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분류

1930년대 일제에 의해 만주로 강제 이주한 삼남 지방 조선인들

한자 1930年代 日帝에 의해 滿洲로 强制 移住한 三南 地方 朝鮮人들
중문 1930年代被日帝所强迫移居到满洲的三南地区朝鲜人们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사건|이주
정의

일제가 만주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한반도 조선인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는 과정과 이주민들의 생활상.

일제의 1930년대 집단 이주 정책 실시

일제는 1931년 9월 만주 침략 이래로 재만 한인들의 ‘신변 안전’과 ‘경제적 안정’을 내세우며 ‘집단 부락’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집단 부락’ 정책은 일제의 대륙 침략의 일환으로 재만 한인을 강제로 토지에 결박하고, 항일 무장 투쟁 세력과의 연계를 철저하게 차단하여 만주에서의 식민 지배를 공고히 하려는 데 있었다.

당시 만주 경영은 조선 경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일제는 1910년대 초부터 전만주 일대로의 농업 이민을 적극적·지속적으로 추진하였지만, 성과는 미미했다. 이에 일제는 만주에 정착한 한인들을 집단 부락을 통해 강제적으로 통제,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1931년 9월 만주 침략 이후 일제는 만주의 유랑 한인을 모아 집단 부락 정책을 실시하여 어느 정도 효과를 보자, 조선 내의 한인들을 강제 이주시켜 집단 부락 정책을 한층 강화하고자 했다. 이는 ‘만주통’인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안전 농촌의 건립과 집단 부락, 강제 이주 조선인

일제는 1931년 만주 침략 이후에 ‘안전 농촌’이라며 한인들의 이주를 강제하였다. 1932년 8월 한인에 대한 통제 및 안정 정책에 따라 식민회사 동아 권업 회사는 1932년부터 1935년까지 남만과 북만의 조선족 난민들을 영구현 전장대, 철령현 난석산, 유하현 삼원포, 흑룡강성 주하현 하동과 수화현 수화 부근에 집중시켜 안전 농촌을 세웠다. 이를 위해 동아 권업 회사는 토지 9,850여 정보를 사들이고 한인 난민 3,546세대를 수용하여 수전을 개간토록 했다. 일제는 싼 값으로 땅을 사들이고는 한인들에게 이를 내어주고는 과중한 관리비를 내도록 했다. 1938년 전후로 ˂자작농 창정 계획˃을 실시하여 한인 농민들을 더욱 잔혹하게 착취하였다.

1933년부터 일제는 연변 항일 유격 근거지의 주변 지역과 산간 지구의 산재호들을 강제 이주시켜 ‘집단 부락’을 세우고 유격구를 ‘무인 지대’로 만들었다. 처음에는 조선 총독부의 지령에 따라 동양 척식 주식회사에서 투자하여 1933년에 북하마탕·태양촌·중평촌·춘흥촌·세린하·장인강·토산촌·청산리·낙타하자 등지에 9개의 집단 부락을 세우고 900여 세대의 한인들을 수용하였다.

1934년 만주국 정부는 일본 관동군의 사촉하에 집단 부락 건설에 관한 통령을 반포하고 3년 동안에 65만 7,720엔을 투자하여 집단 부락을 건설하기로 계획하였다. 1935년의 통계에 따르면 연변 각 지방에 건립된 집단 부락은 144개이고 1만 2,362세대를 수용하였다.

만주 동북 지역 농업 자원 수탈과 강제 이주

일제는 1931년부터 1936년 사이에 동북에서의 자기들의 식민 통치 질서가 기본적으로 확립되자 조선에서의 식민 통치를 유지하고 동북의 농업 자원을 한층 더 약탈하기 위하여 조선의 파산 농민들을 대량적으로 동북에 이주시켰다.

1936년 8월 일본 관동군은 괴뢰 만주국 정부를 사촉하여 《재만 조선인 지도 요강》을 제정하고 해마다 1만 세대, 5만 여명의 조선 파산 농민들을 치안이 비교적 안정된 연변 및 동변도의 23개 현에 이주시킨다고 규정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조선의 서울과 괴뢰 만주국의 신경[장춘]에 각각 조선 이민 경영 기구인 ‘선만 척식 주식 회사’와 ‘만석 척식 유한 주식 회사’를 세웠다.

1937년, 서울 ‘선만척’은 조선 남부에서 2,500여 세대의 농민을 선정하여 동북의 ‘만석척’을 통하여 괴뢰 간도성과 괴뢰 봉천성에 이주시켰다. 100세대를 단위로 이루어진 이민 부락은 집단 부락의 형식으로 조직되고, 이른바 ‘자작 농창정’이 실시되었다. 1939년까지 조선인 집단 부락 수는 147개로, 이민 수는 9,600세대, 4만 9,600명으로 늘어났다.

전시 제체 하 일제의 만주 이민 정책, 개척단 이민

1937년 《7.7》사변 후 일제는 이민 분야를 포함한 제반 경제를 전시 체제로 개변시켰다. 1938년 7월, 일본 관동군은 조선인 이민 범위를 확대하기로 결정하고 《조선인 농민 처리 요강》을 반포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조선인 이민을 의연히 해마다 1만 세대씩 받아들이되, 이민 지역을 중소 국경 지대와 특정 지역 외의 전 동북의 39개 현으로 확대하는 동시에 이민 형태를 집단 이민, 집합 이민, 분산 이민 등 3개 부류로 획분한다는 것이었다. 새로 설립된 집합 이민은 집단 이민에 비하여 규모가 작을 뿐만 아니라 이민 모집 형식에서도 ‘선만척’이 이민 신청자들을 상대로 각기 이주자들을 집합시켜 이주시켰기에 이민자들의 성분이 비교적 복잡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폭발한 후 일제는 군내의 군수 산업의 토대로 되고 있는 광산업에 필요한 노동력을 조선에서 강제 연행하는 정책을 실시하였기에 동북으로의 조선인 이민 수는 상대적으로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1941년 6월에 반포된 《만주 개척 정책 기본 요강》에 따르면 집단 이민, 집합 이민은 해마다 1만 세대의 절반을 점하였다. 새로운 규정에 따라 재래의 집단 이민은 집합 이민으로 취급되고 새로운 집단 이민은 《일본 개척단법》에 따라 조직되는 ‘개척단 이민’이 되었다. 이는 일제가 송화강 하류와 동료하 일대에서 긴급 경작지 건설에 조선족 이민을 내몰아 수전 개발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리하여 1941년부터 1944년 사이에 6만 4,887명의 조선족 농민들이 동북에 강제적으로 이주되었다.

조선인 집단 이민 정책의 함의

일제의 조선인 집단 이민 정책은 조선에서의 자기들의 식민지 통치를 공고히 하는 한편 조선족 농민들의 수전 농사 기술을 이용하여 동북에서의 염가 농산물을 약탈하여 식민지 이익을 얻으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때문에 일제의 조선인 집단 이민 정책은 파쇼적 강제와 기만적인 선전을 토대로 하여 감행되었다. 하지만 장시기 동안 식민 통치를 받아 온 조선족 농민들은 가족을 데리고 도주하여 동북으로 이주할지언정 이민단에 가입하기를 거절하였다. 이리하여 매년 1만 세대, 5만명이라는 일제의 이민 계획은 종래로 완수되어 본적이 없었다. 1945년 일제가 망하자 그들의 집단 이민 정책도 종말을 고하였다.

집단 부락은 상당 부분 유사한 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설치 주체가 동아 권업 주식 회사와 동양 척식 회사로 분명한 차이가 있고, 설치 지역이 남만주와 연변 지역으로 상이하다는 점에 서 다른 점이 있다. 이 외에도 설치의 근원적 목적에서 명백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인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였던 연변 지역이 가지는 특수성과 연계하여 연변 지역 집단 부락은 제국주의의 강제성과 침략성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즉 강렬하게 투쟁하는 항일 무장 투쟁 세력을 탄압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을 강화하여 요새화 한 것이 바로 연변 지역 집단 부락이라고 할 수 있다.

만주 조선인 집단 부락의 설치 및 운용

집단 부락의 설치는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전반기 집단 부락의 설치[1933~1936]와 그 후속 시기로서 후반기 집단 부락의 설치[1937~1941]가 그것이다. 두 시기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이 두 시기에 집단 부락 설치의 목적이 ‘치안 안정성’에서 ‘수탈 강화성’으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전반기를 통해 일단의 성공을 판단한 일제는 후반기 들어 항일 무장 투쟁 세력 탄압을 변함없이 강화해 나가는 한편, 연변 지역에 대한 적극적인 수탈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두 시기가 분절적으로 인식되어 따로 떼어놓고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그 연결 고리가 되는 시점이 바로 1936년이었다.

전반기 집단 부락의 설치와 후반기 집단 부락 설치의 연결 고리는 1935년의 전반기 집단 부락 설치 중 제3차 설치와 1936년의 만선 척식 주식 회사와 선만 척식 주식 회사의 설립에서 찾을 수 있다. 1935년 들어 항일 무장 투쟁 세력에 대한 ‘치안 숙정’이 본궤도에 올랐다고 판단한 일제가 연변 지역 집단 부락 정책에 변화를 주고자 하였던 시점에서, 제3차 설치가 진행되었다. 제3차 설치는 주로 1, 2차 설치의 미비점을 보완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졌으나, 기존의 집단 부락이 항일 무장 투쟁 세력을 효율적으로 탄압하기 위해 산지에 분포하였던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원지역으로 내려온 것이 특색으로 들 수 있다. 또한 조선 총독부와 함께 전반기 집단 부락의 설치의 주체였던 동양 척식 회사가 1936년 9월, 만선 척식 주식 회사와 선만 척식 주식 회사의 설립을 통해 그 권한을 양도하여 보다 유기적인 체계를 정립하고, 정비하는 모습은 1937년 이래의 대규모 한인 강제 이주와 본격적인 수탈 체제의 출범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강제 이주 집단 부락 조선인의 생활상

집단 부락 내로 이주하게 된 한인들은 통제된 생활과 엄격한 규제 속에서 마치 ‘수용소’와도 같은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집단 부락 안으로 이주하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항일 무장 투쟁 세력을 인적, 물적으로 지원하였다.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에 일제는 만주 지역을 병참 기지화 하여 모든 자원을 수탈하였다. 이미 1937년부터 시행되던 농산물의 통제가 강화되었으며, 1938년 말부터는 곡물 ‘출하’와 양곡 배급 정책이 실시되었다. 이로 인해 만주 경제는 고질적인 실업 문제와 인플레이션에 허덕였다.

또한 일제는 ‘사상적 건전’을 강조하면서 집단 부락의 한인들을 세뇌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오족 협화를 통해 민족의 정체성을 훼손시켰으며, 명덕회(明德會)라는 하부 조직을 통해 철저한 사상적 통제를 가하였다. 소학교에서는 어린 학생들까지 조선어를 사용하면 벌을 주는 잔혹함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마치 조선 내에서의 민족 말살 정책을 떠올리게 하는 이러한 일제의 강요 속에서 재만 한인들은 고난의 삶을 영위해 나갔다.

일제는 연변 지역을 침략 기지로 활용하였다. 1930년대 초반에는 만주국의 지배 확산을 위해 항일 무장 투쟁 세력을 탄압하는 ‘전초 기지’로, 중반에는 가장 치열했던 전투의 ‘최전선’으로, 그리고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의 발발을 즈음해서는 ‘후방 병참 기지’로서의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일제는 소위 ‘삼광정책(三光政策)’을 통해 연변 지역을 황폐화시켰으며, 한인들은 그 속에서 더할 나위 없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1941년 6월, 만선척이 만주 척식 회사와 병합되면서 이후 연변 지역 집단 부락은 철저하게 지원에서 소외되었고 수탈은 강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인들이 가장 심하게 고통 받았으며, 그 고통은 해방 후에도 재만 한인들에게 해악으로 남았다.

조선총독부는 조선 농촌의 과잉 인구를 해소하기 위해 그리고 만주의 식민 당국에서는 조선인 이민들을 받아들여 식민 통치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한 국책 사업의 일환으로 조선인의 만주 이민을 추진했다.

이에 1937년 3월부터 만선 척식 주식 회사가 취득한 황무지 및 토지에 조선인을 이주시키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37년-1943년 동안 만주로 이주한 한인은 집합 이민 6만 5천여 명, 집단 이민 2만 6천여 명 모두 9만 1천여 명에 달했다. 자유 이민자도 1938-1942년 동안 4만 9천여 명에 달했다. 이처럼 조선 총독부가 추진한 국책 이민 사업은 대규모로 추진되었고 이에 연루된 조선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민자들의 일본인 및 일본 식민 당국에 대한 이미지를 심어주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다음은 당시 일제의 수탈에 대한 조선인의 회고 기록이다.

“기차를 타고 아부리에 와서 내렸다. … 모두들 산 설고 물 선 곳에 와서 입은 게 없이 추위에 떨면서 만척 회사에 내주는 썩은 좁쌀에 맨 소금을 먹으면서 살고 있었다. 거기서 우리는 농사를 시작했는데 농사 도구는 만척 회사에서 몽땅 내주었다. 그해에 심기는 강냉이두 심구 통구 심구 감자두 심었는데 기온이 차구 서리가 일찍 내려서 잘 안 되었다. … 허나 이사를 하려면 먼저 만척 회사에 내준 물건 값을 몽당 갚아야 하였다. 그때 어느 집이나 문을 들어서면 눈에 확 보이게 만척 회사에 내준 빚 문서가 붙어 있었다. … 허나 그걸 갚지 않고 도망하자 붙잡히면 죽도록 매를 맞는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는 이사하려는 눈치를 보이지 않고 있다가 하루 밤에 온 집 식구들이 가만히 떠났다.”

참고문헌
  • 김영, 「‘滿洲國’에서의 일제의 米穀 政策과 이주 조선인」(『한국 민족 운동사 연구』37, 2003)
  • 김기훈, 「일제하 ‘만주국’ 이민 정책 연구 시론」(『아시아 문화』 18, 2002)
  • 류필규, 「1930~1940년대 연변 지역 한인 ‘집단 부락’의 성격」(『백산 학보』 , 2008)
  • 김주용, 「1930년대 간도 지역 한인의 집단 이주와 삶」(『한국학 연구』21, 2009)
  • 윤휘탁, 「근대 조선인의 만주 농촌 체험과 민족 인식-조선족의 이민 체험 구술사를 중심으로-」(『한국 민족 운동사 연구』64,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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