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격전지, 대련을 가다

한자 淸日 戰爭과 러日 戰爭의 激戰地, 大連을 가다
중문 甲午中日战争和日俄战争的激战地我们去大连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요령성 대련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4년 7월 23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4년 7월 25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4년 8월 1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4년 9월 15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4년 10월 24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4년 11월 7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4년 11월 21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4년 11월 21일~11월 24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4년 2월 8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4년 2월 10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4년 2월 19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4년 3월 27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4년 5월 26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4년 8월 19일 8월 24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4년 9월 4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4년 9월 9일~9월 22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4년 10월 30일~11월 2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4년 11월 26일~12월 6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5년 3월 10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5년 5월 27일~5월 28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5년 9월 5일
중국의 명운을 쥐고 있는 땅, 여순

중국요동반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대련 지역은 황해발해의 교착점으로 한나라 무제가 조선반도[한반도]로 통하는 뱃길을 개통하면서부터 해상 교통요새로 부상한 곳이었다. 특히 현재 대련시의 한 구(區)인 여순은 일찍부터 ‘경진의 문호, 북방방어의 인후(咽喉)’로 불렸는데, 근대에 와서는 북양대신 이홍장의 북양 해군기지 건립을 통해 군사적 요충지가 되었다. 1890년 여순에 군항을 준공하면서부터 ‘동양 제1의 요새’로 불려졌다. 당시 일본의 사상가인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峯)는 ‘여순은 지중해의 콘스탄티노플’ ‘중국의 명운을 쥐고 있는’ 땅이라 표현한 바 있다.

이 지역은 중국 관내 여러 지역 중 청일전쟁(1894~1895)과 러일전쟁(1904~1905)의 가장 큰 격전지로서 역사적 의미가 있으며 그 결과 지금에 이르기까지 많은 전쟁 유적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대련은 청일전쟁으로 일본이 조차지로 확보하였으나, 삼국간섭으로 무산되고 곧바로 러시아가 조차하였다. 이후 러시아는 동철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고 1897년 12월 여순을 점령하고, 25년 기한으로 여순·대련지구-관동주를 조계지로 삼았다. 여순 요새는 제정 러시아 국내를 막론하고 규모가 제일 큰 군사시설이 되었다. 러시아는 군사상 근거지로서 여순과 같이 국제 무역항으로서 대련 경영에 크게 노력지만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하면서 양도하였다.

일본은 1906년 대련에 관동도독부를 설치하여 특별 통치체제 기반을 마련하고 이 지역을 직접 경영하였다. 대련시장도 일본인으로 임명하였다. 러일전쟁 이후 획득한 여순·대련 지역에 주둔한 대규모의 일본군대는 만주전역을 석권하였다. 일본은 본격적인 만주침략을 관동군 주도로 시도(1930년 9월)하고 이어 만주를 점령하는 한편, 만주지배의 정당성을 위해서 1932년 청조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溥儀)를 끌어들여 괴뢰정부인 만주국을 성립시켰고, 이후 1845년 8월까지 지배를 지속하였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청일전쟁 시작되다

청일전쟁은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의 서울의 경복궁 점령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7월 25일 아산만풍도해전, 27일 성환전투를 시작으로 해상과 육상전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원래 일본 정부는 조선지배에 국한되어 있었던 제한적 전쟁을 추진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전쟁 수행과정에서 예상 밖으로 무기력한 청국군의 모습을 보자 본래의 정책을 대폭 수정하였고 9월 15, 16일 평양전투와 황해 해전 직후 제2군의 편성에 착수하면서부터 청국 본토의 분할을 목적으로 대륙 침략 전쟁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10월 24일 일본군은 압록강 도하를 통해 청국 영토 진입을 개시하였다. 11월 7일부터 일본군은 금주와 대련만을, 이어 11월 21일에는 여순을 함락하였다.

일본군의 요동반도 진출

황해해전 직후인 1894년 9월 25일 제2군 사령관에 육군대신 오야마 이와오(大山巖) 대장을 임명하고, 10월 8일 대본영은 오야마에게 연합함대와 협력하여 여순반도를 점령할 것을 명하였다. 일본군 혼성 제12여단은 9월 27일부터 30일 사이에 인천항에 도착하였고, 10월 21일 제2군의 상륙지점은 대련 인근의 화원구(花園口)로 결정하였다. 일본군 제2군의 활동은 화원구 상륙→금주성·대련만 점령→여순공방전→여순 대학살의 순서로 이루어졌다.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여단장은 11월 7일 화원구 상륙 후 금주성 공격을 개시하였는데, 공병대가 이중의 성문을 폭파하고 각 포대를 기습하여 청국군은 다수 사상자를 남기고 퇴각하였다. 11월 7일 새벽 일본군은 청국군의 저항을 받지 않고 대련만에 진입하였다. 대련만 점령으로 일본군은 여순의 진입로를 점령하였을 뿐 아니라 중포 상륙을 위한 부두와 장비는 물론 정박지도 획득하게 되었다. 일본군은 화원구 등에서 공성포를 힘겹게 끌고 오는 대신 여순에서 가까운 지점에 상륙할 수 있었다. 대련만 점령에 의해 병참의 요지를 화원구에서 대련만 내의 유수둔(柳樹屯)으로 옮겨 양륙을 용이하게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군 제2군은 11월 14일 여순가도로 남하하였는데, 전투는 18일 오전에 시작되었다. 수색 기병이 토성자까지 진격하여 총격전을 개시하였다. 일본군 사상자는 48명으로 척후 행동은 큰 손해를 보았다. 그 이유는 도로의 기복, 마필의 부족과 피로, 운반 인부 부족 등에 있었다. 11월 19일 각 부대는 여순에서 10㎞인 주가둔(周家屯) 부근에 숙영하였고 소규모의 국지적 전투가 이어졌다.

일본군 여순을 공략하고 함락시키다

일본군 각 부대는 11월 21일 미명에 전진을 개시하여 203포대에 포격을 가하고, 동계관산 서방 포대로 전진하여 정오 전후에 각 부대는 방어포대를 점령하였다. 오후 4시 50분까지 황금산포대 등 동해안의 여러 포대를 점령하였다. 이날의 전투에서 일본군 사상자는 288명, 청국군 사상자는 7천 정도로 기록되었다. 일본군 제2군은 여순 시가 주변에서 숙영하였고, 다음날인 22일 오전 10시 서해안 제 포대를 점령하면서 여순구를 완전 함락하였다. 여순의 함락은 청국의 입장에서는 평양함락에 이은 큰 타격으로 북양함대는 유일의 도크와 공창을 잃게 되어 이후 함정의 수리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일본군의 화원구 상륙 시 청군은 조직적으로 저항하였고 민중들도 장하(庄河), 보란점(普蘭店) 등지에서 자위적인 항일 투쟁을 진행하였다. 이후 대련과 여순에서도 일부 농민은 청국군에 참여하여 자발적으로 군대를 지원하여 축조 공사, 지뢰 매설, 탄약 물자 운반 등을 행하였다. 일본군의 여순 진공 전투 과정에서 탈출한 청국군은 금주-여순간에 개설된 제2군의 병참선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일본군의 요동 진출 초기부터 일본군 군부(軍夫:役夫)에 의한 약탈과 강간사건이 수시로 발생하여 제2군 사령관이 감독 강화에 주의를 촉구한 일도 있었다. 반면 여순 길목인 토성자(土城子)에서 일본군이 패배할 때, 청군에 의한 일본군 병사의 참살과 시체능욕 사건을 일본군은 크게 선전하였고, 이는 여러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1894년 12월 18일자, 『郵便報知新聞』「支那兵의 殘虐」

“이는 우리 회사 화공(畵工)이 묘사한 여순구 함락 전일 일본의 포로가 중국병에 의해 잔인한 학대를 받은 참혹한 상황.... 중국인이 보여주는 잔학상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 제2군은 여순항에 있어 전체 중국인을 살상하지 않은 사실이 있고 우리들은 일개인으로서 여순항에 있는 중국인 전체를 사살하였다는 것에 만강(滿腔)의 동의를 표할 수 없다 운운.”

* 1면 2단의 이 그림은 목을 잘라 대나무 널빤지 위에 놓은 일본인 2명을 여순의 일반 중국인들이 바라보는 모습. 머리와 머리 사이에 ‘도왜인두이과(島倭人頭二顆)’라는 깃발이 걸려 있다.

우리는 악마를 보았다, 일본군의 여순대학살!

여순대학살(여순대도살)이란 1894년 청일전쟁 중 오야마 이와오(大山巖) 대장 지휘 하의 일본군 제2군이 중국 북양해군의 기지인 여순구 공략 당시 일으킨 사건이다. 11월 21일, 여순 점령 직후부터 4일간 일본군 보병 제2연대와 제15연대 제3대대는 무려 2만여 명에 달하는 무저항의 청국 병사와 시민의 대학살을 행했다. 동시에 여순부터 금주에 이르는 지역에서 청군 패잔병 소탕 과정에서도 학살을 자행하였다.

21일부터 여순시가의 소탕작전을 한 보병 제15연대 3대대 1소대 2등졸이 학살의 실태를 종군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때 우리들은 여순에 진입하니 일본 병사의 머리가 도로 근처 나무에 걸려 있었다. 우리들은 이것을 보고 분노가 매우 치밀어 분기하여 중국군을 보면 복수하고자 하여 여순시 안에 있는 사람을 보면 모두 토살(討殺)하여, 따라서 도로 등에 죽은 사람들로 행진의 불편은 곱절이 되었다. 인가에 있어도 모두 살해하고 저항하는 인가는 2, 3인부터 5, 6인의 죽은 자가 없는 집이 없었다. 그 피가 흐르고 그 냄새는 매우 심했다. 수색대를 보내 혹은 토벌하고 혹은 자르자 적은 무기를 버리고 도주할 뿐, 이를 토벌하고 잘랐기 때문에 실로 매우 유쾌하지는 않았다.”(『한 병사가 본 일청전쟁』)

2연대 상등병의 「정청종군일기(征淸從軍日記)」에는, “이 전투에서 우리 전사자를 잔혹하게 행동하여, 즉 배를 가르고 배 안에 흙을 넣고 또한 머리를 자르고 손과 발을 잘라 심하기가 폭행을 능가했다.”

고 하면서, 이것을 본 제1사단 사단장 야마지(山地元治) 중장으로부터 ‘남기지 말고 죽여라’는 명령이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병농(兵農)을 구분하지 말고 사참(射斬)하라’는 명령은 군사령관 오야마와 사단장 야마지 등의 고관이 아니면 할 수 없었던 일로 이후 오야마를 비롯한 일본군 수뇌부는 모두 학살을 부정하고 ‘여순구의 소탕’이라고 말하였지만, 야마지의 ‘학살 명령’과 오야마의 ‘묵인’에서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또한 학살 당사자를 처벌했다는 하나의 기록도 없다.

이에 대한 최초의 보도는 1894년 11월 28일자 영국『Time』지 기사, 「보복으로 학살」로 다음날 보도에는 여순에 상륙한 영국군 장교의 말에, ‘많은 일본인 포로가 수족이 절단된 것을 발견한 것 때문에 일본군은 주민을 일소(一掃)하였다’면서, ‘무차별 학살(massacres)’로 기록하였다. 같은 날자 New York의 『The World』는 비전투원, 부녀자, 유아 등 약 6만명을 살해하고, 살육을 면한 청국인은 여순 전체에서 겨우 36명에 불과하다고 보도하였다.

여순대학살은 저항을 하지 않은 병사와 포로의 학살, 부녀 강간, 아이 참살 등이 이어졌다. 일본군은 무기를 버린 청국 병사를 포로로 대우하지 않고 철저하게 그 자리에서 학살(심지어는 분살[焚殺])하였다. 학살의 피해자 수를 중국 측은 1만 8천에서 2만명으로 본다. 1970년대까지 생존한 피해자들의 증언회고에 따르면, 일본군은 분명히 무기를 버리고 저항하지 않은 청국 병사를 살해하였고, 백발의 노파, 임산부, 10여 세의 소녀를 강간하여 18세 소녀는 목을 매어 자살한 일도 있었다 한다.

당시 우연한 과정에서 이 학살과정을 목격했던 모험 상인이자 무기 밀수꾼인 제임스 앨런(James Allan)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제임스 앨런의 ‘비망록’

“[대학살] 일본군은 도망가는 군중을 떠밀고, 누구에게 할 것 없이 소총과 총검을 격렬하게 휘두르고, 쓸진 사람들을 마치 악마처럼 찌르고 난도질하고 있었다.

군인들이 도시 전역에 빠르게 퍼져나가며 마주치는 모든 이들을 쏴버리고 있었기 때문에 길에서 자주 벗어나야 했고... 거의 모든 거리에서 사람들이 시체에 걸려 넘어지기 시작했고...

일본 병사들 무리가 호수를 둘러싸고 있었는데, 그들은 수없이 많은 도망자들을 호수로 몰아넣고 총질을 하고 물 밖으로 나오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총검으로 다시 밀어 넣고 있었다. 죽은 이들이 수면으로 떠올랐고, 물은 피로 물들었다. 병사들은 복수의 기쁨으로 날뛰고 고함치며 웃고 있었고, 희생자들의 고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것 같았다...

우리는 도시를 관통해서 갔는데, 가는 곳마다 시체가 잔뜩 쌓여 있었다. 나이, 성별,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수백 명씩 마구잡이로 도륙되어 있었다... 살인, 신체절단, 강간, 정욕, 약탈의 극악무도한 잔치 가운데 자행된, 형언할 수 없는 잔혹행위들의 끔찍한 흔적이 새겨진 인간의 잔해들을 나는 죽는 날까지 두렵게 기억할 것이다.

그들(일본군)의 옷과 무기는 피로 물들고 피딱지가 가득했다. 몇몇은 총검에 사람의 머리를 꽂고 다녔다...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악마처럼 보였다.”

그러나 당시 일본 신문 보도 중에는 여성의 강간과 아이를 참혹하게 살해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토성자의 보복 구실로 청국 패잔병에 대해 포로로 대하지 않고 살육하였다는 기록만 보인다. 시체로 산을 쌓았다는 전과(戰果)로 보고하였다(일본군 병사의 11월 24일자 일기기록, ‘시중[市中]에 숨어있는 병사까지 사참[射斬]하여 시체가 쌓여 산을 이루었다’).

외무대신 무스 무네미쓰(陸奧宗光)는 다음과 같은 궁색한 변명을 하였다.

1. 청국병은 제복을 벗어버리고 도망하였다.

2. 여순에서 살해된 평복(平服)을 입은 자는 대부분 모양을 바꾼 병사들이다.

3. 주민은 교전 전에 떠났다.

4. 소수의 잔류자는 총을 쏘며 항전하였기 때문에 명령을 내려 그같이 행동했다.

5. 일본군은 일본병 포로의 잘린 시체를 눈으로 보고 크게 격앙되었다.(토성자 사건)

6. 원래 그대로 일본군은 군율을 준수하였다.

7. 여순함락 시 체포한 355명 전후의 청국인 포로는 후우(厚遇)하여 2, 3일 내에 동경(東京)으로 연행하였다.

당시 일본인들의 정신적 스승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도 『지지신포(時事新報)』에 과장된 기사를 게재하였다.

1894년 12월 14일자, 『時事新報』「여순의 학살은 無稽한 流言이다」

“우리 여순의 대승에 대해 외국인 중에는 그 살육이 많다는 것을 듣고 왕왕 말을 만드는 자가 있다… 승리를 틈타 다수의 중국인을 도륙한다는 한 가지 일은 세상으로부터 욕을 면할 수 없다. 이 참혹한 최후의 거동은 모두 전승의 명예를 말살하기에 족하다는 논평으로 한탄스럽다… 혹은 도망하는 1, 2 시민에는 그 가족들이 유탄을 맞아 살상당한 자도 있고… 여순 시가의 죽은 자에는 무고한 인민이 다수 있다는 것은 모두 상상하여 말한 것이다… 인민을 살육하였다고 말하는 것에 우리들은 그 무계를 경계함과 동시에 금후에도 거짓말을 하는 경우에는 고려없이 살육을 행해 조금도 차이 없다는 것을 감히 단언하는 바이다.”

한편 무스 외상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수상은, “책임을 추궁하는 것은 위험이 많고 득책이 아니므로 어디까지나 불문에 부치고, 오직 변명의 방편을 찾는 수밖에 없다”고 지시한 바 있었다. 여순 대학살을 전후로 한 시기에 일본군은 조선 동학 농민군 진압의 하나의 목적으로, 각지의 농민을 대량으로 학살한 경험이 있었다. 또한 대만 민중도 무차별 살해했다. 전혀 반성이 없었던 일본의 행동은 그로부터 43년 후인 1937년 12월 남경대학살로 이어진다.

여순의 청일전쟁 유적 소개

대련시 시급 관할구의 여순구(旅順口)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유적과 유물 및 기념시설물들이 비교적 완벽하게 보존되어 중국 제일의 ‘노천 전쟁박물관’으로 불리고 있다. 여순의 주요 청일전쟁 유적 유물로는 여순군항, 황금산 포대, 백옥탑(白玉塔), 백옥산 포대, 남자탄고, 만충묘(萬忠廟) 등이 있다.

러일전쟁, 다시 전쟁터가 된 여순

1904년 2월 6일 국교단절 전보를 러시아 측에 발신한 일본은 2월 8일 인천항에 정박 중인 러시아 군함 2척과 9일 여순항의 군함 2척을 불시에 격침시키고 러일전쟁을 발발하였다. 이어 2월 10일에 뒤늦은 선전포고를 하였다. 19일에는 제12사단으로 서울을 완전히 점령케 하였다. 압록강변의 대회전에서 일본군은 청일전쟁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도하(渡河)작전을 개시하여 러시아군 전투 주력을 압록강 건너 청국안동현으로 퇴각시켰고, 4월 말 압록강을 넘어 구련성과 봉황성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이후 일본군은 더욱 대륙 깊숙이 들어가게 되고 9월 4일에 가면 요양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확실한 승리를 굳히는 것은 1905년 1월 초 일본군이 여순항을 함락한 이후부터였다. 여순전투는 일본뿐만 아니라 러시아에서도 육전(陸戰)의 승패여부를 가늠하는 치열한 총 공방전이었다. 당시 종군기자 츠루다(鶴田禎二郞)가 “우리 병사는 적 편에 사체를 쌓아 엄보(掩堡)를 만들었다”고 표현할 정도로 여순전투는 많은 사망자를 냈던 처절한 전투였다. 여순전투와 마찬가지로 치열한 총력전으로 기록되는 봉천대회전에서 일본군은 다시 승리하였고 3월 10일 봉천을 점령함으로써 육전에서의 대규모 전투는 모두 끝이 났다. 전투에 투입된 러시아군은 37만 명으로 이중 사상자 9만, 포로 2만이었다. 반면 승리한 일본도 25만 명의 전투참가자 중 사상자가 7만이나 되었다.

여순해전으로 러일전쟁이 본격화되다

1904년 2월 9일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은 여순항 밖의 기습으로 손쉽게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일본함대는 이날의 해전에서 러시아 측의 중포탄(中砲彈)에 의해 입은 손실이 컸다. 전투에서 발생한 러시아 측의 인명손실은 사망 14명, 부상 71명. 반면 일본군은 사망 3명, 부상 69명의 손실로 비슷한 피해를 입었다. 유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일본함대는 결정적인 승리를 쟁취하지 못했으나 일본의 대중매체는 매우 고무적인 기사를 게재하였다.

2월 12일 알렉세예프 장군 주재 회의에서 대련 방어의 필요성, 여순항만 출입구의 방어 등이 제기되었다. 대련항의 수비는 일본 전함이 여순에 접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방어용 기뢰를 부설하는 것이었다. 3월 27일 여순에서 전투가 다시 전개되었는데, 러시아 병사들은 일부 일본 함선으로부터 함포, 기관총 등의 전리품을 노획하였고 이 무기들은 후일 여순 방어에 사용되었다.

도고 재독은 러시아 해군기지의 입구에 기뢰를 부설하였고, 4월 13일 일본함대의 기뢰를 건드려 페트로 파블로프스크 호는 2분 만에 침몰하면서 함대사령관 마카로프 등 27명의 장교, 620명의 수병이 전사하였다. 5월 15일 일본함대가 여순에 나타났으나 러시아의 기뢰에 2척의 일본 구축함이 침몰했으며, 히츠세 호에서만 장교 및 하사관 36명, 병사 457명이 전사하였다. 이날은 일본함대의 ‘블랙-데이(Black Day)’로 기록되었다.

해상에서의 힘의 관계가 러시아에 유리하게 형성되어 태평양 함대가 공격으로 전환할 수 있는 상황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함을 보호하라는 극동총독 알렉세예프의 명령이 있었고 또 해군 소장 비뜨게프트 역시 공격의 성공에 회의적으로 반응했다. 대포와 병력의 일부를 여순의 육상전선에 할애한 러시아 함대는 기뢰부설, 육군에 대한 함포 지원, 파손된 전함의 수리 등에 치중했으며, 유럽의 러시아로부터 해군력이 보강되기를 기다리면서 일본의 봉쇄작전에 대응하고 있었다.

이어지는 금주와 대련항의 전투

일본군 제2육전대는 5월 15일 여순으로 향했다. 이 부대의 최우선 과제는 금주와 대련항을 점령하는 것으로, 5월 26일 일본군은 러시아군의 경계 초소를 압박하기 시작하여 금주시를 점령하였다. 금주전투에서 러시아군은 사병 1,375명(전투 참가자의 31.5%)와 장교 28명(11.6%)의 손실이, 일본군은 사병 4,071명(11.6%), 장교 113명(22.1%)의 손실이 있었다. 일본군은 금주와 대련항을 점령한 후 여순침공을 자제했으며 후퇴하는 러시아군을 추격하는 것도 자제하였는데, 금주전투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은 것이 그 이유 중 하나였다.

5월 25일부터 7월 30일 동안의 일본군 사상자는 1만 2천명에 달한 반면 러시아군의 병력손실은 약 5,300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모든 대포가 엄폐되지 않은 진지에 배치되었는데, 바로 그것이 일본군에 의해 손쉽게 제압된 원인이었다. 전쟁이 시작된 날부터 일본군이 여순을 포위하기까지의 6개월 동안 여순 요새 내에는 많은 공병시설이 갖추어졌고 강습이나 장기간의 포위에도 견딜 수 있는 요새로 변했다. 그러나 요새는 우물이 부족하여 식수공급에 어려웠다. 여순항은 러시아태평양함대의 기지로 총 병력은 1만 2천명이었다.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장군은 만주에서 활동 중인 일본군을 보강하기 위해서는 빠른 시일 내에 여순을 점령해야 한다는 도쿄정부의 요구에 의거하여 청일전쟁 당시와 같이 속도전으로 진지를 점령한다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오랜 기간 진행된일본군의 여순 총공격

네 차례에 걸친 여순 공격은 8월 19~24일, 9월 9일~22일, 10월 30일~11월 2일, 11월 26일~12월 6일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마지막 공격은 해상전이 추가되었다.

제1차 전투에서는 중포와 기관총이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일본군의 중포에 러시아 방어군의 화력이 압도되었으며, 보루도 파괴되었다. 러시아군은 탐조등, 소총 및 기관총 사격과 포격을 가했고, 일본군은 야간전투에서 조명탄을, 근접전에서는 수류탄을 사용하였다. 러시아군 기관총 사격으로 일본군은 막대한 병력 손실을 입었고, 보루 쟁취를 위한 대부분의 전투는 백병전으로 진행되었다. 격렬한 돌격전 당시 일부 일본군 병사들은 공격을 거부했으며, 명령에 불복종하거나 심지어 장교를 살해하기도 하였다. 8월 24일 밤 제8예비연대에서는 폭동이 발생하여 일본군 지휘부를 당황시켰다.

8월 25일부터 양측이 포격을 중단하면서 여순 전투는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고, 1차 돌격전에서 실패한 일본군 지휘부는 장기적 포위전으로 전환하였다. 러시아군은 요새를 완전 복구하고 이전 상태로 회복시켰다. 그러나 이후 일본군은 동부 전선의 보루와 여순시, 항구를 강력하게 포격하기 시작하였다. 일본군 중 일부가 포대를 돌파했으나, 백병전에서 모두 전사하였고 노기 장군은 완전한 실패를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일본군 지휘부는 대규모 지하 갱도 작업에 의존하였다. 양국 군 사이의 ‘갱도 전쟁’은 요새 함락 때까지 계속 되었다. 그러나 계속된 전투와 포격, 파괴된 방어구조물 복구를 위한 고된 작업, 조악한 식량사정 등은 대부분이 환자였던 러시아군 사병과 장교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11월 말의 제4차 돌격전에 투입된 일본군은 약 5만 명으로, 11월 26일 하루 동안에만 일본군은 약 4,500명의 명력을 손실하였고, 러시아군은 1,500명 이상이 전사했다. 이후 전투에서 러시아군 수비대는 5천명의 병력을, 일본군은 1만명 이상을 손실했다. 일본군은 러시아 전함에 포격을 가해 전함 폴타바 호, 장갑함 뽀베다 호와 순양함 팔라다 호가 완파되었다. 이후 여순 요새와 시를 향한 포격이 계속되었다. 조악한 급양으로 티푸스, 괴혈병, 야맹증 환자가 다수 발생하였고, 일본군은 가죽벨트를 태워서 유독가스를 발생시키고, 갱도에 독가스를 사용하였다.

여순함락과 제정러시아의 몰락

노기 마레스케가 이끄는 제3군은 8월과 9월, 두 번의 여순 총공격에 실패하였고, 10월 말부터 예비전력의 일부를 투입하여 제3회 총공격에 돌입하였다. 고다마 참모총장이 직접 지휘한 제4회 총공격에서 여순항을 내려다보는 203고지[노기는 후에 ‘이영산(爾靈山)’이라 이름 붙이고 기념탑을 건립]를 12월 5일에 탈취한 후, 다음해 1월 여순을 함락하였다. 여순 공격에 일본군은 13만 병력을 투입시켰는데, 반년 사이에 5만 9천명이 살상되었다.

스페스셀 장군은 1905년 1월 2일 아침 항복교섭에 동의하는 노기 장군의 서신을 수령하고, 오후 7시에 러시아와 일본 양측이 문서에 서명하였다. 항복조건에 따라 전체 수비대원이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고, 모든 보루, 군함, 무기, 탄약, 화폐 및 기타 군수물자는 당시의 상태로 일본군에게 양도되었다. 여순을 접수한 일본군은 요동반도 전체를 점령하게 되었으며 한국과 중국 및 만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거점을 획득하였다.

블라지미르 레닌(V. I. Lenin)은 여순 함락은 ‘돌이킬 수 없는 군사적 충격이었다. 이 전쟁에서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였던 제해권이 결정되었다“고 그 의미를 분석한 바 있다. 그는 러시아군의 여순 패배를 짜르 체제가 붕괴하게 되는 직접적인 징조로 보았다. 실제로 여순 함락으로부터 며칠 후인 1905년 1월 22일 페테르부르크에서는 노동자의 평화적 시위행렬에 총격을 가하는 사건(이른바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했으며, 이후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게 된다.

여순의 러일전쟁 유적 소개

여순의 러일전쟁 유적으로는 전암포대, 동계관산 보루, 203(爾靈山) 고지, 수사영(水師營) 회견소 등이 대표적이다. 그 외에 일아감옥 구지(日俄監獄舊址), 관동법원 구지(關東法院舊址) 등의 유적이 있다. 문화대혁명 당시 일부 전쟁 유적과 유물들이 인위적으로 파괴되기도 하였다. 지금 여순은 북경의 원명원(圓明園), 위해의 중국갑오전쟁박물원, 심양의 9.18 기념관, 남경의 대학살 기념관 등과 함께 중국의 대표적인 ‘물망국치(勿忘國恥-나라의 치욕을 잊지 마라)’ 도량이자 야만의 시대를 벗어나 세계평화를 만들어 나가는 생생한 교과서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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