단으로 거사를 단행했다가 발생하게 되는 법적 제제에 관련되는 뒷감당 때문이다. 그들은 관헌의 묵인을 얻어내고 치밀한 계획에 따라 밤에 거사를 단행한다.

여기서 하기 방학을 맞아 귀가했던 덕성이가 용감성을 발휘한다. 어둠 속에 강을 헤엄쳐 건너가 맞은편의 배를 끌어오는 일이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건너편의 사람들이 건너오지 못하게 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치밀하고 계획적인 준비와 지휘 하에 거사는 무사하게 아무런 소란과 폭동 인명 피해 없이 성공한다. 이 과정은 마치 전쟁을 치루는 부대와 흡사하다. 개양둔의 단체적 조직력은 비적 대응에서 이미 선보인바 있지만 이 부분에서는 그야말로 유표하게 두드러진다. 개양둔의 공동체는 단순한 부락 공동체를 넘어 조직적이고 규칙적인 군대를 방불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공동 작전에 거의 25회 분량이 할애된다.

이것이 두 개의 큰 사건이라면 이에 못지않게 전개되는 것이 덕성이와 귀순이, 황식이 사이에 벌어지는 삼각 관계이다. 이미 약혼한 사이인 덕성이와 귀순이 사이를 알면서도 귀순이가 탐이난 황식이는 부모들을 동원해가면서까지 귀순이를 차지하고자 갖은 애를 쓴다. 부락장 홍승구는 이 개양둔의 유일한 양반 출신이고 거기에 경제적인 여유까지 더해서 유세가 대단하다. 조선에 본댁이 있고 개양둔에서는 첩살림을 한다.

비적 사건에서 석룡이가 홍승국의 집을 안내하는 바람에 큰 손해를 입은 홍승구의 처는 그것을 빌미로 석룡의 처를 협박하기도 하고 구슬리기도 하면서 기어이 파혼을 하게 한다. 그러나 덕성이를 마음에 담고 있는 귀순이는 황식이와의 혼인날 새벽 덕성의 친구 복술이와 함께 덕성이가 농림 학교를 다니고 있는 봉천으로 탈출을 감행한다. 젊은이들의 이지가 그렇게 굳건한 것을 알게 된 어른들로 결국에는 결혼을 허락하게 된다. 여기서 귀순이는 명랑하고 쾌활하며 연애에 있은 한 당돌하면서도 당찬 면을 보여주는 소설에 생기를 주는 인물이다.

이렇게 개척의 서사와 연애의 서사가 장황하게 서술되는 한편에는 농촌 지도에서 빠질 수 없는 계몽의 서사가 펼쳐진다. 『대지의 아들』에서 계몽은 형식적으로 종교 계몽을 통하여 진행된다. 어느 날 개양둔에는 서치달이라는 신학교 학생이 찾아온다. 그는 개양둔 학교 선생님인 이상열의 고향 친구이자 소학교 동창이다. 문제는 그가 전도하는 기독교가 특이하다는 점이다. 소위 독립 교회라고 하는 것인데 이 교회는 조선과는 전혀 분리된 만주에서 새로 생긴 것이다. 특징이라면 신학교에서 농장을 건설하고 학생들로 하여금 전부 농사를 짓게 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부자의 자질이라도 이 신학교에 입학하는 한 예외가 없고, 뿐만 아니라 이 교회의 정신은 첫째로 모든 교인은 자작자급의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농본주의’에 기본을 둔다고 한다. 나아가 서치달이 설교하는 천당과 지옥에 대한 해석은 흥미롭다. 이는 『대지의 아들』이 궁극적으로 어필하고자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서치달은 지옥에 대해 설명하면서 조선 이주민의 개척 전사를 읊는다. 그 유명한 해림 사건, 중국인들에 의해 조선 이주민이 열 아홉 명이 살해당한 참변을 이야기하고 개양둔 초창기 김시중 노인의 수로 개척 과정에서 겪었던 어려움을 피력한다. 그러면서 그는 조선 이주민의 역사를 피로 물들인 개척사로 점철한다. 이 뿐만 아니라 마적의 행패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 인두세와 문패세 심지어 문턱세까지 징수했던 중국 관헌의 학정을 고발한다. 이렇게 그는 기독교에 전혀 무지한 농민들을 대상으로 그들이 익숙한 개척민의 사실을 예로 들러 설명하면서 공감을 얻어내고 감동을 준다.

그는 이주민의 개척사를 중국인에 의한 일방적인 피해의 역사로 선보이고 있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그들의 야만에 의해 빚어진 것임을 강조한다. 그래서 그가 얻어낸 결과는 무지는 곧 지옥이라는 명제이다. 자고로 학정이 두렵다고는 하지만 이 학정보다도 더 두려운 것은 무지라고 설교한다. 지옥이 무지로 명명되고 천당은 신성한 노동이 창조한다고 본다. 천당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는 자신의 노동경험을 소개한다. 그렇게 괴로웠던 노동이 천당이란 무엇인가를 느끼게 하고 보여주는 것은 노동에서 오는 창조의 기쁨과 생산의 기쁨 때문이다. 이렇게 지옥은 무지에서 오고 천당은 노동에서 만들어진다는 논리는 노동의 신성성을 강조하고 찬양하는 것이다. 이렇게 강조되고 계몽되는 노동의 신성성 옆에는 또 한 가지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사안이 있다. 이런 노동의 신성성과 행복을 모르고 끊임없이 부동하는 조선 이주민들의 병폐이다. 노동은 통해 정착할 생각을 하지 않고 항상 일확 천금을 노리고 한탕주의를 목적으로 하는 조선 이주민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조선 농민들의 부동성을 막기 위해서는 만주에 정착하고 만주에 제2의 고향을 건설해야 하며 만주 대지의 아들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제2의 고향, 즉 북향 정신은 만주 관련 소설에서 심심치 않게 주장되는 부분이다. 『대지의 아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만주 대륙에 정착하고 거기서 대대손손 ‘대지의 아들’로 살아가는 일이다. 이는 이태준의 「이민 부락 견문기」에서 농군이 하는 “그거나 빠지면 우리도 다시 한 번 고향 산천에 가 살아 볼까요...... 그렇지 못하면 밤낮 이 꼴이다가 호인들 밭머리에 묻히고 말죠.”라는 말과 너무 큰 대조를 이룬다.

만주국에서 실행되는 채권 이야기를 하면서 귀향의 희망을 채권에 걸어보는 농군의 심정이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남아 있고 그렇지만 돌아갈 희망은 채권에 당첨되는 것만큼이나 막연한 일이다. 농군의 이런 심정은 『대지의 아들』이 창도하는 고향건설과 너무나 큰 거리를 보여준다. 채권에 의지하여서라도 고향으로 돌아갈 일류의 희망을 거는 이 마음이야말로 만주 이주 개척민의 진실한 심정일 것이다. 이런 사람들로 하여금 만주 땅에 제2의 고향을 건설하라는 계몽이야말로 얼마나 허무하고 정치적이며 식민지적인가. 『대지의 아들』에서 애써 계몽하고자하는 공동체 이데올로기는 이런 텅 비어있는 ‘북향정신’인 것이다.

만주에서 조선인은 누구였는가? 그리고 만주 이주 조선인을 작품화한 작가들은 그들의 처지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는가? 만주 관련 작품들을 대면할 때는 이런 질문을 간과할 수 없다. 특히 만주를 경험해보지 못한 문인들에 의해 쓰인 작품들에서 만주의 이야기는 리얼리티를 상실하여서 신화 같은 느낌이다. 현실은 부재한 채 이데올로기만 남는 작품이 이들의 작품인 것이다. 그것은 학습된 만주이기 때문일 것이며, 강요된 만주상의 창조에서 오는 것일 것이다.

국제 도시 하얼빈과 유맹의 삶

이효석의 만주 여행은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첫 번째는 1939년 늦여름이었고 두 번째는 1940년 부인 이경원과 차남 영주를 잃고 난 뒤였다. 이효석의 만주 여행은 조선 문인 협회 소속 작가들이나 국책 문학 생산을 목적으로 한 만주 시찰자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지극히 개인적인 여행이었다.

이효석은 하얼빈 여행을 토대로 장편 『벽공무한』을 창작하였으며, 단편 「하르빈」을 비롯한 다수 기행 수필도 함께 내놓았다.「대륙의 껍질」[『경성 일보』, 1939.9.15.~19], 「야과찬」[『매일 신보』, 1939.10), 「북만주 소식」[『조선 급 만주』, 1939.11), 「산협의 시」[『조선 일보』, 1940.7.30), 「새로운 것과 낡은 것: 만주 여행 단상」[『만주 일일 신문』, 1940.11.26~27) 등 다수 수필들 역시 하나같이 하얼빈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효석에게서 하얼빈이 지니는 남다른 의미를 가늠할 수 있다. 이효석의 하얼빈에 대한 시선을 통해 그의 비판 의식을 읽어내는 방민호의 연구는 이런 맥락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만주 공간에서 하얼빈은 흥미롭고도 중요한 공간임에 분명하다.

하얼빈은 봉천, 신경과 함께 만주국 3대 도시 중의 하나였지만, 봉천, 신경과는 조금 다른 이력을 가지고 있는 도시이다. 봉천, 신경은 전적으로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건설된 근대 도시였지만, 하얼빈은 19세기 말 제정 러시아의 중동 철도 부속지를 중심으로 개발된 철도 계획도시였으며 러시아인들의 손에 의해 건설된 도시였다. 1896년 러시아의 중동철도 부설권 획득과 1903년 중동철도 개통, 1933년 특별시 시기까지 하얼빈은 교통 중심지, 경제 중심지, 그리고 유럽 구미 열강의 금융 중심지로서 만주국 제1의 도시였다. 특히 1920년대 후반부터는 북만주의 상업 중심지로서 뿐만 아니라 만주 전체를 보더라도 봉천이나 신경을 능가할 정도였다. 1935년 말 한때는 상주 인구 50만을 넘어서면서 만주국 1위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당시 하얼빈이 ‘동양의 모스크바’, ‘동양의 파리’로 불렸던 점은 이를 잘 설명해 준다. 그러나 일본이 중동 철도를 접수하면서 치안 악화와 농촌 경제 부진, 그리고 무리한 철도 연선 확장으로 하얼빈의 경제적 지위는 점차적으로 쇠퇴하게 되고, 중일 전쟁 이후에는 구미 자본까지 점차 빠져나가게 되면서 급격히 쇠퇴하게 된다.

이효석이 여행했던 1930년대 말은 하얼빈이 이미 석양의 길을 걷고 있던 때다. 하지만 하얼빈에는 여전히 많은 러시아인들이 살고 있었고 도시 분위기는 슬라브 민족의 정취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이효석은 수필 「대륙의 껍질」에서 그 인상을 소상히 남기고 있는데, 특히 그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거리의 풍경이었다. 다국적의 수많은 사람들이 섞여있는 하얼빈의 거리는 혼잡함 그 자체였으며, 무엇보다도 현지인과 확연히 구분되는 양상은 이국적인 분위기를 한층 더 의식하게 하였다.

거리의 사람들, 이는 하얼빈의 이국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그 첫 번째였다. 다음은 도시의 건물들이다. 거대하고 우람하지만 고색창연한 거리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 그것은 중앙사원과 소피스카야 사원 같은 건물들에서 오는 것이었다. 하얼빈의 분위기를 주름잡고 있는 사원과 묘지. 그것은 우람하지만 도시의 장엄함을 더해주었고, 육안으로 가늠하기 어려운 넓이를 차지하고 있는 묘지는 동양과는 대조되는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그리고 이효석은 이런 분위기를 즐겼다. 그는 러시아인들이 경영하는 차집에서 음악을 들으면서 창밖으로 도시의 거리를 즐겼고, 음악을 즐겼고, 커피를 즐겼다.

하얼빈은 여행지에 앞서 하나의 미적 대상으로 인식되었는데, 하얼빈이 유럽풍의 국제 도시로 인식되었던 것만은 아니다. 하얼빈은 희망의 공간이었고, 기회와 전복의 공간이었으며 동시에 공포의 공간이기도 하였다.

하얼빈을 배경으로 한 대작 『벽공무한』은 일마가 교향악단 초청을 위해 하얼빈으로 떠나는 시점에서 시작하고 있다. 주인공 천일마, 그는 대학 문과학부를 졸업한지 8년이나 되지만 여전히 그렇다할 직업 없이 신문에 문화 서평도 쓰고 음악 평론도 쓰면서 소위 문화 평론가 행세를 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가정 형편이 어렵고 홀어미가 있을 뿐이었는데, 그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천애에 외로운 몸이 된다. 8년 전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하나만으로 첫사랑의 여자 남미려를 백만 장자 유만해에게 빼앗기면서 사랑의 고배를 마신 후로는 여자에게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때문에 자신을 짝사랑하며 만주 하얼빈까지도 서슴지 않고 쫓아오는 반도 영화사 전속 여배우 단영이를 냉담하게 대할 뿐이다. 그런 그가 하얼빈에서 카바레 댄서인 러시아 여자 나아자를 만나 사랑을 나누게 되고 그 여자를 아내로까지 맞이한다. 또한 채권과 마권 당첨으로 일만 오천원의 횡재를 하기도 한다.

외관상으로 하얼빈은 유럽풍의 국제도시였고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채권이나 마권 같은 국민적 도박에 열광하면서 잠시나마 삶의 고단함을 달랠 수 있는 공간이었으며, 마약과 매음굴이 범람하고 있는 도시였다. 도처에는 마약 중독자가 욱실거리고 매음굴이 널려있다. 이는 이효석의 초기 소설인 「기우」(1929)에도 잘 드러나 있다. 이렇게 하얼빈은 외관상의 화려함 밑에 추접스러운 죄악을 은폐하고 있는 도시였다. 그만큼 하얼빈이라는 공간은 복합적이고 다층적이었다.

행운, 공포, 죄와 악, 마약과 매음, 이러한 단어들이 하얼빈을 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얼빈의 참모습은 하얼빈의 러시아인들이었다. 러시아인들에 대한 관심은 이효석이 다른 작가들과 다른 가장 큰 변별점이기도 하다. 많은 문인들이 만주를 다녀오고 여행 소감을 토대로 작품을 창작하였지만, 하얼빈을 배경으로 작품 활동을 한 작가는 적을 뿐만 아니라 하얼빈의 러시아인들에 관심을 가진 작가는 이효석이 거의 유일하다. 그리고 그것은 하얼빈의 참모습을 볼 수 있는 근본적인 계기가 된다.

하얼빈의 러시아인들은 역사적인 격변기를 겪으면서 운명을 같이하게 되는데, 특히 1935년 일본의 동청 철도 인수와 함께 하얼빈의 러시아인들은 일부는 러시아로 귀환하고 일부는 상해 등지로 이주하고, 그리고 일부는 여전히 하얼빈에 남아있게 되는데 이 남아있는 자들은 그야말로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었다. 『벽공무한』의 에미랴는 부모를 어디에서 여의었는지도 모르는 고아이고 마약 중독자이며, 묘지에서 만났던 이와놉은 음악가이지만 취직의 길이 없어 거지 행세를 해야겠다고 진지하게 말하던 사람이다. 그리고 남루한 옷차림의 꽃 파는 여자애, 거리의 장님 음악가, 거리에 늘어선 수많은 거지들. 이런 하얼빈의 거리와 암울한 분위기는 단편 「하얼빈」을 통해 잘 드러난다.

작가는 하얼빈의 모습을 ‘낡고 그윽한 것이 점점 허덕거리며 물러서는 뒷자리에 새것이 부락스럽게 밀려드는 꼴이 손에 잡을 듯이 알려진다’라는 한 마디로 개괄하고 있다. 그렇다면 낡고 허덕거리며 물러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규모만 클 뿐이지 집 모양이 사택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불란서 영사관이었고, 셋집으로 전락한 화란 영사관이었으며, 악세사리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영사관 사람들과 웃음과 술을 파는 젊은 미모의 여자 유우라, 그리고 카바레 판타지아에서 비굴한 웃음을 팔며 푼돈을 구걸하는 늙은 보이 스테판이었다. 이들은 모두 낡고 허덕거리며 사라져가는 것들이다. 블란서와 화란 영사관이 위태위태하게 쓰러져가고 러시아의 젊은 여자와 늙은 보이가 최하층의 생활을 영위해가고 있는 동안 태양도 근처에는 피서를 즐기는 사람들이 북적이고 강에는 수영을 즐기는 사람, 유람선을 즐기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이렇게 단편 「하얼빈」은 몰락해가는 세력과 성장해가는 세력을 대비시킴으로써 그 몰락해가는 세력의 비참함을 한 층 더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특히 이런 극단적인 이분화는 독일의 승전이라는 국제 정세의 변화와 밀접하게 관련되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제국주의 독일의 세력은 하얼빈에까지 뻗쳐있었다. 그것은 영사관들의 몰락의 길에서 드러났고 하얼빈의 제일의 번화가 키타이스카야에서도 드러났다. 언제나 흥성거리고 화려하던 키타이스카야는 조용하고 한산하였으며 오고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도 생기가 없었다. 독일 세력의 확장과 함께 불란서, 화란을 비롯한 러시아까지를 포함한 일부 세력들의 몰락이 함께 공존하는 공간이 하얼빈이었다. 이렇게 만주, 하얼빈은 성장하는 제국주의 세력의 확장과 몰락하는 세력이 엇갈리면서 제국주의와 식민지화가 강화되고 생성되는 공간이었다.

기존의 인식에서 만주는 조선반도[한반도]의 연장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모순과 갈등의 핵심은 조선인과 중국인, 혹은 조선인과 중국인의 모순에 일본인이 개입하는 양상을 보이거나, 아주 드물게 중국인과 일본인의 관계를 다루긴 했지만 중국인은 항상 야만 민족으로 형상화되면서 일본인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만주 간도는 조선인의 제2의 고향으로 인식되었고, 하얼빈 역시 러시아인들의 고향으로 인식되면서 러시아인들에게 있어서 하얼빈은 향수와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효석에게 있어서 만주나 하얼빈은 단지 한반도의 연장으로 인식되었던 것은 아니다. 러시아인이라는 또 한 존재가 개입하면서, 일본인-조선인의 식민자와 피식민자라는 전래의 구도가 파괴되고, 하얼빈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가 동시에 창출되는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만주를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인 것이다.

만주와 하얼빈, 다른 작가들이 만주를 그림에 있어서 그곳은 조선인의 제2의 고향이었고 삶의 전쟁터였던 데 반해 이효석에게 있어서 그곳은 유럽의 축소판이었고 서구 지향이라는 하나의 미적 대상이었다. 그리고 만주는 행운과 공포, 죄와 악, 마약과 매음이 범람하는 복합적인 공간이기도 했다. 여타의 작가들이 만주 유토피아를 지향하고 ‘만주 드림’을 보여주었던 데 반해 이효석은 하얼빈이라는 도시에 주목하였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러시아인들의 삶에 관심을 보였다. 러시아인들의 삶을 통해 이효석은 만주가 기존의 문인들이 인식하였던 것처럼 단순한 한반도의 연장이 아니라, 그곳은 일본-조선의 식민자와 피식민자라는 구도를 넘어 조선과 일본뿐만이 아니라 세계의 제국주의까지 세력을 뻗치고 있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가 동시에 창출되는 공간이었음을 인식한다. 만주의 하얼빈의 국제성은 동양, 조선을 발견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하는데, 이런 동양의 발견과 동양을 인정받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는 식민지 지식인의 겹쳐지는 의식과 무의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그것은 동양, 조선을 통한 세계화로 이어지는 양상을 보인다. 따라서 이효석의 동양주의는 당시 논의되었던 일본 중심의 동양주의와는 또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렇게 이효석은 자신만의 특유의 동양주의 미의식을 들고 나옴으로써 국민문학이 주장하는 것과는 다른 문학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미적 대상으로서의 하얼빈, 그리고 동양의 발견으로서의 하얼빈은 이런 측면에서 의의를 가진다. 이는 만주하얼빈 여행을 통해 제국주의와 식민주의가 함께 존재하는 공간이라는 점을 인식함으로써만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이효석의 후기 문학에서 만주 여행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이효석에게 있어서 만주나 하얼빈은 단지 하나의 지리적 공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은 수많은 이해관계와 정치 역사적 의미를 창출하는 기호였다. 또한 이효석은 하얼빈에서 유맹의 삶을 목격하게 되며 자신의 삶, 만주 이주 조선인의 삶이 모두 그 유맹적이라는 점에 동일함을 발견하게 된다.

참고문헌
  • 안수길, 『북원』(예문당, 1944).
  • 안수길, 『북향보』(문학 출판 공사, 1987)
  • 강경애, 『강경애 전집』(소명 출판사, 1991)
  • 이효석, 『(새롭게 완성한) 이효석 전집 5』(창미사, 2003)
  • 이기영, 「대지의 아들」, (『한국 근대 장편 소설 대계 14』 태학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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